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맞닿아 있는 곳, 이 땅은 모든 산줄기의 근원이자 강줄기의 근원이라 하였다. 아음은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고 젖은 머리카락 한 올을 단정히 하였다.
‘듣던 대로구나. 산천초목이 푸른빛을 눈부시게 뿜어내는 곳. 이곳은 어찌 이리도 풍요롭단 말이냐.’
세상과 단절된 듯 오색찬란한 풍경에 아음은 가득 차오르려는 서러운 마음을 다독이고 이내 아름드리나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백두대간의 주인이시여. 하해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이 땅의 민심을 돌보소서. 타오르는 뙤약볕 아래 김을 매는 이들의 탄식을 들어주소서. 강줄기의 근원이시여. 가물어 갈라져 가는 땅에 물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비를 내리어 주소서.’
사특한 것이 아비의 몸을 차지하고 앉은 후로 종묘사직이 뿌리 뽑힌 나라. 비록 버려졌으나 이 나라 국왕의 딸로서 아음은 백성의 절규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절박한 마음으로 아음은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기우제를 지내었던가. 나무 뒤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리어 돌아가 들여다본 곳에 내관이 조심하라 신신당부하던 그것, 천년 묵은 여우가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어린 것이라 비웃으며 겁을 주어 쫓아내려 여우가 벼락을 내리는 순간 아음은 알 수 있었다.
‘이 구미호가 백두대간의 주인이로구나.’
아음은 어찌하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까 골똘하였다. 비를 내려주십사 무릎을 꿇고 애걸하여 볼까 하였으나 어떤 성품을 가진 자인지 시험해 보고 싶기도 하였다. 하여 떨리는 마음을 천진한 웃음 뒤에 감추고 호기롭게 말을 건네었다.
“내 부하가 되어라. 호의호식할 수 있게 해주마.”
이제껏 경박하고 추레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인간들만 보아왔던 산신은 적잖이 당황하여 잠시간 말을 잊고야 말았다. 삽살개 취급도 모자라 감히 산신에게 부하라니. 천 년을 살면서 이렇게 당돌한 인간은 듣도 보도 못하였다. 게다가 이렇게 작디작은 계집아이 주제에. 실소가 터졌다. 산신은 세상물정 모르는 계집아이의 머리통을 쥐어박아 산 아래로 내어몰았다. 그렇게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헌데 울며 산을 내려갔던 이 계집아이가 얼마 지나지 않아 활을 들고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산신을 상대로 활시위를 당기는 것도 기가 찬데 지치지도 않는지 하루를 거르지 않고 찾아와 비를 내려달라 닦달하였다.
‘비를 내려 주면 너 또한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있겠느냐. 은혜도 모르는 머리 검은 짐승의 소원 따위 바람에 흩날리는 풀씨보다도 가벼운 것을.’
제 아무리 눈물콧물 쏟아내며 목 놓아 조아려봤자 순간뿐인 것을. 세상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 인심임을 산신은 모르지 않았다. 헌데 이 계집아이의 이 극성맞은 당당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쉬운 마음에 빌고 또 비는 자는 자고로 비루함 그 자체여야 하지 않느냐 말이다. 무섭게 으름장을 놓아도 소용이 없었다. 외려 눈길 한 번 피하는 법 없이 한시도 지지 않고 따박따박 대꾸하는 계집아이에게 산신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네 자신을 위함이 아닌 것쯤은 내 진즉 알고 있다. 너의 그 비단옷, 또한 내게 호의호식을 제안한 것만 보아도 네 집 곡식 창고가 비는 날 따윈 없을 터인데 무엇 때문이냐. 그 작은 발로 이 험한 산을 쉴 새 없이 오르는 그 지극정성은 무엇을 위함이냐.”
“본디 인간은 홀로 살 수 없고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의지하며 사는 존재이니 맹자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측은지심이 없는 자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으랴. 하여 자연 만물을 어진 마음으로 다스리는 너에게 나의 어진 마음 또한 통하기를 기대하고 또 기대하였을 뿐이다.”
한여름 불볕더위를 식혀주고 오곡백과 해갈하여 무르익게 하는 단비가 전국 방방곡곡 온 고을마다 온 논밭마다 골고루 내리었다.
산신은 행복에 겨워 뛰놀 계집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그리어져 설풋 웃음이 났다. 비에 흠뻑 젖어 고뿔에 들면 아니 될 텐데 낯선 조바심이 들기도 하였다.
‘원하는 바를 얻었으니 이제 너도 더는 이곳에 오르지 아니 하겠지. 어린 것이 험한 산 오르기가 여간 어렵지 아니 하였을 테니 퍽 다행한 일이다.’
빗줄기 속으로 헛헛한 웃음이 섞여들던 그때 산신의 머리 위로 붉은빛이 드리워졌다.
“이연! 비 오는데 뭐 하고 있어. 옷이 다 젖어버렸잖아.”
걱정근심의 짐이 모두 거두어진 맑은 눈동자, 그 해사한 웃음이 산신의 붉은 옷에 맺힌 물방울처럼 이연의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비를 내려준 은혜에 대한 보답이야.”
“도롱이는 보았어도 이렇게 생긴 것은 처음 보는데. 궁중 사는 이들이 해를 가린다고 쓰던 것과 비슷한 것이냐.”
“도롱이는 입고 벗기가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라서. 이연 네 생각하면서 만들어 온 것이니 털 상하지 않게 잘 쓰고 다녀라. 비를 내려준 은혜에 비하면 더없이 하찮겠지만.”
여전히 당돌하고 여전히 목청 큰 아음에게 이연은 비로소 웃어보였다. 결코 하찮을 리 없었다. 이토록 귀한 답례품은 난생 처음이었다.
‘너는 나를 잊지 아니하였구나. 바라는 것을 얻어내고도 나를 찾아와 주었어.’
“이걸 나에게 주고 나면 너는 이 비를 맞고 내려가겠다는 것이냐. 다 젖어 고뿔이라도 들면 어찌하려고.”
이연의 물음에 아음은 깜찍하게 웃어보였다.
“그럼 다시 가져갔다가 맑은 날 내 잊지 않고 들고 올 테니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알겠지?”
이연은 생각하였다. 비가 오는 날에는 비를 가리어야 해서, 해가 쨍쨍한 날에는 햇빛을 가리어야 해서, 매번 그렇게 아음의 손에 우산을 들려 보내야겠다고. 그러면 아음은 이 우산을 돌려주어야 해서 다음날 또 다음날 이 산을 오를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