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호가 나오는 드라마도 처음 본 데다가 판타지든 액션이든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어설프기 그지 없지만 그래도 없는 상상력과 필력을 쥐어짜내 봤어.
이제 연아음 이야기는 이게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까지 쓸 생각이 있었던 게 아닌데 얼레벌레 여름부터 가을, 겨울, 봄까지 다 써 봤네.
내관과 나인(항아)은 요사이 안팎으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아마도 경칩이었을 게다. 저녁 어스름 깔릴 때서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돌아온 아음의 눈이 발갛게 부어 있었다. 당최 봬주지를 않아 뭔지 모를 것을 세상 소중하게 손에 쥐고 집을 나설 때만 하더라도 생기 가득하던 아음이 전연 다른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곱다시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날부터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마실을 나서던 아음이 집에만 틀어박혀 도통 바깥출입 할 생각을 아니 하였다. 여느 댁 과년한 아가씨라면 마땅한 행실이라 했으련만 구중궁궐 살 적에도 담 밖의 소리 듣기를 무엇보다 즐겨하던 아음이 아닌가. 바깥소식이 하 흉흉하여 차라리 잘 되었다 싶으면서도 무슨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난 듯싶어 내관과 나인은 안달복달이었다.
“호환이 난 게야, 호환이.”
“호환이라니. 또 누가 호식이라도 당했단 말이냐.”
대청에 그림처럼 앉아 봄비 내리는 소리에 가만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아음이 물었다.
“재 너머 빙장 환갑잔치 다녀오던 부부가 범에게 먹혔답니다. 천만다행으로 어린 자식 하나가 그 난리통에도 어찌저찌 살아 돌아왔다는데, 허이고 아주 야단입니다.”
“제 부모 찢어발겨진 옷가지를 품에 끌어안고 돌아온 것을 새벽나절에 조모가 발견하고는 귀신이라도 본 줄 알고 나자빠졌다지 뭐예요. 조모는 혼절하고 그 안쓰런 것은 물 한모금도 제대로 못 넘기고 줄줄 흘려내고만 있답니다. 줄초상이나 안 나면 다행이겠어요.”
“졸지에, 하필 눈앞서 부모를 잃다니.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어지간히도 까마득하겠구나. 딱하기도 하지.”
말끄러미 담장 너머를 바라보는 아음의 낯빛이 퍽 서글펐다. 소중한 이를 잃는다는 것은 단절이니 세상은 여전히 흘러가나 나만 홀로 고여 침잠하는 것이었다. 내리던 비가 멎어가고 있었다.
그 밤 아음은 비 개인 맑은 밤공기 속에서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길어져만 가는데 아음은 접히지 않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였다. 그때 바깥이 소란하였다. 천 년 묵은 여우가 나타났다며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귀에 박혔다.
‘이연이 숲의 경계를 넘었다고?’
변고가 난 게야. 정리되지 않는 생각이나 서글픈 마음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아음은 잠든 내관과 나인 몰래 서둘러 장옷을 둘러쓰고 집밖을 나섰다. 경칩 이후 처음 있는 바깥출입이었다.
세 치 혀로 아음의 진심을 베어낸 후 이연은 선득하여질 때마다 가슴을 지그시 눌러야만 했다. 내가 아음에게 무슨 말을 했던가. ‘인간 주제에’라고 했었나. 다시는 오지 말라고도 하였지. 아음은 그날 이후 발길을 뚝 끊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천호와 인간 여인이 마음을 통한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라 치면 이연은 손끝이 차가워졌다. 언제부터 그리 착실하게 말을 잘 들었다고, 이연의 입에서 자조 섞인 웃음이 새나왔다. 매몰차게 몰아낸 주제에 무슨. 아음의 눈에 차오르던 눈물이 떠올랐다. 이내 이연의 눈가에도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그저 그런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사위는 어둑한데 사방 골짜기에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이연의 눈과 귀가 본능적으로 영민하게 움직였다. 범과 창귀 무리로구나. 동서남북으로 각기 한 마리씩, 범 한 마리에 붙은 창귀는 여럿. 범의 몸에서 날래게 뛰어오른 창귀 하나가 사냥꾼이 심어 놓은 화살더미를 찾기 위해 높은 나뭇가지 위로 향하였다. 이연은 즉시 검을 빼들었다. 이연이 날린 검에 맞은 창귀의 비명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역겨웠다. 범은 몸이 육중하여 굼뜨니 한 마리쯤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상대는 여럿이었다. 방심해서는 아니 된다. 이연은 땅을 박차고 올라 저를 향해 내달리는 범의 몸을 등에 달라붙은 창귀와 함께 단번에 꿰뚫었다. 범이 쓰러지자 땅이 뒤흔들렸다. 뿜어진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피비린내를 풍기며 소멸하는 광경을 보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얼굴에 튄 피를 닦아낼 새도 없이 또 다른 범의 턱에 붙은 창귀의 머리통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검은 놈의 머리통을 으스러뜨리고 범의 목구멍을 뚫고 나갔다. 범의 겨드랑이 안쪽에 숨어있던 놈이 검을 쥔 이연의 팔을 잡아 긴 생채기를 내었으나 곧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범과 함께 소멸하였다. 다른 한 마리도 어렵지 않게 잡았으나 문제는 마지막이었다. 이놈은 이연을 향하는 대신 숲의 남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범의 광대에 붙은 창귀의 웃음이 음흉하였다.
지난 밤 구해낸 사내아이 때문인가. 그 아이를 다시 잡으려는가. 그 아이라면 아음이 항시 오르내리던 그 길로 내려 보내지 않았던가. 이연의 마음이 조급하여졌다. 다른 세 마리와는 달리 이놈은 달리는 속도가 퍽 날래었다. 피와 땀에 젖어 지친 이연이었지만 인간들이 사는 고을만은 아니 되었다. 있는 힘을 다해 날린 검에 창귀 한 놈의 목이 날아갔으나 이연의 몸도 동시에 휘청하였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이곳은 신의 영역이 아니었다.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경계를 넘은 후였다. 사투가 시작되었다. 이연의 등에 올라타려는 놈의 머리채를 잡아 범의 옆구리로 밀어붙여 겨우 검을 꽂아 넣었을 때였다. 창귀 떼의 소멸과 함께 인간들의 웅성임이 점점 가까워졌다. 인간들이 높이 들어 올린 횃불에 눈이 부시어 주춤주춤 뒷걸음질 칠 때였다. 누군가 제 몸을 답싹 잡아 끌어 어딘가로 떠밀리는 순간 익숙한 향기, 그리운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음? 네가 왜 여기에. 내가 지금 꿈을 꾸는가.’
창귀로부터 아음과 그의 이웃을 어떻게든 지켜내야만 한다고 생각하여서였을까. 그리하여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경계를 넘었다는 것을 인지하였기 때문인가. 그리는 마음이 차고 넘쳐 헛것을 보는 것인가 하였다.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 온기 가득한 입술이 맞닿는 순간, 이연은 생각하였다. 이미 자신의 세상 가장 깊은 곳에 아음이 자리 잡았노라고. 허나 따스한 입술과는 달리 냉담하기 그지없는 아음을 어찌해야 좋을지 이연은 도무지 알지 못하였다.
한나절 내내 경계 넘은 것을 타박하는 신주를 훠이훠이 물리고 난 이연은 아름드리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안으로 아음의 얼굴이 쑥 밀려들어왔다. 보고 싶었다, 오목조목 아리따운 눈과 코와 입술이, 곱게 땋아 내린 비단결 같은 새카만 머릿단이. 듣고 싶었다,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아음의 목소리가.
“이연!”
숨을 헐떡이며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이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음?”
화가 난 듯 씩씩대며 아음이 오르막을 오르고 있었다.
“은혜를 갚으려면 왕래가 있어야지. 왕래 없이 어찌 은혜를 갚으려고?”
이연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더는 참지 못하였다. 맞는 말이었다. 연을 끊고 무슨 연유로 은혜를 갚는단 말인가. 아음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저보다 현명하고 강단 센 여인이었다. 종주먹까지 들이대며 제법 씩씩하게 큰 소리를 쳤으나 끝내 눈물이 차오르고 마는 아음을 향해 이연은 두 팔을 벌렸다. 그 품으로 아음이 담뿍 안겨들었다.
이연 세상의 질서가 아음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