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레 미즈 총대덬이야
오늘 분량은 2부 1장 1절부터 6절 '오후 4시'까지야
오늘부터 2부 시작인데... 첫 장부터 워털루 전투라는 우리 챌린지의 첫 고비가 나타났네ㅋㅋㅋ
나도 몇 년 전 처음 레 미즈에 도전했을 때는 이 부분에서 흐린 눈 하느라 미칠 것 같았는데,
워털루 전투랑 유럽 상황을 알고 나서 주말에 미리 좀 읽어보니 생각보다 흥미롭게 술술 읽히더라고
지난 주 예습 차원에서 추천했던 '역사저널 그날' 워털루 전투 편을 보는 건 여전히 권하지만,
조금 더 깊이 2부 1장을 읽고 싶은 덬들을 위해서 그동안 공부했던 걸 조금 정리해서 가져와 봤어
전후 사정이 워낙 복잡해서 시리즈로 준비했고, 오늘은 나폴레옹 전쟁 발발 배경으로서의 유럽 국제질서 '세력 균형'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게
최대한 요약하려고 애썼지만 어쩔 수 없어... 너무 길어ㅠㅠ 양해 부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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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럽의 정치와 종교 - 신성로마제국
가볍게(?) 신성로마제국 이야기부터 해 볼까 해... 30년 전쟁부터 이야기해도 되지만,
왜 하필 신성로마제국의 영토가 30년 전쟁의 주요 전장이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신성로마제국이 어떤 나라인지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알다시피 고대 로마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세 대륙에 걸친 거대 제국을 건설했는데, 2세기 무렵부터 제국 북쪽에서 게르만 족의 침략이 잦아지면서
게르만 족이 침공했던 제국의 서방, 즉 지금의 중-서부 유럽에서 제국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에 봉착했어
안 그래도 영토가 넓어지면서 국경선이 길어졌고, 그만큼 국경을 방어할 군 병력 수요와 재정 부담도 폭증했는데 당시 로마에게 이건 중과부적이었어
결국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두 아들이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서 각각 서방-동방 황제가 되어 통치했고,
이때부터 서로마-동로마 제국은 제 갈 길을 가게 돼
천년을 더 버틴 동로마(비잔티움)과 달리 서로마는 제국 분리 후 백년도 안 되어 476년 게르만 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망했어
아직 비잔티움이 건재했기 때문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다기보다는 로마 제국의 서방 영토를 게르만 족에게 빼앗겼다고 보는 관점도 있는 게 흥미롭더라고...
아무튼 이후 로마 제국의 정통성은 비잔티움이 계승했고, 서로마 영토는 크고 작은 도시 공동체 등으로 분열했다가 게르만 족이 세운 프랑크 왕국이 들어섰어
프랑크 왕국은 카롤루스 1세(프랑스어로 '샤를마뉴'라고도 부르는 그 사람이야!)의 정복 사업으로 지금의 프랑스-독일-이탈리아를 아우르게 되었고,
당시 로마 교황이던 레오 3세는 카롤루스를 '서로마 황제의 적법한 후계자'로 인정하면서 신성로마황제라는 새 명함을 파 줬어
신성로마제국은 이름이 민망할 정도로 왕조의 혈연이나 법, 문화 등 그 어떤 점에서도 서로마 제국과 직접적 관련이 없어
무엇보다 당시 기독교 세계의 지배자는 당대 현존하는 유일한 황제이자 진짜 로마의 계승자인 비잔티움 황제라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었는데
교황이 무슨 권리로 이민족 왕을 서로마의 후계자로 운운하냐고 비잔티움에서는 난리가 났지;;
게다가 신성로마제국은 사실 영토 위에 실재하는 게 아닌 일종의 관념 국가였고, 신성로마황제위도 실권 없는 명예직이었어
그럼에도 카롤루스의 황제 대관은 유럽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데, 왜냐하면 이걸 계기로 1) 한낱(?) 이민족 왕인 카롤루스는 서로마 황제의 후계자로서
서로마의 최고 권력을 계승했고, 이로써 일반 군주 이상의 존재에 걸맞는 우월한 권위와 위상을 인정받게 됐거든
그리고 2) 로마 가톨릭은 비잔티움의 영향력에서 독립을 주장할 수 있게 된 데다 황제에게 정통성을 부여하는 종교적 역할을 수행할 시초를 갖게 된 거잖아?
신성로마황제는 제후들이 선거로 뽑는 선출직이었는데, 선거에서 뽑았다고 해도 교황의 인가를 받아야 찐 황제로 인정받았으니까 유럽인의 의식에
교황의 영적 권위와 영향력에 대한 평가가 자연히 같이 올라갔겠지?
(단 이때 신성로마제국이 시작된 건 아니야. 962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교황에게 황제 대관을 받은 때를 제국의 시작으로 보는 게 정설이야)
이런 배경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은 로마 가톨릭과는 불가분리 관계였어
신성로마황제는 독일 국왕인 동시에 (명목상)로마 황제이자 유럽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를 겸하는 자리였고,
가톨릭은 제국이 중부 유럽의 크고 작은 제후국을 제국의 틀에 묶어두는 강력하고 유일한 구심점으로 작용했어. 이쯤이면 상호 보완 관계였다고 봐도 되겠지?
주의할 점은 제국과 가톨릭이 항상 우호적이지는 않았다는 거야
황제권과 교황권이 치열하게 다퉈온 역사(독일 왕국의 서임권 투쟁이나 카노사의 굴욕 등등)가 중세 내내 반복되었다는 것도 같이 알아두면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독일 역사 뿐 아니라 밀라노, 피렌체 등 중세 이탈리아 북부 도시 국가들의 역사까지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줄테니
이런 분위기, 이런 관계가 형성되었다 정도는 기억하면 좋겠어
2. 유럽 종교 갈등과 30년 전쟁
그런데 1618년이 되면 말 그대로 전 유럽이 30년동안 피 터지게 싸운 '30년 전쟁'이 발발해
이걸 이해하려면 또 신성로마제국 내 독일 영토 상황과 종교개혁 운동을 알아봐야 해;;;
(30년 전쟁 때 유럽 지도야. 빨간 테두리가 신성로마제국 국경선)
신성로마제국의 중추는 중부 유럽에 위치한 지금의 독일 영토, 즉 독일 왕국이었어(오토 1세가 독일 왕이었으니 당연...)
여기서 문득 든 생각이, 황제 타이틀을 마다않고 받았던 건 그만큼 독일 왕이 허울 뿐이라고 해도 '황제'의 권위를 필요로 하는 상황을 방증하는 것 아닐까 하는 거야
지금 우리는 독일을 하나의 국가로 인식하지만 이때만 해도 단일 국가로서의 독일, 그 국민으로서의 독일인은 존재하지 않았어
'독일(Germany)'은 중부 유럽의 독일어권 제후국, 자유도시와 게르만 족을 뜻하는 느슨한 관념에 불과했고
실제 이 지역은 강력한 중앙 권력 없이 여러 봉건적 제후국이 공존하고 있을 뿐이었어
그러니까 우리가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는 건 의식에 희미하게 남아있는데 국가나 민족 단위에서의 결속력은 없이 각자도생하고 있는 분위기였다고 할까?
주변의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이 비교적 빨리 중앙집권 체제로 들어간 것과는 대조적이지
독일 영토에 자리하던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왕들은 가신이었던 공작과 백작에게 각 지역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위임해서 지방으로 내려보냈고,
귀족들은 국왕에게 하사받은 봉토를 경영하면서 국왕이 부르면 군사를 동원해서 외적과 싸웠어
이렇게 토지를 통해 주종 관계가 형성된 사회 체제를 봉건제라고 한다는 건 다들 들어봤을 거야
문제는 중앙 권력에 해당하는 왕조가 남계 후손의 단절을 여러 번 겪으면서 힘이 많이 약해졌다는 거였어
국왕이자 황제의 지위가 꾸준히 약해지는 사이 지방 제후들은 자신들의 영지에서 힘을 키우면서 독립성을 강화해 나갔고,
오토 1세 대에 와서는 신성로마황제라는 중앙 권력 하에 제후들을 두려고 하는 오토 1세의 시도와, 제후들의 끈질긴 반발이 반복되었어
(= 황제 타이틀이 있어도 제후들을 완전히 제압하기 힘들었다는 거지...;)
그 결과로서 여러 제후들이 각 공국의 군주로서 통치권을 나누어 갖는 지방분권적 정치 구조도 갈수록 견고해졌어
이런 지방분권적 정치-사회 구조는 1871년 프로이센 왕국이 독일을 통일해서 독일 제국이 성립될 때까지 이어졌는데,
여담이지만 지금 독일의 공식 국호가 '독일 연방 공화국'인 거 혹시 알아?
독일은 각 주 정부가 행정-사법권을 가진 여러 주의 연방 체제로 구성되어있는데(마치likeUSA) 중세부터 19세기까지 여러 제후국으로 분열한 채 존속한 데서
독일 특유의 지방분권 구조와 지방색이 강한 문화의 기원을 찾을 수 있어
아무튼, 그래도 수많은 독일어권 제후국, 교회령, 자유 도시들을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두는 데는 앞서 말한 대로
가톨릭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힘이 컸는데 바로 16세기 초 종교개혁 운동이 그 이데올로기를 터뜨리기 시작해;
종교개혁 운동이랑 루터의 이름은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거야
천년 넘게 존속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이런저런 조건(일일이 다 말할 수가 없어... 일단 넘어가자ㅠ)이 갖춰진 16세기에
루터, 츠빙글리, 칼뱅 같은 개혁적 신학자들이 등장해서 교황의 신앙적 권위와 성경에 대한 독점적 해석권을 부정했고,
이들이 주장하는 교리에 따라 유럽 각지에서 오늘날 우리가 '개신교'라고 통칭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나타났어
프로테스탄트도 루터파, 칼뱅파 등으로 세분화되는데 일단 같은 '신교'로 묶어서 부를게
이런 현상을 신성로마제국과 가톨릭이 가만 두고 보지는 않았겠지?
신성로마제국은 앞서 말한 대로 실질적인 정부나 권력 중심을 가진 단일 제국으로 실재한 게 아니라
중부 유럽 - 독일, 네덜란드, 보헤미아, 스위스 등 - 에 분포한 수백 개 영방 국가와 자유도시의 모임에 가까워
제국이라고는 해도 황제권이 약해진 지 오래였고, 사실상 제후-황제-교황의 3중 상호 견제로 운영되면서 가톨릭을 구심점 삼은 일종의 연방이었는데
가톨릭 대신 신교로 개종하는 구성국이 늘어나면서 종교 개종은 단순히 종교적 이견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 보수 세력(제국 유지, 가톨릭 이념 고수)과 구성국(제국으로부터의 독립, 신교 개종의 자유) 간의 전쟁으로 번지게 돼. 이게 30년 전쟁이야
종교 갈등이 발단이 됐지만 정치 등 현실 문제가 겹쳤고, 여기에 프랑스나 북유럽 신교 국가인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등이 끼어들면서
이 전쟁은 종교만이 아니라 정치와 영토를 걸고 전 유럽이 싸움판에 휘말린 국제 전쟁으로 비화돼
이쯤에서 프랑스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어
당시 프랑스는 루이 13세의 재상이자 추기경이었던 리슐리외(그 삼총사의 빌런... 알지?)가 실권자로서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리슐리외는 본인은 가톨릭 성직자이고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인데도 신교 연합 편에 섰어
왜냐하면 리슐리외 눈에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가 더 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꺾어놔야 하는 적이었고,
그래서 구교 연합의 핵심인 신성로마제국이 승리해서 제국의 결속이 공고해지는 가운데 독일어권이 단결하는 일,
신성로마황제 가문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일부+크로아티아 왕국+보헤미아 왕국)의 통치 가문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일만큼은 막으려고 했던 거야
리슐리외는 "독일어권이 통일되면 좋을 게 없다"는 정세 판단 끝에 종교와 상관없이 프랑스의 국익을 우선하는 결정(프랑스의 신교 연합 합류)을 내렸어
리슐리외의 이런 국제정치 현실 인식과 가치관은 'raison d’état(국가 이유=국익)'라는 단어에 집약되어서 지금도 국제정치학에서 언급되고 있어
한 마디로 리슐리외는 "국익이라는 큰 목적이 통치자나 통치 가문의 이익이나, 법-도덕-종교보다 우위에 있으며, 국가 정책은 그 목적 실현을 최우선 목표로 두고
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데, 이게 30년 전쟁과 리슐리외의 특이점인 것 같아
그때까지 종교는 국경과 민족을 불문하고 유럽인의 삶과 정신을 관통하는 유일한 이념이었어
그런데 이때가 되면 종교가 아닌 '국가 이익'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동기가 국가 정책의 기준이자 지향점이 되었고,
그런 변화가 30년 전쟁과 헤종 데따에 반영되어 있는 거야. 확실히 신앙 중심이던 중세와는 다른 부분이지?
3. 베스트팔렌 조약과 세력 균형
죽어라 물고 뜯다 보니 30년이나 지났더라... 그런데도 전쟁은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았어
그래서 참전국들은 1643년부터 종전 협상을 시작했고 그 결과 1648년 베스트팔렌 지방(지금의 독일 서부)의 두 도시,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 두 건의 평화조약을 체결했어
이 일련의 조약을 '베스트팔렌 조약'이라고 통칭해
이해 당사자가 워낙 많고 이해 관계도 복잡해서 뭐 합의된 게 엄청 많은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과 의의를 정리해 보자면 이렇게 돼
1) 루터파를 정식 기독교파로 인정하며, '영주민은 영주의 종교를 따른다'고 인정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재차 확인하며, 칼뱅파에게 루터파와 동등한 권리를 인정한다
→ 종교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 = 더 이상 하나의 종교 이데올로기로 유럽 전체의 질서를 유지할 수 없음
= 군주가 자신의 통치 영역의 종교를 결정한다 = 세속 군주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적 우위 NO 인정, 신성로마제국이 가톨릭이라는 종교 강요할 수 없음
2) 신성로마제국의 영방 제후들은 영토에 대한 완전한 주권, 외교권, 조약 체결권을 갖는다
→ 신성로마제국의 사실상 해체, 300여개 영방 국가와 자유도시의 독립 = '군주가 자기 영역의 지배자이고 상위 존재는 없다' = 1국가 1주권 원칙, 주권의 배타성 원칙 성립
3) 네덜란드는 스페인 합스부르크로부터, 스위스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로부터 독립한다
→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영토 상실
4) 프랑스는 알자스 중남부를 획득하고 메스,투르,베르됭 주교령의 영유권을 인정받는다 → 프랑스 영토 확장 성공
5) 브란덴부르크는 힌터포메른을 얻고, 바이에른과 작센 역시 영토를 조금씩 획득한다 → 제국 영방이었던 브란덴부르크와 바이에른의 국력 성장
6) 베스트팔렌 조약에 대한 반대나 거부는 어느 누가 표명하든지 간에 모두 백지화, 무효화한다
→ 독일 문제에 로마 교황의 개입 가능성 원천 봉쇄
이 중 특히 1,2번에 따라 국가의 자기결정권으로서 '주권' 개념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았고,
모든 국가의 주권은 (현실적인 국력 차이와 상관없이) 대등한 관계라는 원칙도 같이 뿌리내리기 시작했어
이런 개념과 원칙은 그 전까지는 없거나 무척 희미했기 때문에 베스트팔렌 조약은 현대의 주권 개념이 도입된 최초의 조약이기도 해
각 국가의 주권이 모두 대등한 관계이고 상위 권력이 없다는 건, 이제 국제 사회는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 돌입했다는 뜻이기도 해
이건 이제 각 국가는 국가의 생존이라는 현실적인 국익을 최고 정책 목표로 삼아 철저하게 그걸 기준으로 움직인다는 뜻이야
그리고 이때부터는 (A)지금의 평화 상태를 붕괴시킬 수 있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세력이나 국가가 출현하지 못하게 하는 걸 각국 외교 정책의 핵심 목표로 삼게 됐어
그리고 그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유럽이 선택한 방식은 국가 간 공조를 통한 세력 균형 실현이었어
다시 말해 이제 유럽은 어느 특정 강대국이 대륙의 패권을 잡지 못하도록 고만고만한 힘을 가진 여러 나라의 공존 상태에 돌입하며,
혹시 그 중에서도 좀 튀어보려는 나라가 나오면 다같이 뭉쳐서 두드려 패는 방식으로 자신들만의 리바이어던 '체제'를 만들기로 한 거야
실제 30년 전쟁의 결과 그때까지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이 국력을 크게 잃고 기세가 꺾인 반면
프랑스랑 브란덴부르크, 바이에른이 치고 올라오면서 유럽에는 엇비슷한 힘을 가진 국가들 간의 힘의 균형 상태가 성립되었어
그리고 (A)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 상태를 지키기 위해 여러 나라가 협조해서 공동 대응하는 게 유럽의 외교안보 기제로 자리잡기 시작했는데
평화를 위한 공조 체제라는 유럽 특유의 국제질서 원칙은 지금까지도 유효해
지금의 유럽 연합을 만들어 낸 유럽 통합은 나치 독일처럼 깽판치는 국가가 다시 나타나지 않게, 경제 협력이라는 틀 안에서 독일 문제를 다루려는 시도가 그 초석이 됐거든
다만 이때도 '세력 균형'이 조약 형식으로 명문화된 건 아니고,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아
4. 18세기 세력 균형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세력 균형이 유럽의 국제질서 원칙으로 등장했지만 현실에서는 패권을 쥐려고 하거나 팽창 정책을 펴는 국가가 나타났어
18세기 전반기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가 전자에, 후반기 프리드리히 2세 때의 프로이센 왕국(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통합으로 등장)이 후자에 해당해
그렇지만 둘 다 강대국이 되었을지언정 완전히 전 유럽을 지배하는 패권 국가까지는 되지 못했어
프랑스의 경우 30년 전쟁 이후 잊을 만 하면 전쟁을 일으켜서 당대 최강국으로 거듭나려고 했지만 번번이 세력 균형 원칙 앞에 좌절했는데
그 첫 번째 예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들 수 있을 것 같아
1700년 스페인 왕 카를로스 2세가 자식 없이 죽으면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남계 후손이 대가 끊기는 일이 생겼어
그래서 모계 쪽으로 스페인 왕실 후손인 앙주 공작(루이 14세의 둘째 손자)과 카를 대공(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차남)이
스페인 왕위 후보 최후의 2인으로 떠올랐고, 곧 프랑스-스페인 연합 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영국-네덜란드 연합 전선이 만들어져 13년간의 전쟁이 시작됐어
이 전쟁에는 이해 관계에 따라 나폴리, 시칠리아, 포르투갈, 사보이아, 헝가리, 바이에른 등 온갖 나라가 각 연합에 합류했는데
프랑스-오스트리아의 문제였을 스페인 왕위 계승이 이렇게까지 판이 커진 건 루이 14세의 야욕이 근본적인 원인으로 꼽혀
루이 14세는 안 그래도 영토 때문에 의미없는 전쟁을 여러 번 일으킨 전적이 있었는데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에서는 두 왕국을 혈연으로 묶어서
영토를 확장하고 프랑스를 유럽 최강대국으로 키우려는 의도가 너무 빤히 보였던 거야. 그래서 그걸 경계한 안티 프랑스 동맹이 빠르게 형성된 거지
여기서는 영국이 Anti 프랑스-스페인 동맹에 합류해서 적극적으로 프랑스의 팽창을 막으려고 했다는 점을 눈여겨 봐야 해
영국은 전통적으로 유럽 대륙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대륙에서 어떤 나라가 강대국으로 뜬다 싶으면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패권국 출현을 막아왔어
왜냐하면 영국은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아메리카, 인도 등 해외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리는 해상 강국이었는데
영국이 본토 걱정 없이 바다로 나아가려면 후방에 해당하는 유럽에서 영국을 위협할 만한 패권국이 나타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거든ㅋ
그래서 프랑스가 조금 커질 것 같으니까 바로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프랑스 뚜까 패기에 나섰던 거야
그러니까, 굳이 상대가 프랑스가 아니어도 누구든 유럽에서 끗발 좀 날릴 것 같다 싶으면 더 커지기 전에 누르려고 하는 나라가 영국...
근데 하필 상대가 프랑스라 프랑스 담당 일진이 되어버린 그런...거지
한 세기 후 등장한 나폴레옹을 영국이 못 참고 피 터지게 싸운 것도 같은 맥락에서 생긴 일이고, 19세기 러시아 제국, 20세기 나치 독일과 영국이 맞선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어
말하자면 영국은 유럽의 세력 균형에서 매번 균형을 유지하는 걸 자기들의 외교안보 기조로 삼았고, 실제 이런 기조가 먹혀들어서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에게 완패한 후로 프랑스는 대영 제국의 패권을 넘는 건 사실상 포기하고 대체로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쪽으로 영불 관계 방향을 재설정하게 돼
그렇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프랑스의 패배로 끝날 것 같았는데
오스트리아의 스페인 왕위 계승 후보였던 카를 대공이, 형의 죽음으로 합스부르크 제국 황제 카를 6세로 즉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어
스페인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에 넘어가게 되면 카를 6세 한 사람이 합스부르크 제국과 스페인 왕국을 혼자서 다스리게 되는데
카를 5세라는 전례를 기억하고 있는 유럽 다른 나라들에게 똑같은 일이 반복되어서 유럽의 균형이 무너지는 건 훨씬 위험한 일로 보였어
그래서 참전국 사이에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어서 앙주 공작을 스페인 왕으로 즉위시키는 대신
프랑스 왕이 스페인 왕을 겸하는 건 금지해서 프랑스와 스페인을 별개의 독립국으로 확실하게 나누어 놓기로 결정됐어
조약에는 "스페인과 프랑스 왕국 간의 너무 긴밀한 결합으로 인해 생긴, 전 유럽의 자유와 안전에 대한 아주 큰 위협 때문에(...)
한 사람이 두 왕국의 왕이 될 수 없다"고 명시되었는데 이건 루이 14세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한 문장으로서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도입된 세력 균형 원칙이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하나의 질서로 공고해졌다는 평가의 근거로 꼽히는 대목이기도 해
전쟁 결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페인은 모두 상당한 국력 피해를 입었지만 대신 힘의 균형을 흔들 만한 강대국이 나타날 가능성도 줄어들었어
그리고 영국은 큰 힘 들이지 않고 라이벌 국가들의 국력을 꺾어놓고는 유유히 아메리카 식민지를 향해 대서양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 프랑스는 한동안 잠잠했지만 18세기 말 다시 대형 사건이 터지는데 그게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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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야
생각나는 대로 써서 두서없이 읽히는 점 미안해ㅠ
근데 쓰면서 느낀 건데... 내가 지금 레 미즈를 읽는 건지 정치학 스터디를 하는 건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재미있긴 한데 제대로 하는 건지 모르겠다ㅠㅠ
아무튼 도움 되면 좋겠네... 즐겁고 깊이 레 미즈 읽어보자 :)
마지막으로 오늘 분량에 언급된 몇몇 이름을 간단히 설명할게
누가 어느 편인지만 알아도 상황 파악이 될 거야
-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 영국 육군 원수.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 육군 최고 지휘관. 이베리아 반도 전쟁과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무너뜨린 장본인
- 발슈타트 후작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프로이센 왕국 원수. 역시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격퇴한 당사자
...이지만 1806년 예나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대패한 흑역사 보유
- 이베리아 반도 전쟁: 1808~1812년 스페인에서 일어난, 나폴레옹(프랑스) 대 스페인-포르투갈-영국 연합군의 전쟁.
본문 속 탈라베라, 비토리아, 살라망카는 연합군이 나폴레옹에게 승리를 거둔 이베리아 반도 전쟁의 전투를 뜻함
-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년 체코 모라비아 지역 아우스터리츠에서 벌어진 나폴레옹 전쟁의 한 전투.
나폴레옹의 천재적인 전술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을 대파해서 나폴레옹이 거둔 승리의 대명사 같은 전투가 됨
- "과감하고 결사적인 오렌지 공은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부대를 향하여 "나소! 브라운슈바이크! 절대로 후퇴하지 마라!" 하고 외쳤다."
오렌지 공: 워털루 전투에 참전했던 네덜란드 왕태자 오라녜 공 빌럼. 후에 빌럼 2세로 즉위. 워털루 전투에 네덜란드가 영국의 동맹으로 참전했고 그 군단을 지휘함
나소: '나사우'라고 읽는데 책에는 나소로 표기됐네. 현 네덜란드 왕가인 오라녜나사우 가문(House of Oranje-Nassau)은 원래 나사우 공국의 지배자였고
대대로 네덜란드 공화국 총독들을 배출하는 집안이었는데 나폴레옹한테 영지를 뺏겼다가 1815년 빈 회의에서 나사우 공국을 되찾고
당시 수장이던 빌럼 6세가 새롭게 창설된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왕위에 오르면서 네덜란드 오라녜나사우 왕가의 초대 국왕 빌럼 1세(위의 오렌지 공의 아버지)가 됐어. 한 마디로 나소 = 네덜란드 군대 의미
브라운슈바이크: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하노버 선제후국을 가리키는 듯. 왜냐하면 하노버는 원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베르크 공국이었는데 수도를 하노버로 옮기면서 하노버 공국으로 이름이 바뀌었거든...
참고로 호엔촐레른은 프로이센 왕국을 뜻함. 프로이센의 왕가가 호엔촐레른 가문이거든. 나중에 이 가문&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