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편 미챠 5. 갑작스러운 결정 ~ 6. 이 몸이 납신다!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이는 드미트리와 그루셴카가 모크로예에서 만났네.
그루셴카와 함께 있는 막시모프와 칼가노프도 반가운 이름들이지! 제1부에서 카라마조프 가족들과 함께 수도원에 갔던 사람들이야. 책의 분량으로는 엄청나게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지만, 사실 카라마조프 가족들이 수도원에 간 건 고작해야 이틀인가 사흘 전의 일이야. (아마 이틀 전이었던듯?)
미챠는 돈다발을 든 채로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모든 지폐를 오른손에 든 채 꼭 과시라도 하듯 손을 앞으로 쑥 내민 상태였다. … 나중에 뒤늦게 흥미를 갖고서 “돈이 얼마나 되었나?”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표트르 일리치는 그때 눈짐작으로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대략 2000, 어쩌면 3000은 되었고 여하튼 커다랗고 ‘두툼한’ 돈뭉치였다고 대답했다. (247)
미챠가 소유한 돈의 액수 변화를 대충 정리해 보자.
정오(0루블) → 시계 팔고 주인에게 돈 빌림(9루블) → 라갸브이 찾아가면서 돈 다 씀(0루블) → 표트르 일리치에게 권총 저당잡힘(10루블) → 표도르의 집에 감 → 표트르 일리치에게 돌아옴(3000?루블)
그러니까 표도르의 집에 갔다 오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미챠는 갑자기 3000루블이라는 큰 돈을 손에 쥐고 있었던 거야. 표트르 일리치가 의아하게 여긴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
”총알도 헛소리야! 나는 살고 싶어, 난 삶을 사랑해! 이걸 똑똑히 알아 두게. 나는 곱슬머리 금발의 포이보스와 그의 뜨거운 빛을 사랑해…….” (257)
“삶을 사랑하노라, 삶을 너무도 사랑했노라, 너무 사랑해서 추잡할 정도였노라.” (264)
‘제5편 Pro와 Contra 3. 형제들, 가까워지다’ 부분에서 이반과 알료샤는 사람은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대화를 나누었어. 그리고 형제이면서도 그 대화에서 배제되었던 드미트리는, 자신은 삶을 사랑하고 태양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고.
그는 호주머니에서 지폐 뭉치를 꺼내 세 장을 집어 위로 던지고 서둘러 상점을 나갔다. (267)
여기서 드미트리가 3000루블을 구하려 애썼던 이유를 다시 짚어 보자. 드미트리는 자신이 카체리나의 돈을 슬쩍해 버렸다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어. ‘한 여자 앞에서 야비한 놈이 되었건만 그 즉시 다른 여자 앞에서도 또 야비한 놈이 될 것이다.’, ‘게다가 그루셴카가 알게 된다면, 그녀가 먼저 이런 야비한 놈 따위는 싫다고 할 것이다.’ (183) 그러니까 드미트리는 그루셴카와 새로운 삶을 떳떳하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카체리나에게 돈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 거야.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의문을 느낄 수 있어. 드미트리는 카체리나에게 갚아야 할 돈을 왜 이렇게 펑펑 써 버리고 있는 걸까? 표트르 일리치가 생각했듯 쓸모도 없는 것들을 상자 단위로 사 가면서. 심지어 드미트리는 삼사 주쯤 전에도 비슷한 짓을 한 적이 있어.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그때 드미트리는 그루셴카와 함께 모크로예에 가서 축제를 벌이다시피 했는데, 그 대가로 얻은 건 그루셴카의 발에 입을 맞춰도 된다는 허락뿐이었다고 해. 어쨌거나 드미트리는 그 많은 물건이 마차에 실려 자신을 따라오게 두고 그루셴카와 폴란드 장교가 있는 모크로예로 떠나.
모크로예까지는 20베르스타 남짓 되었지만, 안드레이의 트로이카가 워낙 빨리 달려서 한 시간 십오 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271)
중요한 건 아니고, 아무래도 생소한 단위이다 보니 감을 좀 잡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ㅎㅎ 베르스타는 과거 러시아에서 썼던 길이 단위인데, 1.0668km정도를 의미해. 20베르스타는 21km 정도가 되겠네. 마차의 평균 속도는 평지에서도 시속 10km를 넘기 어려웠다고 하는데, 드미트리가 탄 마차는 말 세 마리가 끄는 트로이카였으니까 좀 더 빨랐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20베르스타를 75분 만에 갔다는 걸 보면 엄청나게 속도를 낸 모양이야.
그리고 제7편 ‘알료샤’와 제8편 ‘미챠’는 동일한 시간에 일어난 두 사건을 병치하는 구조를 띠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미챠가 이렇듯 모크로예로 달려가고 있던 시간은 알료샤가 어떠한 깨달음을 얻고 땅에 입을 맞추던 시간과 비슷해. 이 날은 또한 아침에 이반이 체르마쉬냐/모스크바로 떠났던 날이기도 하고.
“자네, 자네는 나를 용서할 텐가, 안드레이?”
“아니, 제가 뭘 용서할 수 있습니까, 나리는 저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으셨는걸요.”
“아니야, 모든 사람들,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네 혼자 지금, 바로 지금 이렇게 길을 가는 도중에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나를 용서하겠나? 말해 보게, 이 순박한 사람아!” (277)
드미트리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용서를 갈망해. 마부 안드레이에게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말하자, 안드레이는 ‘제가 용서할 게 뭐 있습니까?’라고 반응하지. 어쩌면 이 말은 드미트리를 순간적으로나마 구원했을지도 몰라.
너무 나간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드미트리가 용서를 구하는 마부의 이름이 안드레이라는 것에 주목하는 관점도 있어. 안드레이, 즉 사도 안드레아스는 러시아의 수호성인이거든. 게다가 안드레이는 드미트리에게 ‘나리의 순진한 마음을 봐서 주님은 용서해 주실 겁니다.’라고 하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