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년 전 팬분들께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연기했던 캐릭터 중 여운이 가장 많이 남는 인물은 누구인가요?”
많은 분이 ‘웨이위타이(魏宇泰)-흑색등탑’을 꼽아주셨죠. 그의 안하무인하고 독설을 내뱉으면서도 때로는 미친 듯한 그 느낌을 좋아해 주셨습니다. 그 기억이 마음 한구석에 늘 미련처럼, 하나의 염원으로 남아 있었어요.
그러다 묘적수,우여령 감독님을 만나 페이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가슴 속 그 염원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면접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번에는 어쩌면 함께할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어요. 서로 끌리는 지점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때만 해도 감독님이 절 선택해 주실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전 묘적수 감독님의 작품을 봐왔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독특한 방식과 감정, 디테일을 잡아내는 감각을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인물을 정말 아름답게 담아내 주시는 분이죠. 사실 그때 사심도 조금 있었어요. ‘꽃이 다 지기 전에, 가장 아름다운 나의 모습을 다시 한번 기록해두자’ 하는 마음이었죠. 하하하. 그렇게 마음속이 담아두었던 염원과 감독님을 향한 설렘을 안고, 저는 페이전과 만났습니다.
창작의 과정은 늘 고되었습니다. 수차례의 분장 테스트와 의상 피팅을 거치며 우리는 페이전이 어떤 모습일지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쓰리피스, 포피스 수트, 반지, 안경... 소품들이 하나둘 몸에 갖춰지면서 마침내 우리는 페이전의 첫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상대가 묘적수 감독님이었기에, 이번에 저는 저 자신을 완전히 깨뜨리기로 했습니다. 예전의 경험들은 잊고 온전히 저를 감독님께 맡겼죠. 페이전의 캐릭터 설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는데-그의 출신, 가정사, 성격, 그리고 극 중 모든 인물과의 관계 설정까지-우여령감독님을 비롯한 작가님들과 함께 수차례 토론하며 가장 정확하고도 극적인 표현 방식을 찾아 나갔습니다.
이 인물을 창조하며 저는 그의 기저에 흐르는 색감을 '회색'으로 잡고 싶었습니다. 흑과 백으로 나눌 수 없는, 살아있는 입체적인 사람으로 보여지길 원했죠. 그의 성격은 가족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잔혹함과 돌아가신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죠. 평생 비교당하며 단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채, 억눌린 교육 환경에서 자라난 재벌2세로써의 그의 삶은 단조롭고 억압적이며 질식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는 검은색에 가까운 회색이었죠.
그러다 후슈를 만납니다. 후슈는 진실하고 솔직하며, 독립적이고 영리합니다. 겉은 부드럽지만 내면은 강인한 여성이죠. 그녀는 페이전의 속마음을 가감 없이 꿰뚫어 보며 말합니다. "생각이 지반보다 중요하다"라고요. 사람은 변할 수 있고, 중요한 건 변하고자 하는 의지라는 걸 알려준 거죠. 그녀의 존재는 태양 같아서, 회색이던 그를 점점 흰색으로 물들였습니다. 그녀와 함께할 때마다 그는 자신에게도 조금씩 온기가 스며드는 걸 느꼈죠. 하지만 그녀를 너무나 간절히 붙잡고 싶었던 나머지, 후반부에 그는 극단으로 치달으며 다시 검은색으로 변해갑니다.
후반부의 페이전을 만들어나가면서 저는 그가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마지막에 반창고를 버리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는, 페이전은 자신을 둘러싼 외부의 것들은 내려놓았지만 후슈는 (반창고라는 흔적으로) 영원히 그의 마음속에 남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가질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잊지 않는 것이니까요. 이로써 그는 회색에서 다시 흰색으로 나아갈 준비를 시작하게 됩니다.
크랭크업 때 묘적수 감독님이 문자를 보내셨던 게 기억나네요. 페이전이 떠난 뒤의 모습을 짧은 영상으로 직접 찍어볼 수 있겠냐고 물으셨죠. 한참을 고민했지만, 어떤 후일담이 그를 행복하게 하고 빠르게 치유해 줄 수 있을지 끝내 답을 찾지 못해 결국 찍지 못했습니다...
페이전을 아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보내주신 비판과 격려도 모두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제가 설정한 세세한 디테일들을 시청자분들께서는 전부 알아봐주셨습니다. 배우로서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거예요.
팬분들의 기다림, 감독님과 제작자님의 기대, 그리고 모든 스태프의 노고가 담겨 페이전이라는 인물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가 우리 앞에서서 그에게 준 사랑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있으니 서로의 마음이 맞닿은 기분입니다.
작품을 위해 애써주신 모든 제작진과 동료 배우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는 본래 정해진 모습이 없으나 또한 만 가지 모습이니,
내가 어떤 모습인지는 너의 마음에 달려 있다
(我本无相,亦有万相,我是何相,取决于你)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https://video.weibo.com/show?fid=1034:5258961797185576
공작실에서 올려준 제작 비하인드 같은데 같이보면 좋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