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처음은 화실 다녀오던 길이었던 것 같아. 어디서 작은 종소리 같은 게 들렸어.
올려다봤더니 육교 위에 네가 있었어. 아마 네 키링 소리였나 봐.
궁금했어. 그 위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그 후로도 동네에서 우연히 널 몇 번 더 봤어.
궁금해졌어. 뭘 그렇게 맨날 보고 다니길래 자꾸 물벼락을 맞는 건지.
신발은 대체 왜 짝짝이로 신고 다니는 건지.
어깨에 그 물음표 안마기는 또 뭔지.
어디 사는지, 학교는 어딘지, 이름은 뭔지, 궁금한 게 많아졌던 것 같아.
혹시 또 만나지지 않을까. 우연히 또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상하게 자꾸 네가 기다려졌어.
너랑 친해지고 싶었어,
그러다 그렇게 궁금했던 니 이름을 알게 됐어.
수미, 노수미.
이름만 안 것만 해도 엄청 기뻤던 것 같아.
바보같이 그게 니 진짜 이름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고.
그림 주면서 친구가 되자고 할 생각이었어.
언제든 만나면 주려고 매일 그 그림 갖고 다녔었어.
그러다 진짜 널 다시 만났어.
그 날, 버스에서
널 잡았어.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리라고.
근데 니 친구가 탔고, 갑자기 부끄러워졌어.
그래서 도망치듯 내려버렸어. 바보같이.
그렇게 주고 싶던 그림도 못 주고.
내릴 때 딸려왔는지 화구 통에 니 키링이 달려있었어.
다시 용기 내고 싶어졌어.
이거 돌려주면서 친구가 되자고, 친해지고 싶다고 꼭 말하려고
다시 널 쫓아서 달려갔어.
그런데 사고가 났어.
바로 내 눈앞에서,
내가 널 붙잡는 바람에 니가 타고있던 그 버스가.
너무 미안했고, 너무 슬펐고, 너무 마음이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도망쳐버렸어. 비겁하게.
근데 갑자기 내 방에 어떤 여자가 나타났어.
죽은 줄 알았던 니가 그렇게 내 앞에 다시 나타났어.
13년 만에.
너무 늦게 알았지만 고마웠어.
살아줘서.
근데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아.
니 인생 송두리째 망가뜨린 사람.. 나야.
감히 니 옆에 있을 자격 없다고 생각했어.
미안해. 나쁜 꿈 꾸게 해서.
미안해. 니 인생 망가뜨려서.
나만 아니었으면 13년이란 시간 뺏기지도,
바이올린 못 하게 되지도,
외삼촌, 외숙모도, 그렇게 소중한 집도,
다 잃어버렸을 일 없었을 텐데.
니 열어덟, 니 스물 뺏어간 사람
니 나이 낯설고 어렵게 만든 사람
니 인생 송두리째 망가뜨린 사람..나야
미안해. 좋아해서.
미안해. 친해지고 싶어 해서.
미안해. 니 시간 뺏어버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