16화 연지아 결혼식 꽃비 내릴 때 탈의파 대사만 들으면 우는 병에 걸려서 상상해 본 이야기
덬들이 연아음 러브스토리는 구전되면서 와전도 되었을 거라는 글들 보고 그 내용도 한 줄로 넣어 봤음
태교 이야기 때도 그랬지만 앵두 열매를 가져다 쓴 건 열매의 색깔이 두 사람의 상징과도 같은 붉은 색이기도 하고 앵두꽃의 꽃말은 수줍음 앵두나무 꽃말은 하나뿐인 사랑이라고 해서 앵두나무로 써 봤어.
“이번엔 어디서 오는 길이오.”
잠잠하던 숲 사이로 솨솨 남실바람이 건너왔다. 오수를 즐기던 아름드리나무가 깨어 물었다.
“요 남쪽 골짜기서 오는 참이오.”
“허면 우리 산신 먼저 뵈었겠소. 사냥꾼 활에 상한 나무와 다친 노루 있다 하여 치료차 그리로 가시었는데.”
“보다마다. 내 반가워 알은체하려다 가만히 이리로 왔는걸.”
“그런다고 모르셨을 리 없지마는 어인 일로요.”
바람결에 그윽한 향기 뿜어내며 흐드러진 꽃들이 몸을 기울였다.
“내 당도하여 보니 엎드러진 노루 이제 막 딛고 일어나 뛰놀던 때라. 곱디고운 아음 아가씨 청량한 웃음소리에 앵도나무 제 몸 떨어 붉게 영근 열매 떨구니 치마폭 한가득 받아내더이다. 이리 오라 옆자리 내어주는 아가씨 곁에 다가앉아 열매 받아 드시는 산신의 얼굴 가득 앵돗물 드니 퍽 기꺼우나 내 어찌 나설 수 있었겠소. 그리 정다운 눈빛은 내 여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선연한 눈빛이었소.”
“모른 체 한 것치고는 퍽 오래 머물러 꼼꼼하게도 보시었소.”
“하 아름다운 절경이기에 나도 모르게 흠뻑 취하였지 뭐요.”
살랑살랑 잔바람 일으키니 농 던진 꽃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나부꼈다. 홀로 산 세월 아득한데 산신께서 이제일까 저제일까 기원하던 아음 아가씨와 드디어 연이 맞닿았다하니 숲은 나날이 떠들썩하였다.
“헌데 경사스러운 일임에는 틀림없으나 산신께 인간 여인이 가당한 일인지는 모를 일이오.”
애당초 다른 세상에 속한 이들이 아닌가. 서로에게 허락된 세월의 흐름도 각기 다를 진데 어찌 감당하시려는가. 바람은 아름드리나무 무성한 잎사귀 사이사이로 들고나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르락사르락 마주 부딪는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산신께서 그것을 모르시어 아음 아가씨를 짝으로 마음에 들이셨겠소. 우리네 우려하는 마음이래야 겨우 몇 날뿐이지마는 산신께서 이 날이 오기까지 헤아린 날들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오.”
“허고 산신은 구미호가 아닌가요. 여우의 습성대로 아음 아가씨는 산신의 짝이 되신 바 이제 물릴 수 없는 게지요.”
“비록 인간 여인이나 아음 아가씨 또한 백두대간의 안주인 되시기에 더할 나위 없답니다. 숲의 가장자리에서 나는 소리에도 귀 기울일 줄 아는 심성도 심성이지만 산신의 마음 날로 더욱 넉넉하게 하시니 천생배필임에 틀림없어요.”
나무와 꽃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며 산신과 아음을 두둔하고 나섰다. 바람은 저어되는 맞바람 애써 밀어내고 산천초목에 순풍으로 화답하였다. 바야흐로 풍요의 계절이었다.
“인제야 오시었소.”
깊은 어둠 속 북쪽서 된바람이 밀려왔다. 메마른 잎사귀들 바람에 흩날려 길을 헤매다 바사삭바사삭 부서져 내리었다.
“산신께서 삼도천을 얼리었다 들었소. 인제 예로는 아주 돌아오시지 않는다는 게 사실이오.”
“그러하다오. 산신의 자리를 내어 놓으시고는 아음 아가씨 살아계시던 인간 세상으로 건너 가시었다오.”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산신과 아음 아가씨의 찬란한 시절을 보았던 때가 언제였던가. 그 시절이 있기는 하였던가. 찰나였던 한 시절 어디 가고 주인 잃고 생기 잃은 산천초목만 남았는가.
“눈에 바로 보이는 저 자리였어요. 바로 요 앞서 일생 하나뿐인 연인을 영영 떠나보내시었으니 어찌 붙잡을 수 있었으리까. 한 맺혀 우는, 그 애끊는 울음 언제까지고 예서 우시라 어찌 붙잡을 수 있었으리까. 산신께서 사셔야 우리네도 우리답게 살 수 있거늘 어떻게든 살아 주십사 바라여 붙잡지 못하였나이다.”
숲은 온통 버석한 울음소리로 가득하였다. 비통한 마음 금할 길 없어 바람은 점차로 서늘하여졌다. 선득한 비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일의 결국이 이리 되고 보니 흉흉한 말들이 불길이 되어 너울너울 백두대간 끝자락까지 넘어오더이다.”
“풍문으로 아음 아가씨가 천년 묵은 구미호에게 홀린 노리개 되어 결국에는 잡아 먹혔느니 어쩌니 찧고 까부는 이들이 있다지마는 어불성설임을 알 이들은 다 알지요. 산신께는 아음 아가씨가 하늘이자 땅의 모든 것이었다는 것을요.”
억울하여 파드득거리던 꽃잎들이며 채 여물지 못한 열매들이 떨어져 내렸다.
“다시 태어나리라 약조하시었다니 아음 아가씨와 재회하는 날 산신께서도 잊지 않고 찾아오시겠지. 내 이제 회리바람 되려하니 더는 지체하지 못하리라. 다른 미쁜 소식 들리거든 이른 시일 내에 들르리다. 그날까지 부디 다들 안녕하시오.”
600여 년 만에 산신이 환생한 연인과 함께 숲을 찾았다. 산신보다 앞서온 바람이 지난 날 늘 그러했듯이 숲의 안녕을 확인하였다. 그 오래 전 식음을 전폐한 채 홀로 외로이 하산하던 때와는 달리 연인의 손을 맞잡고 등산하는 산신의 모습을 보자니 아음 아가씨와 동행하던 때로 시간을 되돌린 듯하였다.
이전에도 바람이 오며가며 아음 아가씨와 닮은 이들의 소식을 간간이 전하여 주기는 하였으나 그중 산신의 인연은 없었다. 산신의 연인은 대체 어디쯤 계시는 걸까. 혹여 산신을 잊으신 건 아닐까. 산신께서는 과연 찾으실 수 있을까. 이 기다림의 결국은 어찌 되려나. 한숨 짓던 나날들이었건만 간절히 그리고 그리던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나.
한들한들 숲은 백두대간의 이전 주인을 환대하였다. 굳이 서로 소리 내어 그 동안의 노고를 위로하지는 않았으나 그 긴 세월 세찬 눈비 맞으며 한 자리를 지킨 꽃과 나무도, 그 긴 세월 세찬 눈비 맞으며 한 여인을 찾아 헤맨 산신도, 서로의 한결같음을 공감하였다.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반복되는 윤회의 덫을 거슬러 산신이 간절히 바라던 인간이 되어 돌아왔음을 선들바람이 전하였다. 산신과 연인의 백년가약 소식과 함께. 다시는 백두대간의 주인으로 돌아오시는 일은 없겠구나 하나같이 아쉬워하였으나 오롯이 짊어져야만 했던 지독하게 잔인한 지난 세월의 무게를 내려놓은 산신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의 인사를 건네었다.
“운명의 짝과 재회하시었으니 이보다 더한 경사는 없을 것이나 육백 년의 기다림으로 다시 맺은 연이 이제 기껏해야 육십 년이라니. 인간의 생사가 여간 아쉬운 게 아니네요.”
“그런 말 마오. 육십 년이 아니라 육 년, 아니 육 개월의 삶이 남았다 할지라도 산신은 기다리셨을 테요. 육백 년보다 더 길고 긴 기약할 수 없는 날들이라도 기꺼이 감내하였을 테고 말이오.”
“비익조라 그러오. 연리지라 그러오. 세상에 첫발 내딛은 그 처음 길은 서로 달랐으나 하나 되어 한 길 갈 운명이었으니 그 긴 세월 건너 오늘 이렇게 부부의 연을 맺은 게지요, 결코 홀로일 수 없는. 허니 두 분 바라건대, 이 생애 마지막 날까지 잡은 손 놓지 마시고 아무쪼록 다음 생에도 반드시 만나시리라.”
나무들 사이사이 다사로운 바람이 불어주는 때와 시를 따라 이연과 지아 앞에 펼쳐진 날들 위로 꽃비가 소담하게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