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레 미즈 총대덬이야
오늘 분량은 1장 12절 '근위병'까지야
어제 분량에서는 처절한 우고몽 농가 전투와 나폴레옹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그려졌는데
마지막에 영국군이 퇴각한다고 나폴레옹이 기세 좋게 소리쳤던 장면이... 어째 쎄하지...?ㅋㅋㅋㅠ
14~16회차는 워털루 전투, 아니 18세기 유럽에서의 전쟁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머리 속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흥미진진하게 읽기가 정말 힘든 것 같아ㅠ 우고몽 전투는 레 미즈 속 묘사만으로도 무시무시했지만 한편으로 양군 배치 같은 건 글만으로는 잘 와 닿지 않더라고
그래서, 2부 1장을 꼭 읽고 넘어가겠다 하는 덬들은 워털루 전투 이미지나 영상을 구글링해 보면서 시각 자료도 같이 보기를 추천해!
나도 이 글 마지막에 워털루 전투 그림 몇 장 올려두겠지만... 글 읽기에 훨씬 도움이 될 거야
오늘 자료에서는 워털루 전투, 나아가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을 유럽의 세력 균형과 연관지어 살펴보려고 해
대혁명 이후 약 30년간 프랑스의 대외 행보가 백년 가까이 이어진 유럽의 세력 판도를 뒤흔드는 한편
세력 균형이 드디어 공고한 국제질서로 자리하는 과정 자체이기도 하고,
이걸 알면 워털루 전투에서 양군이 왜 그토록 사생결단으로 싸워야 했는지 그 처절함을 좀더 큰 틀에서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마지막에는 워털루 전투 그림 몇장이랑 오늘 분량에 언급된 몇몇 이름을 간단히 소개할게
그럼 오늘도 즐겁게 레 미즈 읽어보자!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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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 혁명 전쟁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터졌지만 루이 16세가 바로 내쫓긴 건 아니었어
하지만 해외로 도피한 루이 16세의 남동생들 - 프로방스 백작, 아르투아 백작- 이 정말 하나도 도움 안 되는 도발을 해 버려;
루이 16세 일가의 탕플 탑 유폐 이후 신성로마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필니츠 회담을 가졌어
레오폴트 2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오빠이기도 해서 루이 16세 일가의 안부를 걱정했고, 다른 유럽 군주들에게 부르봉 왕조를 돕자고 하기도 했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아서 군사 행동 같은 적극적인 개입까지 실현할 생각은 없었어
필니츠 회담과 그 이후에 발표한 선언도 사실은 신성로마제국과 프로이센의 폴란드 분할 공동 대응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지
프랑스 혁명과 부르봉 왕가에 관한 건 아니었어
그래도 아르투아 백작의 끈질긴 요청으로 프랑스에 대한 외교적 압박 차원에서 "프랑스 국왕 문제는 유럽 군주 전체의 공통 관심사이고
프랑스 왕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두 군주는 무력도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을 넣었어
재차 말하지만 말은 이래도 신성로마제국과 프로이센은 전쟁 생각까지는 없었고 필니츠 선언도 공식 선전포고는 아니었지만,
이 선언에 고무된 프로방스 백작이 "만약 루이 16세 전하에게 광신적인 위해가 가해지면 외국 군대가 파리로 쳐들어간다!"는 협박성 성명을 발표해버려;
여기에 프랑스 혁명 정부는 제대로 자극받아버렸고;;; (프로방스랑 아르투아 백작... 이게 엑스맨이 아니면 대체 무엇;;;)
프랑스 국민도 필니츠 선언을 외국의 간섭과 외국 군대의 침략 위협으로 받아들여 적개심을 키워가던 중에
1793년, 외국과의 내통이 하나의 명분이 되어서 루이 16세 부부는 정말로 처형되고; 프랑스는 찐으로 전쟁을 시작하게 돼
혁명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지만 사실 혁명과 프랑스에도 팽창 정책 가능성은 내재되어 있었어
가장 먼저 이야기해 볼 만한 건 '자연국경론(Frontières naturelles de la France)'야
누가 처음 꺼낸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는데, 요지는 "프랑스 국경은 라인강, 대서양,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이라는 자연 경계로 이루어진다"는 거야
이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자연국경론이 실현된다면 그건 프랑스가 네덜란드, 벨기에, 라인강 서안 독일 일부, 사보이아 공국 등등을 삼킨다는 뜻이야
만약 누가 "태평양에 직접 면하는 곳까지 우리 땅이다"라고 해 봐... 그게 한국 친다는 거랑 뭐가 다르겠어;
그래서 자연국경론은 프랑스의 영토 확장 의식을 내포하는 주장이었는데,
프랑스 혁명 정부에서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다가 1793년 1월 31일 혁명 정치가인 조르주 당통이 콕 집어서 언급하면서
정말로 혁명 정부가 자연국경론을 전쟁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인식하고 있다는 모습까지 보여줬어
그보다 조금 앞선 1792년 9월 프랑스 혁명군은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을 상대로 발미 전투에서 완승을 거뒀어
당시 혁명 때문에 프랑스 군의 퀄리티는 심하게 떨어져 있어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는데 어라 이걸 이긴 거야
게다가 만약 프랑스가 졌으면 연합군이 그대로 파리로 밀고 들어와서 혁명을 무효화시켰을테니까,
전력상 불리에도 불구하고 외국 군대를 쫓아냈으니 혁명 정부가 고무된 건 말할 것도 없겠지?
그래서 혁명 정부는 1792년 11월과 12월에 연이어 혁명 전쟁 법령을 발표했는데 이게 꽤 자극적이야(당통의 언급도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해)
11월 법령에서 프랑스 국민공회는 "프랑스는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모든 인민에게 우애와 지원을 약속한다"고 선언했고
이걸 여러 언어로 번역까지 해서 혁명을 프랑스에 한정하지 않고 유럽으로 전파하겠다는 의지를 대외에 천명했어
그리고 12월에는 "군주정을 옹호하는 자는 모두 우리 적이다"라면서 "The French People to the ____ People"이라는 백지 조항을 달았는데
이게 무슨 의미냐면 혁명을 일으키는 세력을 지원한다, 혁명에 동참한다면 저 빈칸에 자기 나라 이름을 써 넣으라는 거야
빈칸 하나로 전 유럽을 광역 도발한 거ㅋㅋㅋ
이 부분을 읽으면서 헨리 키신저 책도 보게 됐는데 거기서 키신저가 대혁명(+혁명 전쟁)을
"17세기 종교적 충동을 대체하는 세속 성전(secular crusade)"이라고 한줄요약한 게 재미있더라고
프랑스 대혁명은 차고 넘치는 자신의 혁명 열정을 견디다 못해 열성적으로 전 유럽으로 퍼뜨리고 싶어했다는 걸
'성전'에 비유했는데 그게 너무 찰떡이야ㅋㅋㅋ 당시 프랑스가 맹신적일 정도로 뜨거운 상태였다는 걸 너무 잘 보여주지 않아?
그리고 실제 프랑스의 영토 확장 야심이 실현될 거라고 해석될 만한 일도 있었어
프랑스 동부 알자스-로렌 지방(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거기)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프랑스에 귀속되기는 했지만
기존 통치자였던 여러 소군주의 사법권과 교회의 특권은 그대로 인정된 곳이었어
그런데 1790년 프랑스 국민입헌의회에서 봉건적인 제도의 철폐를 가결하는 동시에 "알자스 인민들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조약은 합법성이 없다"는 발언이 나와
이 발언은 군주끼리의 합의에 의한 조약의 유효성을 무시하는 것인 데다 "알자스 사람들이 프랑스의 지배를 원하면 그건 그곳 국민의 뜻이므로
프랑스가 통치해야 한다"는 걸 함의하는 것이기도 해서, 그때까지 유지되던 유럽의 균형이 혁명 정부 때문에 동요될 수도 있다는 해석까지도 가능했어
요약하면, 주변 나라들이 볼 때 프랑스 혁명 정부는 이념적으로 공존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상대인 동시에
현실적으로도 언제 영토 욕심을 내면서 국경을 넘어올지 알 수 없는 폭탄 같은 존재였을 거야
혁명 전쟁의 발발 원인이 전적으로 프랑스에만 있다는 뜻은 아니야! 다만 공화정 대 군주제의 이데올로기 다툼 등등 당시의 여러 상황과 맞물려서
다시 한 번 유럽 차원에서의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프랑스가 안고 있었다 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에 대해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이 연합한 것도 그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발로였을 거고... 그런데 그때 나폴레옹이 등장해
2. 나폴레옹 전쟁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혁명 전쟁은 자연스럽게 전 유럽에 대한 나폴레옹 전쟁으로 이어졌어
나폴레옹이 코르시카 귀족 출신인 건 유명한 사실인데, (치사하지만)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은 아니어서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은 '시골 하급 귀족' 정도로 취급됐어
코르시카 자체도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 껴서 정체성도 좀 모호하고... 지금도 프랑스 땅이지만 이탈리아 말이 통할걸?
그래서 뼈대있는 유럽의 왕가나 귀족들은 나폴레옹을 '시골 촌놈 주제에 가~암히 왕도 아니고 무려 황제를 자칭하는 근본없는 놈' 정도로 봤어
출신지에 따른 소속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점까지 같이 엮여서 프랑스인이지만 코르시카 출신인 나폴레옹의 이름을
이탈리아식으로 '부오나파르테'라고 조롱하듯 부르기도 했고
레 미즈에도 나폴레옹의 성인 '보나파르트'를 '부오나파르테'라고 부르는 대목이 몇 번 나오잖아?
(다 그런 건 아니고)대부분 맥락에서 '부오나파르테'라는 호칭은 "쟤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이탈리아 사람이다"라는, 배척하는 태도를 암시할 때 쓰여;;
더구나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과 통치 정당성을 화려한 군사 업적으로 커버하려고 했고
또 그게 가능했던 뛰어난 군인이기도 했어
십수년에 걸친 나폴레옹의 정복 사업으로 천년간 존속하던 신성로마제국은 1806년 자진 해체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나폴레옹 편에 붙은 독일 제후국들은 '라인 동맹'으로 묶여서 프랑스와 종속 관계로 맺어지는 한편 라인강 동쪽 영역까지 내주게 됐어
그 밖에 나폴레옹은 베스트팔렌 왕국과 바르샤바 대공국처럼 '이게 뭐야...?' 싶은 위성국까지 만들었고
자기가 정복한 유럽 각국의 왕위에 본인의 형제들과 부하들을 앉혔어. 2부 1장에서 몇 번 언급되는 뮈라와 베르나도트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나폴레옹의 기병대 사령관이자 매제인 뮈라는 정말로 나폴레옹이 나폴리 국왕으로 만들어줬고,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장군이라는 후광을
기대한 스웨덴 사람들이 차기 국왕으로 받아들인 사례야
공교롭게도 둘 다 나중에 나폴레옹을 배신한다는 공통점이 있네... 둘 다 레 미즈 속 워털루 전투 씬에서 등장 안 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야
이렇게 나폴레옹은 차례차례 도장 깨듯 유럽 강대국을 쓰러뜨리며 멀리는 러시아까지 세력을 뻗었고,
완전한 유럽 지배를 위해 본격적으로 영국을 치는데 바로 대륙봉쇄령이 나폴레옹의 대 영국 정책의 일환이야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에 성공해서 뛰어난 기술력과 탄탄한 경제력을 갖췄고, 또 해군력에 힘입어 넓은 해외 식민지를 확보한 해상 강국이었어
나폴레옹 눈에는 아마 꼭 깨야 할 마지막 퀘스트... 뭐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까 싶어
영국도 나폴레옹의 유럽 대륙 지배를 고깝게 여기고 국가 위협으로 생각하고 있었어
이전 회차에서 영국은 유럽 내 세력 균형추 역할을 했다고 언급했는데, 나폴레옹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어
뭐 그렇다고 절대 영국이 정의감이 충만해서 그런 역할을 한 건 아니고, 당연히 영국과 나폴레옹의 이해 관계가 충돌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었겠지?
주지했듯이 영국은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전세계 바다를 누비면서 거대한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가장 필요한 해로를 확보하고 거기에서 위협을 받지 않는 게 중요한 국가 이익이었어
그런데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치면서 베네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 북부가 오롯이 그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돼
스페인도 나폴레옹의 영향권에 있었기 때문에 영국에게 나폴레옹의 북이탈리아 지배는 지중해에서의 자유로운 항해가 불가능해졌다는 걸 의미해
그리고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중에 프랑스와 아미앵 조약을 맺고 모든 점령지를 반환하는데 그 중에는 네덜란드에 돌려준 남아프리카의 케이프 항도 있었어
문제는 케이프 항이 영국과 인도를 잇는 주요 항로 중 하나에 위치하는 항구였다는 거야
네덜란드도 나폴레옹 전쟁으로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면서 케이프 항은 프랑스 세력권에 들어갔고, 케이프 항을 통한 영국 본국과 인도의 원활한 연락도 어려워졌어
케이프 항이 아니면 영국이 인도로 가기 위해서는 지중해 경유나 남아프리카 우회 밖에 답이 없었는데 이게... 둘 다 나폴레옹 때문에 못하게 됐잖아?
게다가 영국은 나폴레옹과 잘 지내게 되면 유럽 대륙과의 무역도 원활해질 거라고 기대하고 아미앵 조약을 맺었던 건데
나폴레옹은 프랑스+프랑스의 위성국+그 식민지에서 영국 제품 수입을 금지하고 1803년 새 관세법을 발표하는 등 대놓고 무역 분야에서 영국을 때리면서
영국의 기대는 좌절되었고ㅋㅋㅋ 아미앵 조약으로 생긴 잠깐의 평화 시기에 프랑스도 해상 무역을 강화하면서 해외 진출에 박차를 가해
해상 진출에 사활을 걸고 있던 영국은 국익 중에서도 핵심 이익을 나폴레옹과 프랑스에게 방해받은 셈이니("대놓고 싸우자는 거네?" 이런 분위기 아니었을까)
나폴레옹의 유럽 지배와 프랑스의 해상 진출을 반드시 무산시켜야 하는 필연이 생긴 거야
(정말 엥간히 화났는지 영국은 1806년에 케이프 항을 도로 점령하기는 함ㅋㅋㅋㅋㅋ)
그렇지만 둘 다 섣불리 붙진 못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다 때문이었어
영국은 나폴레옹이 바다를 건너 영국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할 정도의 힘은 있었지만 군대와 보급 물자를 대륙으로 보내서
거기서 전면전을 붙는 건 방어 이상의 국력을 소모하는 일이었고,
나폴레옹은 이미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이 박살나는 바람에 군대를 보내고 싶어도 보낼 군대가 없었...
영국과 프랑스의 해군력 차이가 크기도 했고. 그래서 나폴레옹은 군대로 영국을 어찌해 볼 엄두는 못 내고
대신 1806년 베를린 칙령을 내려서 영국과 유럽 대륙의 무역을 전면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실시했어
한 마디로 영국의 무역을 봉쇄해서 경제적인 타격을 입히려던 거야
그런데 대륙봉쇄령의 진짜 문제는 나폴레옹이 노린 영국이 아니라 유럽을 고사시키는 정책이었다는 거야
북해를 통해 영국과 교역하던 독일 북부와 네덜란드 항구 상인들이 먼저 타격을 받았고 결국 이들은 밀무역을 하게 돼
그리고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등은 농업 국가로서 영국에 곡물 등을 수출하고 공업 제품을 수입해 왔는데
그걸 못하게 되면서 농산물 가격은 폭락하고 수입품 가격은 폭등하는 혼란을 겪었어
최종적으로는 프랑스도... 영국 식민지에서 수입하던 커피나 향료, 그 외 각종 원료의 수입길이 막히는 바람에
저 밀무역 상인들을 통해 원료를 들여오는 수 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되니 원료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프랑스 공업도 점점 침체되는 피해를 입었어
영국 말려 죽이려다가 프랑스가 더 큰 피해를 입고 있는 그림... 3년 전 동북아시아 어딘가에서도 본 것 같은데 말이지
결국 포르투갈이 영국과 몰래 교역하다가 걸렸고, 역시 대 영국 교역이 막혀서 손해를 본 지주 계급의 항의로 러시아 차르도 영국 교역을 재개하는 등
곳곳에서 나폴레옹의 통제력이 풀리고 있다는 징후가 나타났어
나폴레옹은 이베리아 반도 전쟁과 러시아 원정으로 다시 통제의 고삐를 조이려고 했지만 알다시피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영국-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에게 밀렸고
러시아 원정은...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죄와 벌> 같은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니 뭐라도 남겼다고 봐야 하나ㅋㅋ
나폴레옹의 연이은 패배에 자극받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라인 동맹, 스웨덴 등은 영국, 러시아와 대 나폴레옹 연합을 구축해
다시 한 번 본격적으로 프랑스와 전 유럽이 싸우게 되었고, 1813년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20년 가까이 끌어온 나폴레옹 전쟁도 일단락되었어
나폴레옹을 완전히 몰아내러 파리로 향하던 연합군은 1814년 3월 쇼몽 조약을 체결했어
이 조약은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한 세기 동안 세력 균형의 원칙으로 논의되던 것들을 아예 하나의 조약으로 합의해 명문화한 최초의 사례야
쇼몽 조약은 전문에 "유럽의 평화 유지는 '정당한 세력 균형(juste équilibre)'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며 세력 균형을 유럽의 국제질서 원칙으로 못박았고
"전쟁 종식 후에도 유럽의 평화 유지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연합국 중 한 나라가 프랑스의 침략을 받으면 다른 연합국들은
(...)침략당한 국가를 지원한다"며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제시했어
세력 균형 '체제'에 대한 유럽의 대원칙은 연합국이 맺은 1차 파리 조약(w/ 프랑스)과 4국 동맹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
연합국은 나폴레옹을 엘바 섬으로 쫓아낸 1차 파리 조약에서 "정당한 세력 분배로써 영구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
"프랑스가 포기한 영토의 처분과 유럽의 진정한 세력균형체제 형성을 위한 모든 문제는 연합국이 서로 합의한 원칙에 입각해 결정한다"는 조항을 넣었고,
1815년 워털루 전투 후 자기들끼리 체결한 4국 동맹에서는 "프랑스가 어떻게든 혁명 원칙을 다시 들고 나와 타국의 안전을 위협하거나
(...)보나파르트나 그 가족이 프랑스의 지배자가 되는 경우 4국은 서로 협조해 필요한 조치를 강구한다"고 명시함으로써
세력 균형에 대한 유럽 전체의 대원칙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프랑스의 재침에 대한 실질적인 공동 봉쇄망을 짜는 데 이르게 돼
17세기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도입된 세력균형 원칙이 체계화, 체제화되는 과정에 프랑스의 발흥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 최후의 전투이자 세력균형이 새로운 국제질서로 완전히 정착한 이후의 시작점이 된다는 걸 알고
1장을 감상하면 조금 더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
위고 영감은 워털루 전투에 대한 소회를 밝히면서 '독재자의 몰락'과 '프랑스 혁명이 꺾였다'는 이중적인 감정을 느끼는 듯 하지만ㅋㅋ
이 감정을 이해하려면 '혁명의 유산 집행인' '공화정을 배신한 독재자' 같은, 나폴레옹에 대한 여러 평가가 병존한다는 걸 염두에 두기를 추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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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6월 18일 오후 7시 전투 (by William Sad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