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이에게 준영이는
어쩌면 가족보다 더 가까운 관계였을지도 몰라
본인 생일에 본인을 만나러 오던 엄마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생일이지만 엄마의 기일
그게 고작 중학생인 정경에게 어떤 무게였을지 상상해봤어
바이올린.
천재소녀.
그런거 다 싫지 않았을까
엄마는 그거 때문에 돌아가신 거니까
그런 정경을 주변에서 얼마나 조심해서 대했을 거고
그런 조심스런 말들이, 행동이 또다른 상처였을거야
자기가 엄마를 죽인게, 적어도 그 원인을 제공한게 맞다고.
그때 준영이를 만난 거야
남들처럼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도
어쩔 줄 모르는 어색한 몸짓도 아닌
엄마처럼
음악으로 다독여주는 아이를
정경이에게 준영이는
엄마가 대신 보낸 존재
엄마의 부재로 생긴 친구
무엇을 해도 떠나지 않는 가족
그리고 누구보다 가깝고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친구
였을 거라고 생각해
차가운 아빠 - 어쩌면 엄마가 돌아가신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
강인한 할머니 - 언제까지 내 곁에 있어주세요 -
그 사이에서 마음을 잡지 못했던 아이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기댈 수 있고
언제나 자기 편을 들어주고
설사 그게 부채감 때문이라고 해도
엄마처럼 날 떠나는 일 같은 없는 상대
나와 같은 세계에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
나와 같은 재능을 지니고도
그걸 묵묵히 견뎌내는 상대
친밀한 누군가를 만난거야
그리고 그 상태가 너무 자연스러웠을 거고 그 긴 시간 동안
쇼팽콩쿨에 설득해서 내보낸 것도
2위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한 것도
그때의 정경이는 진심이었을거라고 생각해
그때까지의 정경이는 자신이 그 세계에 함께 있다고 생각했을테니까
나만 알고 있던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가
세상의 인정을 받고 각광 받는 걸 보면서
조금 뿌듯했을지도 몰라
준영이를 알아본 건 나야
내가 있는 세계로 준영이를 끌어냈다고 자랑스러워 했을 거야
세상으로 준영이가 나가면서
사람들이 온통 준영이에 대해 떠들어댈때 생각했겠지
하지만 여전히 가장 가까운 존재는 나야
그러니 준영이의 연주를 어떤 건 뜯어서 들어보고 어떤 건 뜯지도 않고
그랬어도 됐던 거야
준영이는 늘, 거기있는 존재니까 정경이에게.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리고 뉴욕에서의 그날 깨달아버린 거야
미국에서 어플라이한 모든 대학의 교수 자리에서 거절당하고
이제 더이상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걸 인정해야하는 순간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나와 다른 세계로,
내가 한때 있었다고 생각했던 그곳으로
가버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
정경이는 슬펐을까
화가 났을까
혼란스러웠을까
누구보다 아끼지만
그 존재를 인정하면 초라해진 내가 보여
그렇다고 떠나버리기엔 이미 그 자리가 너무 익숙해졌어
흔들고 싶어했던 거.
이해 돼
그리고 같은 지점에서
지금 준영이에게 도발하는 정경이 마음도 알 것 같아
정경이는 준영이를 잃는게, 두려운 걸 거라고 생각해
준영이는 한번도 거기 없던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이제 거기 있지 않을 것 같아졌으니까
그건 꼭 이성적인 감정 때문이라기 보다는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
날 지지해준 존재
이미 내 세계의 일부이자 내 몸 같은 존재가
떨어져나가는 고통 같은 거
정경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마치 부모에게서 어린이가 독립하 듯이
준영이와도 독립적인 관계가 되고
스스로를 직시하는 순간이 필요하겠지
그 과정이라고 생각해
정경이의 떼쓰는 것 같은 저 행동들은
그날의 어린이가
참 오래 참아왔다. 싶어서
정경이가 너무 많이 아프지 않고
너무 많이 소중한 존재들을 상처주지 않고
성장해나갔으면 하는 마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