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편 오심 1. 숙명적인 날 ~ 3. 의학적 감정과 한 푼트의 호두
드미트리의 재판이 시작되었어. 검사 이폴리트 키릴로비치와 변호사 페츄코비치의 대결이 펼쳐지겠지.
검사는 드미트리를 유죄로 몰아가고, 변호사는 드미트리의 무죄를 입증하려 노력해. 증인들도 차례로 등장할 거야!
내가 앞서 기술한 사건들이 있고 난 다음 날 아침 10시, 우리 지방 법원의 법정이 열렸고 드미트리 카라마조프에 대한 공판이 시작되었다. (311)
표도르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두고, 사건에 얽힌 사람들이 느끼는 인식과 각자의 해석, 기억이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해. 많은 재판이 그렇듯이, 겉으로 보이는 사실과 그 이면에 담긴 진실이 충돌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말야.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쓰면서 실제로 범죄 사건과 그 기록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고 해. 뿐만 아니라 “재판 기록은 그 어느 소설보다도 더 흥미롭다. 예술이 다루고자 하지 않는 인간 영혼의 어두운 측면을 조망해주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수시로 법정을 방문하고, 유명한 재판에 참관하고는 했어.
도스토예프스키는 1864년에 공포된 러시아 사법개혁의 지지자이기도 했는데, 이 사법개혁법은 모든 신분의 재판 참여 원칙을 천명했어.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신분에 관계없이 일반 사회 구성원들의 재판 참여를 허용하는 배심 제도를 도입한 거지. 배심원의 재산 자격을 규정하는 모순이 존재했다는 한계가 있지만, 차르제 하의 러시아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국정 참여에 관한 대체물로서 기능했다는 의의도 있어. 소설과 연관지어 보면, 드미트리의 재판에 참석한 배심원도 ‘네 명은 우리 도시의 관리, 두 명은 상인, 여섯 명은 우리 도시의 농부와 소시민’이라고 한 것을 보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배심원으로서 자리한 것은 맞는 것 같아.
정원 문이 열려 있었다는 점에 관해선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328)
24회차에서 그리고리는 정원 문이 열려 있었다고 기억했고, 29회차에서 드미트리는 정원 문이 닫혀 있었다고 말했다고 했지. 우리는 이제 범인이 드미트리가 아니라 스메르쟈코프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즉, 정원 문은 닫혀 있었던 것이 맞아(29회차 참고). 스메르쟈코프 또한 문이 열려 있었다는 것은 그리고리의 생각에 불과하다고 했고. 그런데도 그리고리는 여전히 정원 문이 열려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어. 이건 고의로 드미트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리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리의 머릿속에서 드미트리는 이미 부친 살해범이거든.
페츄코비치는 그들 각각의 도덕적인 위신에 먹칠을 하고 콧대를 단단히 꺾어 놓은 채 풀어 주었다. (340)
그리고리, 라키친, 트리폰 보리소비치가 차례로 증인으로 등장해서 드미트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해. 드미트리의 변호사 페츄코비치는 증언 자체의 타당성을 공격하는 대신, 증인들을 공격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저 증인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메시지를 반박할 수 없을 때는 메신저를 공격하라는 말이 떠오르는 장면들이야.
“오, 저 사람이 핏덩어리처럼 어렸을 때가 기억나는군요. 아버지 집의 뒤뜰에 내팽개쳐진 채 신발도 신지 않고 단추 하나만 달랑 달린 바지를 입고서 땅바닥을 뛰어다녔지요.”
정직한 노인의 목소리에서는 갑자기 어떤 감상적인, 가슴을 에는 듯한 울림이 배어 나왔다. (348)
“그래서 저는 그 아이에게 호두 1푼트를 사다 주었는데, 아이는 누구한테도 그렇게 1푼트의 호두를 선물받은 적이 없었던 것이지요. … 어느 날 아침 제가 벌써 백발이 된 채로 서재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혈기 왕성한 젊은 청년이 들어오지 뭡니까. 그는 손가락 하나를 치켜 올리더니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 ‘저는 방금 도착했고 그 길로 곧장 호두 1푼트를 사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려고 이렇게 왔습니다. …” (348-349)
앞서 등장한 그리고리와 라키친, 트리폰 보리소비치와는 달리, 게르첸슈투베는 드미트리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는 인물이야. 다만,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 있는 증거나 의학적 감정을 내미는 건 아니지. 이 나이든 의사는 어린 시절의 드미트리를 기억하고 있었고(기억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여러 번 나왔지), 자신이 어린 드미트리에게 호두 1푼트를 사다 주고 성호 긋는 방법을 가르쳐 주자 드미트리가 이를 배우고 따라했던 것을 떠올려. 이러한 증언을 통해 법정에 있는 사람들은 드미트리가 순수하고 선한 아이였다는 인식을 갖게 돼.
또한 게르첸슈투베는 이십삼 년 후, 성인이 된 드미트리가 자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베풀어 준 호의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고 이야기해. 게르첸슈투베가 드미트리를 가리켜 ‘은혜를 알고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라고 한 것도 무리는 아니지. 이 일화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드미트리에 대한 우호적인 인상을 남겨 주었어.
게르첸슈투베에서 드미트리에게로 초점을 옮겨 보면, 드미트리는 어린 시절 게르첸슈투베가 호두 1푼트를 주며 성호 긋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사실을, 청년이 되어 방탕한 행동을 일삼으면서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게다가 어린 시절 드미트리가 ‘성신의 이름으로’ 부분을 까먹자(게르첸슈투베는 심지어 이걸 독일어로 가르쳐 줬어), 게르첸슈투베는 드미트리에게 그 부분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는데, 이십삼 년 후 드미트리가 이걸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음이 드러나. 드미트리의 내면에서는 선악이 전쟁을 치르고 있었음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하느님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거지.
‘호두 1푼트’에 좀더 주목해 보자면, 이는 구원과 부활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한 알의 밀알’과 같은 맥락을 지녀. 조시마 장로가 신비한 방문객에게 자수를 권유한 후, 요한복음의 이 구절을 보여주었지. 이 방문객은 조시마 장로를 죽이기 위해 다시 찾아왔다가, 결국 살인의 유혹을 뿌리쳤어. 다른 사람에게 누명이 씌워지고(진짜 살인자인 방문객이 아니라 하인이 죄를 뒤집어썼지), 살의를 품었음에도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드미트리의 경우와 비슷한 면이 있어. 식물적 상징의 측면에서 해석해 본다면, 가슴 속에 뿌려진 씨앗은 영혼에 깊이 새겨져 죄악 속에서도 위대한 기억으로 남게 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고 해.
또한 ‘호두 1푼트’를 드미트리의 식물 상징으로 본다면, 알료샤의 ‘양파 한 뿌리’도 함께 떠올릴 수 있어. 1푼트는 약 407.7그램에 해당하는 소량을 가리키고, ‘한 뿌리’ 역시 소량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 알료샤와 그루셴카가 주고받은 ‘양파 한 뿌리’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행하는 작은 선행을 표현한다면, 드미트리의 ‘호두 1푼트’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표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