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연인이다, 조정석
시대의 희극지왕, 생활 연기의 달인. 언론에서 소개한 조정석의 수식어다. 다소 안일하지만 조정석 배우에게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이 수식어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퀴즈를 낸다고 해도 대부분 세 번 안에 그의 이름을 댈 것이다. <보그> 촬영 스튜디오에 들어선 현실의 조정석도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유쾌한 이익준 선생이나 벌써 12년 전 캐릭터 ‘납뜩이’가 떠오른다. 부산스럽기보다는 친절하고 밝으며 뭔가 단단한 기운을 가진 사람.
조정석은 대중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 중 하나인 코미디물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 <파일럿>은 스타 파일럿(조정석)이 갑자기 해고되면서 여장을 해 재취업하는 소동을 다룬다. ‘코미디의 정석이 이륙합니다’라는 영화 캐치프레이즈가 말해주듯 조정석이 전면에 드러난다. 제작 발표회 역시 로빈 윌리엄스가 여장을 하고 연기한 추억의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를 언급하며 조정석의 변신에 초점을 맞췄다. 조정석은 게스트나 <헤드윅> 공연 등을 통해 파격 분장에선 다년간의 경험을 축적해왔다. 그렇기에 외모뿐 아니라 연기력을 바탕으로 뼛속까지 여장 코미디를 완성할 것이다. <파일럿>을 연출한 김한결 감독도 “그의 변신과 유머는 외면뿐 아니라 내면도 반영되었죠”라고 말했다. 조정석은 자연스러움이 여장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정미라는 캐릭터의 내외면이 설득력이 있어야 관객이 받아들이죠. 얼굴에 테이프를 수십 번이고 붙였다 떼면서 어느 정도 선까지 가야 과하지 않을지 스태프들과 많이 고민했어요. 목소리 톤도 가식적인 하이 톤이 아니라 어떤 음역대에서 소리를 낼지 연구했습니다.” 그의 여장은 단순히 웃기려는 장치가 아니라 이야기의 설득력을 위한 매체다.
그는 <파일럿> 시나리오를 받고 사흘 만에 출연을 약속했다. 연락까지 그렇게 걸린 것이지 실은 하루 만에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스포일러라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영화의 주제도 굉장히 좋았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잘못을 저지른 친구가 어떻게든 재취업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흥미로웠어요. 무엇보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미잖아요. 슬픈 드라마를 보면 너무 슬프고, 스릴러를 보면 소름 끼치게 빠져들고, 모두 재미의 범주에 들어가죠. 그런 재미를 이 작품에서 발견했어요.”
속전속결은 자기 확신을 바탕으로 한다. 그는 자신의 감과 안목을 어느 정도 신뢰할까. “내 마음이 동해야 움직이는 것은 분명합니다. 남이 이 작품 잘될 것 같다고 권해도 소용없죠. 일단 하기로 마음먹으면 전적으로 내 선택을 믿고 작품에 몰두해요. 결과가 성공이든 실패든 받아들입니다. 거절한 작품이 크게 흥행해도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만약 선택이 미흡했던 거라면 ‘다음에는 좀 더 현명해져야지’ 하며 나를 쇄신할 따름이죠.”
이런 태도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조금씩 형성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누구나 그렇지만 자라면서 느끼고 깨달은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죠.” 그는 남들보다 철이 조금 빨리 들었다고 했는데, 그 연유를 묻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흘리듯이 지난 일을 언급했다. 그는 20대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와 조카도 떠나보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그 자체로도 컸고, 제게 무언가를 남겼습니다. 확신과 믿음을 바탕으로 선택을 하고, 실패를 배움의 과정이라고 여기는 것도 그중 하나죠.”
이번 작품 또한 선택했으니 전적으로 밀고 나갔다. 가장 염두에 둔 부분은 ‘톤 앤 매너’다. “어떤 작품이든 톤 앤 매너를 가장 신경 써요. 이 영화가 지닌 색채랄까요. 감독님과 스태프들이 오랜 고심 끝에 결정하는데, 당연히 배우도 이를 체득하고 연기해야 합니다. <파일럿>의 톤 앤 매너는 단순히 우스꽝스러운 코미디가 아니라는 것이 포인트죠.”
김한결 감독이 꼽은 명장면도 극 중 정우가 죄책감과 해방감, 위트, 간절함으로 도심을 달리는 장면이다. 살면서도 그저 웃기기만 하고 슬프기만 한 상황보다는 ‘웃프’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만나기 마련이다. 조정석은 복합적인 감정을 연기하는 방법으로 ‘머리는 키우되 연기할 때는 단순하게’를 강조한다. “텍스트에 표현된 캐릭터는 안에 잘 담아두고 머리는 계속 키웁니다. 이 인물의 전사는 어땠을지 확장해 가늠하고 연기할 때는 하나의 감정으로 임해요. 내가 키운 전사가 자연스럽게 감정에 담길 거라 여깁니다. 연기할 때 이런저런 감정을 복합적으로 표현하려다 보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되죠.”
또한 연기할 때 여러 가능성을 열어둔다. “상황마다 1%의 가능성을 떠올리죠. 예를 들어 사람이 슬픈데 웃을 수 있지 않나, 왜 계속 눈물을 흘려야 하지, 자문하죠. 배역을 준비할 때면 틀을 벗어나 확장하려고 노력해요.”
그에게 생활 연기의 달인이란 수식어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대체 생활 연기란 무엇일까요?” 우린 서로 고심하다가 조정석이 대답했다. “자연스럽다가 핵심 아닐까요?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사람을 만나면 불편하잖아요.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이 연기에 묻어나면 그것을 생활 연기라고 불러주지 않나 싶어요.”
‘자연스럽다’. 조정석과 대화하면 빈번히 나오는 단어다. 그에게 유쾌한 이미지를 뒤엎을 강력한 캐릭터를 만나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도 “왜 없겠어요. 배우는 자신의 다른 면을 끌어내는 새로운 작품을 늘 기다리지만, 갈급해하지 않으려고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조정석다워요”라고 답한다.
조정석은 이 길로 들어선 것도 “자연스러웠다”고 말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함께한 신원호 감독은 조정석을 두고 “일반인을 지향하지만 어쩔 수 없는 끼 때문에 이 직업에 임하지 않을 수 없는 배우”라고 표현한 적 있다. 조정석의 표현에 따르면 ‘기타 치는 삼수생’이었던 그는 교회에서 열린 문화의 밤을 통해 놀이처럼 연기를 해봤고, 1년 후 한 번 더 해보라는 권유가 있었고, 그렇게 대학 연극과까지 입학했다. 입학식 날 정문에 서서 ‘유명한 연기자가 되겠다’가 아니라 ‘공부할 곳이 생겼으니 제대로 해보자’가 다였다. 한마디로 대학 생활에 집중하자였는데, 자연스럽게 오디션 기회가 주어지고 뮤지컬로 데뷔하고, 공연하면서 돈을 버니 더 열심히 했고 지금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자연스럽게 흘러왔을지언정 매 순간 치열하고 열정적이었다는 것. “스스로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기는데 다들 끼가 많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해요. 자연스럽게 이 분야에 온 것도 내 안의 끼 때문일 수 있죠. 어쨌든 제가 순간순간 열심히 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지난 6월에는 <헤드윅>의 다섯 번째 시즌을 마쳤다. 2006년 만 25세의 조정석이 처음 헤드윅으로 무대에 섰을 때, 40대가 돼서 이 배역을 다시 연기하고 싶었다. “20대의 헤드윅이 재기 발랄하고 ‘땐땐한’ 목소리라면, 얼마 전에 40대의 내가 한 헤드윅은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지만 뭔가 농익으면서도 연륜이 담겼죠. 분명 익숙하지만 새로웠어요.” 그가 어릴 적부터 빨리 나이를 먹고 싶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이 길에 들어섰지만 정말 치열하게 임해왔거든요. 그만큼 이 분야에 대한 열정이 컸기에, 얼른 세월이 흘러 경험치를 쌓고, 그것이 연기에 담기길 바랐죠. 그런데 시간은 정말 빠르더군요.(웃음)”
https://www.vogue.co.kr/2024/07/20/%ec%a1%b0%ec%a0%95%ec%84%9d-%ec%9d%b4%ec%a3%bc%eb%aa%85-%ed%95%9c%ec%84%a0%ed%99%94-%ec%8b%a0%ec%8a%b9%ed%98%b8%ec%9d%98-%ec%a7%84%ec%a7%9c-%ec%bd%94%eb%af%b8%eb%94%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