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 미챠 구출 계획 ~ 3. 일류셰치카의 장례식. 바윗돌 옆에서의 조사
이걸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챌린지가 끝났어. 총 46회차, 주로는 딱 10주가 걸렸네. 모두 완독 축하해!
개인적으로는, 평일마다 책을 꾸준히 읽는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배운 기간인 것 같아ㅋㅋㅋ 그래도 이렇게 완독하니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굉장히 아쉬운 기분이 들더라. 재독이었는데도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도 많았어. 함께해준 덬들한테도 정말 고마워.
자세한 감상은 내일 10시의 책거리를 위해 남겨둘게. 챌린지에 참여해 준 덬들을 위한 선물도 준비했으니 많은 관심 부탁해! (물론 천천히 따라오는 덬들도 환영해♡)
“제일 중요한 건 그이가 당신을 두려워한다는 점이에요. 즉, 당신이 도덕적인 측면에서 탈출에 찬성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지만, 만약 이 일에 당신의 승인이 꼭 필요하다면 당신은 이것을 관대하게 허용해 주어야 해요. … 내가 오늘 당신을 부른 건 당신이 직접 그를 설득하겠다는 다짐을 받기 위해서예요. 아니면, 당신 생각으론 탈출한다는 것이 역시나 명예롭지도 않고 남자답지도 않은 일이고, 아니면 뭐랄까…… 기독교적이지 못한 일인가요, 예?” (520)
“형이 정 듣고 싶다면, 여하튼 내 생각은 이런 거였어. 만일 형의 탈출에 대해 장교나 군인과 같은 다른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면, 나도 형의 탈출을 ‘허용하지 않겠어.’” 알료샤가 미소를 지었다. (529)
카체리나는 알료샤가 드미트리를 탈출시키려는 계획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 그 계획이 기독교적이지 않다는 이유에서인데, 그렇기 때문에 카체리나는 드미트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알료샤가 자신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이 대목에서 ‘허용한다’라는 표현이 나오지. 알료샤는 드미트리와의 대화에서 이 말을 인용해.
카체리나는 어떤 것을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있을지, 없을지 결정하는 것이 인간에 의해 주관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여. 이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대심문관의 믿음과 맥락이 닿아 있지. 반면 알료샤는 카체리나의 말을 인용하며 미소를 짓는데, 이는 대심문관의 논리에 입맞춤으로 답했던 그리스도의 태도와 닮아 있어.
“나는 형의 재판관이 아니야. 형을 단죄하는 일도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거, 꼭 알아 줬으면 해. 게다가 이런 일에서 내가 어떻게 형의 재판관이 될 수 있겠어, 그거야말로 이상한 노릇이잖아?" (530)
뿐만 아니라, 알료샤는 드미트리에게 자신은 드미트리의 재판관, 즉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 도덕과 비도덕을 직접 판단했던 카체리나와는 상반된 태도이지.
정말로, 그는 늦었다. 그를 기다리다 못해 그 없이, 꽃으로 장식된 좋은 관을 교회로 가져가려던 참이었다. 그것은 가엾은 소년 일류셰치카의 관이었다. … 이 자리에 모인 소년들은 모두 열두 명이었는데, 다들 배낭과 책가방을 어깨에 멘 채로 온 것이었다. (538)
일류샤의 장례식은 기독교적 요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우선, 장례식에 ‘열두 명’의 아이들이 모였다는 것은 열두 명의 제자를 연상시키지. 그리고 열두 명의 아이들 모두 배낭과 책가방을 어깨에 멨다는 것을 통해서는, 세상의 죄와 고통을 함께 나누어 가진다는 의미를 떠올릴 수 있어.
하얀 레이스 주름으로 장식된 파란 관 속에 일류샤가 작은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바싹 여윈 소년의 얼굴은 그 윤곽이며 이목구비며 전혀 변한 것이 없었으며, 이상하게도 시체에서는 거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얼굴 표정은 마치 생각에 잠겨 있는 듯 진지했다. 특히 십자형으로 모아 쥔 손은 꼭 대리석 조각인 양 아름다웠다. (540)
흰색은 그리스도의 부활, 혹은 순결을 상징해. 손을 ‘십자형으로 모아’ 쥐고 있다는 것에서 십자가를 떠올릴 수 있고. 무엇보다도, 일류샤의 시체에서는 거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고 했지. 조시마 장로의 시체에서 악취가 났을 때, 사람들은 조시마 장로를 성인이라고 여겼던 자신들의 믿음이 배신당했다고 생각하여 당혹스러워했어. 그런데 정작 시체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기적과도 같은 상황이 일어난 건 일류샤에게야. 그리고 이 사실은 그 누구의 주의도 끌지 못해. 심지어 서술자마저도 무미건조한 어조로 한 줄짜리 사실만을 언급하는 것에 그치지.
“일류셰치카가 그러라고 했어요, 일류셰치카가.” 그가 즉시 알료샤에게 설명했다. “어느 날 밤에 녀석이 누워 있고 내가 그 옆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이러더군요. ‘아빠, 내 무덤에 흙을 뿌릴 때 빵 껍질을 부숴서 뿌려 줘, 그럼 참새들이 날아올 테니까요. 참새들이 날아온 소리가 들리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즐거워질 거야.’” (543-544)
부수어진 빵 껍질은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 찢겨진 그리스도의 육신을 상징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떠올리게 해. 빵 껍질을 땅에 뿌림으로써 이를 참새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은, ‘한 알의 밀알’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일류샤의 죽음이 많은 이들을 소생케 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 빵 껍질이 뿌려지는 일류샤의 장례식은 구원을 약속하는 의식으로도 보여.
“여러분, 여기서, 바로 이곳에서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습니다.” (550)
‘이곳’은 바로 커다란 바위 옆이야. 챕터명에서도 ‘바윗돌 옆에서의 조사(弔辭)’라고 하여 알료샤가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을 명확하게 밝혀 놓았지. 이곳은 다른 말로 하면 ‘반석’이라고도 할 수 있어.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태 16 : 18)의 구절로, 이로 말미암아 ‘반석’은 교회와 그리스도를 상징하게 되었어. 이 이야기를 듣는 열두 명의 아이들이, 앞서 말했다시피 열두 제자와 대응된다는 점을 상기하면 더욱 의미가 깊지.
“비둘기 같은 아이들이여 ― 여러분을 이렇게 비둘기라고 부르도록 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선량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모두 이 훌륭한 회청색의 새와 모두 닮았으니까요 ―” (551)
또 알료샤는 아이들을 비둘기에 비유하는데, 성경에서 비둘기는 성령의 사역을 상징하는 새로도 등장해.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마가 1 : 9-10)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내려온 성령이 비둘기에 비유되었거든.
“그러니 첫째, 이 소년을 평생토록 기억합시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중대한 일에 몰두할지라도,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오를지라도, 또 아무리 큰 불행을 겪을지라도 어쨌거나 우리가 한때 이곳에서 아름답고 선량한 감정으로 결합되고 그것을 공유하면서 아름다운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맙시다. … 바로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온 아름답고 성스러운 추억이야말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가장 훌륭한 교육이 될 겁니다. 인생에서 그런 추억들을 많이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구원받은 셈입니다.” (551-552)
알료샤의 말은 기억과 부활의 관계를 요약하고 있어. 알료샤와 아이들이 일류샤를 기억하는 한, 일류샤는 그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있게 될 거야. 알료샤는 일류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한, ‘우리’는 악의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그러고는 일류샤를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자리에 함께한 서로를 기억해야 한다고도 말하지. 이 또한 일류샤가 있었기 때문이야. 이런 면에서는 일류샤 또한 그리스도로 볼 수 있어. 그리스도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제자들을 하나로 만들었다면, 아이들은 일류샤의 죽음을 통해 하나가 되었으니까.
알료샤가 웃기 시작했다. “자, 그럼 갑시다! 자, 이제 이렇게 손에 손을 잡고 갑시다.”
“영원히 이렇게, 평생 이렇게 손에 손을 잡고! 카라마조프 만세!” 콜랴가 다시 한 번 환희에 차서 이렇게 외쳤으며, 다른 소년들도 전부 또다시 그의 외침에 화답했다.
손에 손을 잡고 가자는 것은, 공동체적 의식과 더불어 일류샤의 죽음을 계기로 하여 총체적인 화합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해. 알료샤와 아이들은 일류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딛고 일어나, 일류샤의 기억을 바탕으로 하는 경험을 공유하는 광의의 가족이 된 거야. 진정한 부활은 이들의 앞으로의 삶을 통해 실현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