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여행 가방'에 넣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왜 버리지 못하는가?를 먼저 짚어보려해. 핸드폰, 악보, 손수건은 모두 준영이에게 정경이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이긴 하지만 사실 정경이'만' 떠오르는 물건은 저 중 하나도 없고, 없어졌어. 오늘 준영이는 핸드폰 속 사진을 보면서 현호를 떠올렸고, 악보-나 피아노-를 보면서는 정경이의 불행이자 자신의 행운이 된 정경선의 죽음과 이사장님을 함께 떠올려 왔어. 손수건은 유일하게 정경이만 떠오르게 하는 물건이었지만 이제 준영이는 손수건을 신경 쓰는 송아를 떠올리고 있어. 결국 준영이에게 저 물건들이 의미하는 건 정경이가 아닌 자신이 지나온 삶이라 생각해.
물론 저 물건이 무엇을 상징하든, 아니든, 별 의미가 있든, 없든 정리하기 어렵긴 매한가지일 거야. 준영이는 욕심도 없고 갖고 싶은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이미 자신의 것이라 인식한 것들을 버려 버리긴 어려운 게 당연하니까. 그런 물건이 몇 없을 준영이라 더욱 버리기 어려울 수도 있고. 갖고 있을 필요는 없지만 버리자니 뚜렷한 이유도 없이 마음에 걸려서 결국 어느 상자에 가둬두는 물건들은 누구에게나 있잖아. 하물며 저 물건들이 준영이가 지나온 삶을 상징한다면 저 물건들을 정리하는 건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겠지.
위에서 핸드폰, 악보, 손수건의 의미에 정경이 비중이 크지 않다고는 했지만 그럼에도 정경이, 정경이에게 품었던 복잡한 감정∙시간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긴 해. 그런데 준영이는 그런 물건을 담아두는 상자로 왜 여행 가방을 선택했을까? 특히 손수건은 원래 서랍에 넣어뒀다가 여행가방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어. 지난 감정의 부산물을 깔끔히 정리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서랍이든 여행 가방이든 갖고 있는 건 똑같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 거야. 여행 가방을 7년간 준영이가 함께 들고 다닐 수 있었을 유일한 상자로 바라본다면 더더욱 미련 넘치는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여행 가방은 그래봤자 여행 가방이야. 일상생활을 할 때는 들여다볼 일이 거의 없고, 일상의 공간을 침범할 수 없는 비일상의 상자. 서랍은 일상의 공간에 마련된 상자이기에 오늘 송아가 그랬듯 불시에 열어서 발견할 수 있는 상자이지만 여행 가방은 그렇지 않아.
일반적으로 여행을 자주 할 때라면 모를까, 여행을 자주 하지 않을 때는 여행가방에 뭘 넣어뒀는지 일일이 신경 쓰거나 기억해두고 있지 않잖아. 다음번에 여행을 갈 때에야 이게 여기 있었어? 혹은 이걸 안 뺐었네? 싶은 물건들을 발견하기도 해. 여행 가방, 거기에 담긴 물건, 그 물건의 의미는 안중에도 없는 상태가 되는 거지.
준영이도 마찬가지로 일상의 공간에서는 여행 가방을 곧바로 떠올리지 못해. 그래서 손수건을 서랍에 넣어 뒀다가 송아가 발견하고, 그걸 눈치채고 나서야 여행 가방에 넣었어. 현재 준영이의 일상은 송아를 중심으로 한다는 걸 보여주는 동시에, 비일상의 상자에 담긴 정경이와의 시간들은 아무리 정경이가 15년을 들먹여도 더 이상 일상을 침범할 수 없다고 보여.
여행 가방을 생각하다 보니 준영이의 안식년이 끝난 후, 한국을 떠나는 상황을 생각 안 할 수가 없네. 한국을 떠난다는 건 일상이 바뀐다는 의미일 테니까. 하지만 준영이의 일상은 떠나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일 거야. 함께 있으면 웃음이 나고, 힘들 때 생각나는 사람. 그로부터 오는 행복한 일상을 29년 만에 알게 됐어. 준영이는 송아라는 일상을 벗어날 마음도, 포기할 마음도 없으니 송아의 곁에 마음을 남겨두었다가 매 순간 송아에게로 돌아올 거야(비행기에 돈 뿌리고 다닐 준영이 모습이 안 봐도 훤해). 몸은 떠나 있어도 마음은 떠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니 여행 가방에 넣어둔 지난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상태로 준영이는 계속 송친놈으로 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