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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키르케 완전완전완전 재밌게 읽었어 스포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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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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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작 <아킬레우스의 노래>에서 아들의 운명이라도 바꾸려 몸부림치던 테티스를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면,

키르케에서는 그 하급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직접적으로 삶을 나타낸 느낌을 받았어.

다만 키르케는 테티스와 달리 인간에 더 가까운 인물임
태양신과 님프가 만나 태어났음에도 형제자매 중 유일하게 인간의 목소리를 가지고 태어났고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티탄 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점이며,
신이라면 궁금해 하지도 않을, 손바닥의 상처를 직접 내는 부분들,
무엇보다 외로워하며 끊임없이 마음 둘 곳 (고향, 연인, 가족 등)을 찾아 헤매는 부분에서 지독히 인간적인 인물이란 생각이 들더라
그렇기에 키르케가 물약을 마시고 드러낸 본질이 무엇인지 묘사되지 않아도, 키르케를 끝까지 읽은 독자라면 무슨 존재가 되었을지 알 것 같아
신이어도 그는 누구보다 인간이었기에, 신이었다면 그저 지나쳐 죽어버리거나 잠시의 유희거리일 인간 개개인을 구분해 내고 마음을 줄 수 있었던 거겠지

예전에는 신이 죽음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무엇보다 죽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바뀌지도 않고, 손에 쥘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나는 평생을 전진한 끝에 지금 이 자리에 왔다. 인간의 목소리를 가졌으니 그 나머지까지 가져보자. 나는 찰랑거리는 사발을 입술에 대고 마신다. 

(All my life I have been moving forward, and now I am here. I have a mortal's voice, let me have the rest. I lift the brimming bowl to my lips and drink.) (500p.)

이러한 지점은 전작에서의 파트로클로스와 연결되기도 함
전쟁을 함께 한 전우들이지만, 영웅인 아킬레우스에게 개별 군인들은 그저 지나가는 인물들임 그래서 이름도 모르고 존재도 잘 모름 그저 자기 명성 앞에 스쳐가는 존재들일 뿐
그에 비해 파트로클로스는 그 개개인의 이름을 알고 그들을 위해 노력함

전작에 이어 오디세우스가 등장하는 만큼 당연하게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가 언급되는데, 오디세우스는 파트로클로스를 두고 이렇게 말함
'그(파트로클로스)는 별로 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선한 사람들이 전부 그랬던 것처럼요.'

아킬레우스처럼 오디세우스는 영웅이고 개인의 죽음은 지나가는 것임 

더 큰 개념 (복수, 명성 등) 을 위해 개인의 죽음은 사사로울 뿐이야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에 보인 모습만 봐도 그게 여실히 나타남

그는 복수를 이유로 청혼자들과 엮인 이들을 모두 죽이고, 그토록 원하던 고향에 돌아왔음에도 싫증을 내며 바깥을 넘보잖아
더 크고 중요한 것들이 있는데도 한낱 개인을 소중히 여기고 동정하는 모습은 신-영웅의 관점에서 나약하거나 신기하고 별난 것임
반면, 키르케나 파트로클로스 모두 그런 지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곧 인간다움, 인간 자체가 아닐까?

그렇기에 아킬레우스의 노래와 키르케를 읽으며 두 사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더라 


또한, 키르케가 그런 면모를 가지고 있기에 소설 내에서도 은은히 암시되는 것처럼 어쩌면 키르케는 자기가 사랑하고픈 인물을 덧씌워 오디세우스를 사랑한 게 아닐까?
이타카에 돌아간 이후의 모습대로였더라도 키르케가 오디세우스를 사랑했을까? 란 의문이 계속 들더라.


2.

키르케는 늘 섬 같은 존재였음
그와 사랑을 나눈 사람들은 항상 정처가 있었어
오디세우스는 이타케로,
헤르메스는 더 재미있을 법한 곳으로,
다이달로스는 아들이 있고 자유가 있는 곳으로,
초반 첫사랑이었던 어부는 권력의 곁으로,
아들은 더 많은 전설과 모험이 있는 바깥 세상으로.
키르케의 섬이 종착점이 아니며 언제나 경유지였듯 모든 연인들도 키르케를 스쳐갔고 어딘가 갈 곳이 있었음

내게 그를 차지한 권한이 없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고독한 삶을 살다보면 별들이 일년에 하루 땅을 스치고 지나가듯 아주 간혹 누군가의 영혼이 내 옆으로 지는 때가 있다. 그가 내게 그런 별자리와 같은 존재였다. (198p.)


텔레마코스는 그들과 달랐음
아버지의 죽음을 방관하고 복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타케로 돌아갈 수도 없어 

오디세우스처럼 더 먼 세계로 영웅으로써 떠나갈 수 있었는데도 아무것도 아닌 필부가 되기를 아테네에게 청하면서 갈 곳을 없애버려

그러면서 키르케에게 말해 

네가 가는 곳마다 내가 함께 하고 싶다. 어디든 갈 수 있다. 

앞선 그 선택이, 키르케의 곁이 제 종착점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을 거라고 생각하면??? 미치겠고요? 



"이것만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이 이집트에 간다면, 다른 어디든 간다면 저도 동행하고 싶다는 걸요."
두근 또 한번 두근, 그의 생명이 내 손가락 아래를 지나갔다. "고맙다." 내가 말했다. (pp.492-493)

"그걸 외우면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른다. 심지어 효과가 없을지도 모른다. 크로노스의 힘이 그 땅 바깥에서는 통하지 않을 수도 있어서."
"그럼 다시 가면 되죠. 당신이 이제 그만 됐다 싶을 때까지 다시 가면 되죠."
그렇게 간단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내가 할게요. 그렇게 당신이 행복해진다면 내가 같이 갈게요. (496p.)


키르케는 행복해지기 위해 발버둥치고 외로워하며 누군가와 사랑을, 누군가와 이별을 반복했음 

그런 키르케가 텔레마코스를 만나 행복해지는데 내가 다 과몰입돼서 눈물났음 

몸은 우리 안에 갇혔으나 마음은 끝없이 방랑하던 모습들이 생각나며 꺽꺽 키르케 행복하자


그리고 나머지는 읽으면서 든 짧은 생각들

- 오디세우스가 아킬레우스 두고 '그의 가장 큰 자랑(파트로클로스)이 죽자 실성해버렸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너무 슬펐음 그래도 내세로 가서 둘이 함께 있다고 해줘서 다행ㅠㅠㅠㅠ


- 키르케와 아들 부분에서 왜 과거에 내 모습들이 스쳐가는지 모르겠음 아들이 이렇게 사느니 아테네에게 죽겠다고 하잖아 왜 자식들은 자기 목숨을 단검처럼 휘둘러서 부모에게 상처를 낼까?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어디서 부모가 마음 아플만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알아내는 걸까. 키르케의 아들도 나처럼 어머니에게 말로 상처를 주는데 너무 슬펐어..


- 그리스 신화 반영하다보니 별 수 없었겠지 싶긴 했는데 전작에서 여성 캐릭터들 별로인 부분들 많았거든 그것과 엮이면서 주인공 캐릭터도 요상해지고... 

이번엔 그런 게 덜해서 좀 좋았음 내용이 많진 않지만 살아남으려 위악떨고 몸부림치는 파시파에며 현모양처인 척 하지만 꾀를 품고 오랫동안 때를 기다리는 페넬로페.. 그가 결국 마녀 자리 물려받는 것도 정말 좋았음 잠시 지나간 메데이아는 말로 사람 좀 줘팰 줄 알더라 고모한테 그러는 거 아니다 가시나야...


- 작가가 개설레는 게 뭔질 아는 것 같음 텔레마코스와 키르케 대화도 짜릿하게 설레서 이마빡 존나 쳤음

"너는 항상 화가 난 상대를 위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주느냐?"
"아뇨," 그가 말했다. "오로지 당신한테만 그리합니다."
밖에서 번개가 깜빡거렸다. "나도 화가 났었다." 내가 말했다. "네가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하는 줄 알았거든."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걸 아시잖습니까."
달짝지근하고 진한 밀랍의 냄새가 느껴졌다. (474p.)

야!!!! 그거 밀랍 아니고 사랑의 냄새다!!!!!!!!!
텔레마코스가 자기 안 보는 게 아테네한테 정신 팔려서라고 생각해서 묘하게 서운함 느꼈었던 키르케와 자기 표정 못 숨기니까 일부러 외면하고 딴짓하던 텔레마코스 졸라 웃겼음 나중에 배 다 부서지니까 니랑 같이 안왔음 어쩔뻔했니 하던 키르케 대사도 웃겼음 은근 츤데레걸

텔레마코스 말고도 다이달로스 부분에서도 미치는줄 몰래 후드로 얼굴 가리고 찾아와서 여신 꼬시는 명장 인간국보문화재 다이달로스씨... 그걸 또 받아들여서 짧은 시간 함께 잘 보내는 키르케 ㅠㅠ 근데 둘다 외롭고 갇힌 인물들이라서 그 마음이 너무 이해됐음 황금이더라도 우리(cage)는 우리인 이들 ㅠㅠ


- 헤르메스 캐릭터가 일반적인 신화 속 이미지와 다르게 매력있으면서도 짜증났음 서로 안 지고 핑퐁 대화 나눠서 그런지 헤르메스가 대사 칠 때마다 김은숙 작가 대사 느낌 나서 너무 웃겼음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에게 약을 먹이지 않으리라는 걸 어떻게 알아요?"
"몰라."
"그런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 있겠다는 거예요?"
"나는 위험한 일이면 뭐든 좋아하거든."
이렇게 해서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124p.)

키르케 나너 좋아하냐? 이런 느낌 진짜 서로 팽팽하니 한마디도 안짐 존잼쓰 개잼쓰



섬에서만 있는데도 심리변화가 많아 그런가 너무 재밌었어 행복하좍 키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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