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 구신주!”
또랑또랑 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맑은 소리에 개울에서 주물주물 빨래를 하던 신주의 얼굴에도 담뿍 웃음이 걸리었다. 흐르던 땀마저 보송하게 말려주는 목소리의 주인은 아음이었다.
“삼복더위에 네가 고생이 많구나. 이리 다오. 나도 한 번 해 보자.”
말릴 새도 없이 우산은 접어 바위 위에 올려두고 옆에 와 쪼그려 앉은 아음의 모시옷자락이 금세 물에 젖었다.
“이러시면 절대 아니 됩니다, 아가씨. 이연 님 아시면 저 죽어요.”
“내가 좋아서, 해보고 싶어서 하겠다는데 이연이 왜? 이연도 저 하고 싶은 대로 뭐든 멋대로 다 하지 않니?”
‘이연 님은 산신이신 걸요.’라는 말은 뒤로 물리고 신주는 제 손의 것을 바투 잡았다.
“고운 옷 다 버리시고 손도 상하는 일이라 그럽니다.”
“겨우 이 잠깐에 손이 상한다고? 내 이 손으로 수년 간 활도 잡고 있지 않니?”
과년한 아기씨의 개구진 표정에 신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그예 신주의 손에 들린 붉은 옷을 빼앗아간 아음이 그것을 제법 야문 손으로 암팡지게 조물댔다.
“이참에 이연한테 내 손으로 빤 깨끗한 옷 한 번 입혀보고 싶어 그러는 것이니 더는 말리지 마라.”
암만, 더는 말릴 수가 없는 게지. 이연이나 아음이나 이네들의 고집을 꺾을 재량이 신주에게는 없었다. 제 덩치의 갑절이 되는 몸을 덮고도 남음이 있는 치렁한 옷을 이불보 털 듯 힘겨워하면서도 아음은 윤슬처럼 눈부셨다.
‘이연 님 보시면 남의 옷 헤지게 할 참이냐 빨래더미에 파묻혀 뵈지도 않겠노라 퉁을 놓으면서도 속편한 웃음을 웃으셨을 텐데. 그러곤 서풍을 일으켜 젖은 옷 말끔히 말려주시겠지.’
그 누구도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산신의 이름을 뉘 집 강아지 부르듯 하는 아음었지마는 신주는 이 자그만 여인의 존재가 퍽 기껍고도 귀하였다.
할 일을 끝내고 함께 오는 아음과 신주를 이연은 먼발치에서 내려다보았다. 무에 그리 흥에 겨운 것인지 폴짝대는 발걸음이라니. 저 온다던 때보다 두어 식경은 더 기다린 듯하여 퍽 밉살스럽기까지 하였다.
“자, 이연.”
우산을 곱게 접어 건네는 데도 여느 때와는 달리 불퉁한 이연이 아음은 의아하였다.
“이연한테 처음 봬주려고 아침나절에 지어온 옷 입자마자 부리나케 올라온 것인데 네 보기엔 어여쁘지 아니하냐. 나 도로 내려갈까.”
‘처음 봬주기는 무슨. 허면 저랑 같이 있던 신주는. 신주는 뭐 눈이 발바닥에 달려 저를 못 보나.’
불퉁거리는 마음을 내보이기 싫은 이연이 아무 말 없자 아음이 샐쭉한 표정을 풀고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았다.
“여름의 옷은 바람이 통하여 살갗에 와 닿으니 그 선선함이 퍽 좋아. 어때, 이연. 네가 보기에도 그러하냐.”
“옷이 날개라더니 뭐 제값은 하는 것 같네.”
“틀렸어, 이연.”
“뭐?”
“신주가 개울서 이연의 옷들이 안 그래도 수려한 너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게 아닐까 한다기에 나는 이연이 넝마를 걸쳐도 아름다울 것이라고 하였어. 그러니 너도 아음 네가 무엇을 입은들 아리땁지 않겠느냐고 해야지. 이연이 아음을 칭찬할 때는 그렇게 해야 하는 거야. 단서나 조건이 붙어서는 아니 돼. 알겠어, 이연?”
짐짓 앵돌아져 입술을 삐죽이며 목소리를 높이는 아음은 어여뻤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숲의 그 어떤 천연의 색보다 아리따웠다. 인간 나이로 치자면 시집갈 나이가 다 되었다던가, 이미 지났다던가. 인간 여인은 이 나이가 되면 다들 이리 어여뻐지는 것인가. 아음만 유난한 것인가. 자그마한 계집아이가 언제 이렇게 다 자라 햇살같이 빛나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돌아오는 복날엔 신주 먹을 닭, 딱 한 마리만 잡아다 줄 것이다. 너는 어림도 없으니 언감생심 신주한테 닭다리 받을 생각일랑 당최 하지 마라.”
헛웃음이 나왔다. 그깟 닭 한 마리로 협박과 생색이라니. 풀잎에 손가락이 베이는 수준의 것도 안 되는 말들이었지만 아음의 목소리는 숲의 향기를 머금은 듯 청량하였다.
“계속해.”
“뭘?”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계속하라고.”
“난 여름이 좋다. 여름은 낮이 길어 이연 너와 이곳서 지낼 시간이 더 여유로우니까. 또 뭐가 좋으냐면, 음, 집 앞의 평지도 좋지만은 오르막이 시작되는 길은 더 좋다. 이연을 만나러 가는구나. 발걸음이 더 가벼워져.”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분명한 아음. 호불호의 감정을 숨김없이 가감 없이 털어놓는 아음.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는 이연에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누군가에게 내어 보인 적 없는 이연에게 아음은 모든 처음 감정의 원천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그 기다림에 안달이 난다는 것.
사람에게 이름이 불린다는 것, 그 이름에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
하루가 눈 깜짝할 새 지난다는 것, 그리하여 더디 흐르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다는 것.
여름날 숲의 왁자한 소리가 하나도 귀에 박혀들지 않았다. 숲은 아음의 소리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