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마지막이란 생각을 해서 그런지 아침부터 심장이 왈랑거려서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서서 오래 걸었어
청계천을 돌아 광화문 (경후재단 배경인) 옛 금호빌딩을 지나 돌담길을 걷다 덕수궁에 들러 조용히 한참을 앉아 있었어
수많은 연인들이 이 길을 걷고 이 곳에 들렀다가 누군가는 결국 헤어지고 또 다시 만나고 했겠지
멍하니 건물 앞 돌에 걸터앉아 지나가는 연인들을 바라보며 생각했어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을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은 살아온 시간이나 성정이나 다른 여러가지 이유로 각각 사랑의 방식이 다 다르다고 해
누군가는 사랑의 말을 들을 때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고
누군가는 사랑의 스킨십을 통해서, 또 다른 경우에는 감정적인 지원을 통해,
어떤 경우에는 작은 선물이라도 물질적인 지원을 받을 때 사랑받는다고 느낀다고 해
그리고 자신이 사랑을 느끼는 방식대로 상대방에게 사랑을 표현하는게 자연스러운 거고.
그래서 처음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랑의 방식 때문에
자신의 표현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걸까 좌절하기도 하고
상대의 표현을 이해하지 못해서 불만족 하기도 하는 거래.
서로의 사랑의 방식을 이해해가고 상대가 원하는 언어로 표현하는 법을 배워가는 게
서로 맞춰가는 시간, 그러니까 좋아해 에서 사랑해 로 가는 과정이 아닐까.
송아가 사랑을 하는 방식은 자신이 29년 동안 받아온 사랑과 비슷해
정서적인 지지.
상대방과 함께 견디는 것.
가족들에게 뿐만 아니라 동윤과 민성이 송아에게 보여준 우정과 사랑의 방식은
송아의 선택을 믿고 감정적으로 지지하는 거였어
송아도 그런 관계를 맺은 가까운 상대에게 지금까지 그런 애정의 표현을 해왔고.
그러니까 송아는 상대방에 대한 감정적인 지지가 무너지기 전에
상대를 미워해버리기 전에
상대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이 마음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야.
그게 송아의 사랑의 방식.
송아는 스스로의 우산을 펴거나, 누군가와 우산을 함께 쓸 수 있는 사람이지.
무슨 그림심리검사에서 보면 비내리는 날 우산도 없이 고스란히 맞고 있는 그림은
스트레스에 대해 스스로를 지킬 수단이 없다는 뜻이라던데
준영이를 보면 그 해석이 딱인 것 같아.
준영이는 자기를 지키는 법을 몰라.
말을 다 해버리면 적어도 스스로는 지킬 수 있지 않냐 던 송아의 말은 사실 준영이한테 필요한 것 같아.
그러니까 준영이의 사랑, 이라는 건 자기야 어찌되든 간에 상대방이 평온하길 바라는 거.
이게 무슨 태평성대에는 임금님이 누군지도 모른다,는 옛 말도 아니고 말야
준영이가 사랑해온 방식은 자신이 기억되지 않는 것에 가까운 것 같아
모두가 평온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도 평온하겠거니 생각하는 것.
자기을 제외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한 것.
지독한 짝사랑 그 자체.
그러니 준영이는 지금까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이었을거야.
아무도 지금까지 준영이의 그런 노력을 알아주지도 않았을 거고
준영이는 알아주지 않아도 다만 다들 평온한 것만으로 만족했겠지.
세계를 지키기 위해 정작 자기 자신을 지키는 법은 잃어버린 남자.
그에게 아무도 송아처럼 말하지 않았을 거야.
너의 그 평온하려는, 지우려는 노력이 날 오히려 걱정시키고 힘들게 한다고.
서로 이렇게 다른 사람인 걸 처음엔 몰랐을 거야
아니 비슷한 듯 달랐기 때문에 서로 더 끌렸을 수도 있어
누구나 평온하길 바라는 준영이의 태도 뒤에
그렇기 때문에 자기자신은 앞세우지 않는다는 걸
그게 결국 자기 문제는 스스로 끌어안고 간다는 의미가 숨어있다는 걸
송아는 그때 몰랐을 거니까.
자신의 노력과 꿈을 솔직하게 말하는 송아는
결국 상대에게도 자신만큼이나 솔직해지길 바란다는 걸
그게 좋은 모습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라는 걸
준영이는 지금까지 경험상 알 수 없었을 거고.
준영이와 송아의 이별도 어쩌면 필연적이었을 수 있겠다 싶어.
지금까지 살아온 29년의 세월이,
그 견고해진 세계와 세계가 만나 하나로 되어가는 과정에서
한번은 충돌이 일어나야 했던 것 같아.
둘은 사실 너무 비슷한 성정을 가졌지만 너무 다른 사랑의 언어를 말하니까
게다가 만난지 지금 100일이나 된건가...?
당연히 싸울 때다, 생각하게 되는 건 너무 하이퍼리얼리즘인가.
하지만 이별의 순간에도 조금은 희망을 품었던 건
둘 다 서로의 사랑의 방식을 변명하거나 비난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게 다 무엇인지 알지 못해도, 비록 상대의 방식에 상처받았다는 걸 고백하더라도
그걸 상대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적어도 그것만으로도 둘은 서로의 "진심" 자체는 의심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둘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어
그저 사랑의 방식이 달랐을 뿐.
그렇다면 상대의 사랑의 언어를 배우고
그 언어를 하나로 맞춰가면서, 마치 A를 맞추듯이,
더 완전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의식의 흐름대로 썼더니 되게 말이 길어졌네....
아니 그냥 긴 이야기를 요약하면,
내일이면 또 이 모든 생각이 소용없어지겠지만.
29년을 살아온 방식을 바꾼다는 건 예고속 둘의 모습 만큼이나 그렇게나 힘든 일이지만
행복해지길 바래 준영이와 송아가. 그것 뿐이야 바라는 건.
그리고 준영이가, 어딘가 "속한" 사람이 되길.
청계천을 돌아 광화문 (경후재단 배경인) 옛 금호빌딩을 지나 돌담길을 걷다 덕수궁에 들러 조용히 한참을 앉아 있었어
수많은 연인들이 이 길을 걷고 이 곳에 들렀다가 누군가는 결국 헤어지고 또 다시 만나고 했겠지
멍하니 건물 앞 돌에 걸터앉아 지나가는 연인들을 바라보며 생각했어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을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은 살아온 시간이나 성정이나 다른 여러가지 이유로 각각 사랑의 방식이 다 다르다고 해
누군가는 사랑의 말을 들을 때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고
누군가는 사랑의 스킨십을 통해서, 또 다른 경우에는 감정적인 지원을 통해,
어떤 경우에는 작은 선물이라도 물질적인 지원을 받을 때 사랑받는다고 느낀다고 해
그리고 자신이 사랑을 느끼는 방식대로 상대방에게 사랑을 표현하는게 자연스러운 거고.
그래서 처음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랑의 방식 때문에
자신의 표현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걸까 좌절하기도 하고
상대의 표현을 이해하지 못해서 불만족 하기도 하는 거래.
서로의 사랑의 방식을 이해해가고 상대가 원하는 언어로 표현하는 법을 배워가는 게
서로 맞춰가는 시간, 그러니까 좋아해 에서 사랑해 로 가는 과정이 아닐까.
송아가 사랑을 하는 방식은 자신이 29년 동안 받아온 사랑과 비슷해
정서적인 지지.
상대방과 함께 견디는 것.
가족들에게 뿐만 아니라 동윤과 민성이 송아에게 보여준 우정과 사랑의 방식은
송아의 선택을 믿고 감정적으로 지지하는 거였어
송아도 그런 관계를 맺은 가까운 상대에게 지금까지 그런 애정의 표현을 해왔고.
그러니까 송아는 상대방에 대한 감정적인 지지가 무너지기 전에
상대를 미워해버리기 전에
상대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이 마음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야.
그게 송아의 사랑의 방식.
송아는 스스로의 우산을 펴거나, 누군가와 우산을 함께 쓸 수 있는 사람이지.
무슨 그림심리검사에서 보면 비내리는 날 우산도 없이 고스란히 맞고 있는 그림은
스트레스에 대해 스스로를 지킬 수단이 없다는 뜻이라던데
준영이를 보면 그 해석이 딱인 것 같아.
준영이는 자기를 지키는 법을 몰라.
말을 다 해버리면 적어도 스스로는 지킬 수 있지 않냐 던 송아의 말은 사실 준영이한테 필요한 것 같아.
그러니까 준영이의 사랑, 이라는 건 자기야 어찌되든 간에 상대방이 평온하길 바라는 거.
이게 무슨 태평성대에는 임금님이 누군지도 모른다,는 옛 말도 아니고 말야
준영이가 사랑해온 방식은 자신이 기억되지 않는 것에 가까운 것 같아
모두가 평온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도 평온하겠거니 생각하는 것.
자기을 제외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한 것.
지독한 짝사랑 그 자체.
그러니 준영이는 지금까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이었을거야.
아무도 지금까지 준영이의 그런 노력을 알아주지도 않았을 거고
준영이는 알아주지 않아도 다만 다들 평온한 것만으로 만족했겠지.
세계를 지키기 위해 정작 자기 자신을 지키는 법은 잃어버린 남자.
그에게 아무도 송아처럼 말하지 않았을 거야.
너의 그 평온하려는, 지우려는 노력이 날 오히려 걱정시키고 힘들게 한다고.
서로 이렇게 다른 사람인 걸 처음엔 몰랐을 거야
아니 비슷한 듯 달랐기 때문에 서로 더 끌렸을 수도 있어
누구나 평온하길 바라는 준영이의 태도 뒤에
그렇기 때문에 자기자신은 앞세우지 않는다는 걸
그게 결국 자기 문제는 스스로 끌어안고 간다는 의미가 숨어있다는 걸
송아는 그때 몰랐을 거니까.
자신의 노력과 꿈을 솔직하게 말하는 송아는
결국 상대에게도 자신만큼이나 솔직해지길 바란다는 걸
그게 좋은 모습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라는 걸
준영이는 지금까지 경험상 알 수 없었을 거고.
준영이와 송아의 이별도 어쩌면 필연적이었을 수 있겠다 싶어.
지금까지 살아온 29년의 세월이,
그 견고해진 세계와 세계가 만나 하나로 되어가는 과정에서
한번은 충돌이 일어나야 했던 것 같아.
둘은 사실 너무 비슷한 성정을 가졌지만 너무 다른 사랑의 언어를 말하니까
게다가 만난지 지금 100일이나 된건가...?
당연히 싸울 때다, 생각하게 되는 건 너무 하이퍼리얼리즘인가.
하지만 이별의 순간에도 조금은 희망을 품었던 건
둘 다 서로의 사랑의 방식을 변명하거나 비난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게 다 무엇인지 알지 못해도, 비록 상대의 방식에 상처받았다는 걸 고백하더라도
그걸 상대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적어도 그것만으로도 둘은 서로의 "진심" 자체는 의심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둘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어
그저 사랑의 방식이 달랐을 뿐.
그렇다면 상대의 사랑의 언어를 배우고
그 언어를 하나로 맞춰가면서, 마치 A를 맞추듯이,
더 완전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의식의 흐름대로 썼더니 되게 말이 길어졌네....
아니 그냥 긴 이야기를 요약하면,
내일이면 또 이 모든 생각이 소용없어지겠지만.
29년을 살아온 방식을 바꾼다는 건 예고속 둘의 모습 만큼이나 그렇게나 힘든 일이지만
행복해지길 바래 준영이와 송아가. 그것 뿐이야 바라는 건.
그리고 준영이가, 어딘가 "속한" 사람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