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돌에 가지런히 놓아둔 꽃신 위에도, 검은 기와 올린 담장 위에도, 한 시절 뽐내고 앙상해진 나뭇가지 위에도, 저 멀리 텅 빈 논밭 위에도 밤새 내린 눈이 소복이 덮여 있었다.
“아직도 눈발이 날리네.”
꽃신을 탁탁 털어 신은 아음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입김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털배자에 볼끼 달린 남바위 끈 야무지게 고쳐 매고 아음은 대문 밖을 나섰다. 사박사박 눈 밟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아음은 바지런히 걸음을 재촉하였다.
‘마실을 가려거든 눈 녹고 볕이라도 들거들랑 가셔요. 언 길에 자빠지시기라도 할까 저어됩니다.’
‘염려 말거라. 내 절대 아니 자빠진다. 조심히 다녀오마.’
걱정이 한 보따리인 내관을 만류하고 나온 참이니 오늘은 일찌감치 다녀올 요량이었다. 차가워진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이연의 숲 초입에 다다랐을 때였다. 눈앞에 펼쳐진 사방은 온통 새하얀데 유일하게 마른 땅이 시작되는 곳. 절로 웃음이 났다. 콧노래를 부르며 서두르던 아음의 걸음이 이내 멈칫하였다. 얼마쯤 떨어진 곳에 덩치 큰 사내 하나가 무릎을 꿇은 채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혼이라도 보고 싶소.’ 울음 사이로 끊어질 듯 힘겹게 내뱉는 소리에 아음은 그만 뭉클하였다.
‘저러다 몹쓸 마음이라도 먹으면 큰일일 터인데.’
섣불리 알은 체 할 일이 아닌지라 아음은 다시금 잰걸음으로 이연의 숲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연은 이른 아침부터 마음이 바빴다. 아무리 만류하여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아음 때문이었다. 해마다 입씨름을 하면서도 이연은 눈이 내린 날이면 아음의 등산이 고되지 않도록 쌓인 눈이 얼기 전 서둘러 바람을 일으켜 길을 따라 치워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남바위에 파묻힌 조막만한 얼굴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아음이 쓴 붉은 우산 위로 눈보라 일으키며 공중에 흩어졌던 눈발이 내려앉았다.
“이연!”
저러다 팔 빠질라. 번쩍 들어 올린 팔을 힘차게 흔들어대는 아음을 보며 이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날다람쥐처럼 날래게 다가온 아음이 이연의 손을 답삭 잡았다. 아니,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이연이 양손을 뒤로 물리며 한 발짝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 이연?”
“뭐 왜.”
저도 모르게 물러난 것이었으므로 이연도 적잖이 당황하였다. 뭐라 변명을 해야 하나.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아음의 발갛게 언 손을 잡아 제 옷자락으로 덮어 녹여준 것이 이연 자신이었다. 허니 그리 의미를 부여할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러하였다. 계집아이라서였다. 아이, 아이라서. 아니, 아이라서가 아니라 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지금 눈앞의 아음은 다르지 않은가. 아음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입술을 비죽이며 볼끼 속으로 손을 쏙 집어넣은 아음이 ‘앗, 차가워.’ 앓는 소리를 내었다. 언젠가부터 이연은 종종 막연한 표정이 되고는 하였다. 왜냐 물어도 답해주지 않으니 아음은 그 속내를 읽어낼 도리가 없었다.
“긴 겨울잠에 든 이 고요한 숲에서 여전히 분주한 건 너뿐이로구나.”
“다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돌아올 봄을 준비하는 거지. 동면도 봄을 깨우기 위한 그들의 본분인 거고.”
아음은 이연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눈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평온함을 담고 있었다.
“나도 봄이 깨어나면 할 일을 준비 중이란다.”
“무슨 준비?”
“지금은 비밀이야. 제법 중대한 일이라서.”
허, 이연은 속절없이 웃고 말았다. 제법 비장하게 입을 앙 다문 아음이 어여뻐서였다. 봄을 기다리는 아음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설레었다. 하루가 가는 만큼 고대하는 마음은 갑절로 커지고 있었다.
“헌데 이연. 혹시 저 아래서 누가 우는 소리 듣지 못하였어?”
“아니. 누가 울고 있는데?”
“사나흘 전엔가 아랫마을에 사달이 났단다. 해포 전 아내를 여읜 이가 하나 있었는데 사내의 어미가 49재를 지낸 후부터 먼저 간 며느리의 불효를 탓하며 아들을 닦달했대. 새 각시 들일 때 되었노라고. 헌데 이 사내가 아무리 시일이 흘러도 요지부동인 거야. 워낙 살아생전 금실이 좋았던지라 삼년상을 마치려나 보다 주변서 애써 위로를 했다는데, 입 가벼운 누군가 며느리가 임종 전 남편에게 한 말을 일러바쳤다지 뭐야.”
“뭐라고 유언을 남겼기에?”
“재혼하지 말라고. 먼 훗날 남편의 봉분 옆에 저 말고도 다른 여인의 봉분까지 나란히 있는 게 싫으니 혼자 지내다 오라고.”
“재밌네.”
말과는 달리 조금도 재미없다는 얼굴로 이연은 산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재밌는 것이 아니라 슬픈 거야. 살아서도 죽어서도 오직 둘, 서방과 각시 단 둘이서만 함께 하고픈 간절함이니까.”
“허면 사내는 그러마고 했나.”
“응. 그러마고 약조하였대. 그 사실을 안 사내의 어미는 자식 하나 낳지 못하고 죽은 주제에 남의 집 대까지 끊어 놓으려 한다고 노발대발이었고. 이미 죽은 며느리를 악담하다 못해 환생까지도 저주하였다나 봐.”
답답해진 아음이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악담과 저주는 너무 했지마는 사내도, 아내도, 그 어미도 그 딱한 사정이 다 이해가 되어서. 허면 사내는 어찌해야 하는 걸까. 아내와의 약조를 지켜야 하는 걸까, 패악질 부리고 몸져 누운 어미 말대로 재혼하여 대를 잇는 것으로 불효를 씻어야 하는 걸까.”
측은지심이 다시금 발동하는 모양이었다. 제가 해야만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닐 텐데도 아음은 꽤나 고심하고 있었다.
“너무 어려운 문제인가.”
“사내가 약조했다 하지 않았어? 한 번 맺은 짝과의 약조를 저버리지 않고 신념으로 지키면 될 터. 어려울 게 무어냐. 어미 원대로 처첩을 둔들, 그리하여 자식을 많이 둔들 그러한 이들은 다복하기보다 다툼이 더 잦을 터. 욕망을 버리고 연을 택하면 되는 게지.”
“산신이라 그러한가. 이연 너는 세상에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있기는 하니?”
어이없어 하면서도 겨울 공기처럼 개운한 웃음을 터뜨리는 아음의 웃음소리가 한적한 숲속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라. 나에게 있어 난제란 오로지 아음 너 하나뿐이다.’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마음, 결국 녹아 사라지는 눈과 함께 그리 되면 좋으련만. 설경이 어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