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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나탈리 헤인스 <천 척의 배> - 트로이아 전쟁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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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8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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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를 재해석한 소설을 좋아해서 이것저것 많이 읽어봤는데 이 책도 그 중 하나야

책과는 전혀 관계없는 tmi지만ㅋㅋㅋ 도서관에 예약 걸어놨었는데 다른 책들 대출하고 나오려는 순간 예약도서가 도착했다는 카톡이 와서 운명인가..? 싶었어ㅋㅋㅋㅋㅋ

 

 

 

부제 그대로 트로이아 전쟁의 여성들을 이야기하는 책

크레우사, 헤카베, 카산드라, 폴릭세네, 안드로마케, 테아노, 펜테실레이아, 페넬로페, 브리세이스와 크리세이스, 라오다메이아, 이피게네이아, 클리타임네스트라 등등이 나와

에리스, 헤라/아테나/아프로디테, 테티스, 테미스, 가이아 등 신들도 나오고

전쟁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헬레네를 정면으로 이야기하는 챕터는 없다는 게 나름 흥미로운 지점일지도?

 

 

 

스파르타의 왕이 왕비를 잃었다는 이유로, 100명의 왕비가 왕을 잃어야 했다. 라오다메이아는 트로이아인들을 원망한 만큼 그리스인들도 원망스러웠다. 라오다메이아가 바란 것은 정말 소박한 것이었는데. 오직 남편이 자기의 것이고 안전하게 가까이 있기만을 바랐는데. (145)

어떤 여자가 겁쟁이를 사랑하겠냐고, 누가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라오다메이아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겁쟁이를 사랑하지 않으면 대신 시체를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147)

 

라오다메이아의 남편 프로테실라오스는 트로이아 땅을 제일 먼저 밟는 자가 죽게 될 거라는 예언의 당사자였어

아마 이 문장이 이 책에서 말하는 트로이아 전쟁을 관통하는 핵심이 아닐까 싶네ㅋㅋㅋㅋ 전쟁은 미친 짓이다......

물론 여기에선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얘기해. 가이아가 늘어나는 인구수를 더 감당하지 못하고 제우스에게 어떻게든 해 달라고 요청했고, 제우스는 테미스에게 조언을 구했고, 제우스와 테미스는 큰 전쟁을 일으켜서 인구수를 줄여야 한다는 데 동의했거든

 

 

인상깊었던 장면을 몇 개 말해보자면 일단 이피게네이아가 아킬레우스와의 결혼식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예쁘게 치장하는 장면. 나는 이피게네이아가 제물로 바쳐질 거란 걸 알고 있으니까... 아가멤논이 이피게네이아를 향해 칼을 들 때 '죽음을 본 적 없는 젊은이들, 그리고 죽음을 본 적 있으나 딸을 둔 아버지들이 고개를 돌렸다'(정확x)라고 서술한 게 마음에 박혔어

 

폴리도로스의 죽음을 알게 된 뒤, 헤카베가 전쟁이 일어난 것은 자기 때문이라고 하는 장면. 헤카베는 파리스를 죽이지 않으면 트로이아가 멸망할 거라는 예언이 있었지만, 차마 그 작은 아기를 죽일 수는 없었다면서 양치기에게 파리스를 버리고 오라고 시켰다고 말해. 그러자 헬레네가 그럼 그건 어머니 잘못이 아니라 양치기 잘못이라고 하고, 헤카베는 다시금 그건 내 잘못이라고 하지. 그 양치기가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맡겼다면서.

대부분의 트로이아 여자들은 (당연하게도) 전쟁의 원인이라고 여겨진 헬레네를 적대했는데, 이 장면에서 헬레네가 몇 번이고 그건 어머니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헤카베가 몇 번이고 그건 내 잘못이었다고 하는 게 인상적이었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카산드라가 만나는 장면. 카산드라가 복수의 여신들이 미케네 궁전에 올라앉은 것을 보고 공포에 질리자, 클리타임네스트라는 호기심을 품고 카산드라에게 무엇이 보이냐고 물어. 카산드라는 자신에게 보이는 것을 이야기하다가 이피게네이아에 대해 말하고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눈물을 흘리지.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카산드라에게 도망쳐도 된다고 하지만, 둘 모두 카산드라가 죽게 될 것을 알고 있어

 

마침내 오딧세우스가 이십 년만에 이타케로 돌아왔을 때, 페넬로페가 그를 낯설게 여기는 장면. 페넬로페의 이야기는 오딧세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식으로 서술되는데, 오딧세우스와 재회한 마지막 부분만 아테나 여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 도착하자마자 아내를 찾지도 않고, 구혼자들을 모조리 죽인 이 남자가 과연 내가 사랑하는 그 남편일까 생각하면서도 아테나 여신에게 남편을 돌려주어 감사하다고 기도하는 게 기억에 남더라고

 

 

그리고 이 소설은 안드로마케의 이야기로 끝나

남편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죽고, 아들 아스티아낙스는 성벽에서 던져져 죽고(그리스군이 아스티아낙스를 죽일 거라는 말을 전했을 때 안드로마케가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어), 자기 자신은 남편을 죽인 아킬레우스의 아들이자 시아버지 프리아모스를 살해하고 아스티아낙스를 성벽에서 던진 네오프톨레모스의 노예가 된... 수많은 기구한 운명의 여자들 중에서도 정말 인생이 이렇게 꼬일 수가 있나 싶은 인물이지만

옮긴이의 말에서 얘기하다시피 '그렇게 삶은 어떤 죽음보다도 영웅적이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이기도 해

 

어쨌거나 추운 밤에 몸에 두를 두툼한 천이 필요했다. 안드로마케는 춥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어쩌면 죽고 싶지는 않은 걸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382)

행복의 그림자가 행복 자체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트로이아 해변에서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쓰러져 울 때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었다.

 

 

더해서, 그로신 최애가 아킬레우스라 소설을 읽을 때면 항상 아킬레우스의 인물 조형을 관심깊게 보는데ㅋㅋㅋ 여기서도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관계가 흥미롭게 서술되더라고

일단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에게 브리세이스를 주기 위해 병사들에게 뇌물을 먹였다는 설정도 그렇고

 

이 여자는 자신의 거울상이었다. 파트로클로스가 한때 그랬던 것처럼. (77)

아킬레우스는 전투 실력이 부족한 친구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는 한편, 친구는 아킬레우스를 진정시키려 하고 있다는 걸 브리세이스는 깨달았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서로에게 최대한 다정하게 대하려고 애쓰는 전사들이라니. (108)

"그럼 만약 누군가 당신을 그 사람한테서 앗아간다면요? 당신 칼놀림이 그 사람만큼 빠르지는 않지 않아요?" …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에 대한 헌신이 지극해 질투를 아예 느끼지 않았다.

"그런다면 당신하고 같은 심정이겠지." 파트로클로스가 말했다. "내 가장 큰 행복을 빼앗긴 심정." (118)

 

이런 서술도 재밌지... 여기서 아킬레우스는 꽤 어린애같은 편인데ㅋㅋ 울든 우는소리를 하든 죄 파트로클로스랑 관련된 일들이야

 

 

 

매들린 밀러의 <키르케>, 크리스타 볼프의 <카산드라>나 <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 처럼 한 인물을 다루는 소설도 재밌게 읽었는데

이렇게 여러 인물이 나오는 소설도 재밌었어!

폴릭세네가 자기가 제물로 바쳐질 예정이란 걸 알게 되고 차라리 이렇게 깔끔하게 죽게 해 주어 감사하다고 신께 기도를 올렸던 것이나, 전후 여자들의 삶을 생각해 보면 차라리 전쟁에서 죽은 남자들이 더 팔자 좋다 싶기도 하고...ㅋㅋㅋ

중간중간 뮤즈 칼레오페가 얼른 전쟁에서의 여자들 이야기를 하라고 시인한테 성질내는 부분도 재미있었어ㅋㅋ 앞으로 이런 소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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