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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세상에나 이게 다 번역이 되다니 나 감격했잖아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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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2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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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책더미 속에서 행복해 하는 어느 덬이 쓴 글에서 기 좀 받아 갈까 해서 찬찬히 읽다가 그만 놀래 버렸지 뭐야. 거기엔 기뿐만이 아니라 소중한 정보까지가 있었거든..
그땐 뭐랄까, 기쁜 마음이 통 진정이 되질 않아서 ㅜㅜ 일단 책부터 구해다가 다 읽고 나서 시간 좀 흘러 차분해지거든 그때 제대로 인사하자고 생각했어. 오늘이 마침 그날이지 싶네.
「카빌리의 비참」 소개해 준 덬아, 정말이지 고마워. 앞으로 도서관으로 통하는 꽃길만 걷길 바랄게!!

이 책은 카뮈가 작가로서 명성을 얻기 전(「이방인」을 발표하기 3년 전)에 진보 계열 일간지의 소장파 기자로 활동했을 무렵,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거기서도 특히나 낙후된 걸로 손꼽히던 산간벽지 카빌리 지방의 비참한 실태를 고발하는 11부작 르포 기사를 한데 묶은 거야.

내가 카빌리의 비참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노서경 교수가 쓴 「알제리 전쟁 1954-1962」를 통해서였어. 같은 전쟁이라 하더라도 병사의 전쟁, 장군의 전쟁, 정치인의 전쟁이 다 다를진대, 이 책에서는 지식인의 전쟁으로서의 알제리 전쟁을 조명하고 있어. 당연히 카뮈를 위해서도 기꺼이 한 챕터가 할애되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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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비록 「카빌리의 참상」이라 되어 있지만 같은 거야)

내가 이렇게까지 격하게 기뻐하는 이유는 이게 번역되리라 감히 기대조차 품을 수 없던 상태에서 이루어진 국내 초역이란 점에서야.

여기까지 읽고서, 김화영 교수 번역으로 책세상에서 카뮈 전집이 완간되지 않았었나? 하고 의아해 할 덬들도 있을 것 같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래. 책세상판 전집은 여러 사정이 겹치고 겹쳐 몇 권이 누락된 ‘사실상 전집’이거든..

카뮈가 기자 신분 혹은 작가의 위치에서 쓴 모든 기사며 논설은 프랑스에서 시사평론(Actuelles)이란 제목하에 총 세 권의 책으로 묶여서 나왔는데, 책세상판 카뮈 전집에 스무 번째 권으로서 포함된 '시사평론'은 이 가운데 제1 권만을 번역한 것이거든. 아래에 관련 기사 하나 붙여 둘게.

23권으로 계획됐던 전집은 한국 독자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시사평론> 2권과 3권, <알베르 카뮈·장 그르니에> 서한집을 제외시킨 채 20권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 https://m.khan.co.kr/culture/book/article/200912151758555/amp )

여기서 잠깐! 카뮈에게 있어 그르니에는 평생의 스승이자 은인인데 빼도 그걸 빼 ㅜㅜㅜㅜㅜ 할 덬들을 위해 서둘러 첨언하자면, 저 인터뷰가 있은 지 3년 후인 2012년에 「카뮈-그르니에 서한집 1932~1960」이란 제목으로 역시나 김화영 교수의 번역을 통해 책세상에서 나와 주었어. 현재로선 절판 상태지만 중고책으로 구하려거든 못 구하는 건 아니니 걱정 마.
(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0804113 )

하필이면 '한국 독자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책이 내게 있어 가장 관심 가고 목마른 한 권이란 이 상황이 처음엔 마냥 얄궂기만 하다가, 번역을 고대하는 것조차 언감생심이란 걸 가까스로 받아들이게 된 와중에 천사같은 덬의 이끎으로 인해 마침내 만날 수 있었어. 내가 역사 분야 신간은 매일같이 훑고 있는데 이 책은 일단 문학으로 분류된 탓에 그만 서치에 걸리지 않았나 봐. 마침 도서관에서도 800번대 서가에 꽂혀 있었고 말이지.

본문 뒤에 실린 번역자 후기나 불문학자 최윤 교수의 해제를 보니 '다방면에 뛰어난 이 작가를 소설이라는 프레임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없다'든지 '카뮈에게 있어서 기자 활동은 지식인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가졌던 것 같다'는 문구가 눈에 콕 박히더라. 그건 나로 하여금 자연스레 기형도 시인을 떠올리게끔 하더라구. 경력의 특이함이란 면에서, 또 각 사람의 전집을 편집하는 데 있어 작용한 자세란 점에서...

기형도 또한 1985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공식적으로 데뷔하기 전인 1984년에 중앙일보에 입사한 뒤로는, 요절하고 만 그날까지 쭉 기자로 일했더랬어. 기자와 기레기가 동의어가 아니던 그 시절의 기형도를 움직이는 힘은 카뮈와 마찬가지로 불굴의 저항 정신이었고.

기자 기형도의 기사 쓰는 스타일과 업무 보는 스타일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기사가 있길래 소개할까 해.

문화부의 막내둥이 기자가 늘 그래왔듯 기형도는 방송담당으로 문화부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그 무렵의 방송은 마치 암흑과도 같았던 제5공화국의 시녀 역을 자임하여 국민을 현혹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고, 양식 있는 젊은 기자들은 그와 같은 방송사들의 행태를 기회 있을 때마다 거세게 비판했다. 기형도는 방송사들이 두려워하는 몇몇 방송기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날카로운 방송 비판기사가 나가기만 하면 방송사의 고위층은 신문 쪽의 간부들에게 거칠게 항의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상사들로부터 곤욕을 치러야 하는 내(=정규웅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형도의 필봉은 갈수록 예리해졌고 나는 그의 방패막이 노릇에 급급해야 했다. 훨씬 후의 일이지만, 이것이 결국 그가 갈망했던 문화부 기자 생활을 만 2년쯤에서 막을 내리게 했으니 자승자박이라고나 해야 할는지.
(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08298/1 )
(혹시라도 오해할 수 있겠다 싶어 부연하자면, 이건 기형도를 향한 타박이나 힐난이 절대 아니야. 되려 후배를 아끼는 만큼 더 안쓰러워하는 선배 맘의 발로라는 걸 전문을 본다면 알 수 있을 거야)

다른 기사를 하나만 더.

1986년 11월 18일. MBC 드라마 '전원일기'의 '배추편' 방송이 갑자기 취소된다. 배추값 폭락을 다룬 내용이 당국의 비위를 거슬렀기 때문이다. 당시 사건을 보도한 19일자 중앙일보 기사의 마지막 구절이다.
'대취한 일용은 “양파를 심으면 양파값이, 배추를 심으면 배추값이 폭락하니 나는 땅과 인연이 없다. 땅을 버리겠다”며 울면서 춤을 춘다. 다음날 아침 술이 깬 일용의 뺨에 누군가 뽀뽀를 한다. 아빠를 찾으러온 딸 복길이다. 일용은 복길을 안고 집으로 향한다. 그래도 여기는 우리의 땅이다. 자식들은 흙의 희망이다. 우리는 고향을 떠날 수 없다.'
20년 전 기사인데도 요즘 기사처럼 생생하다. 기사는 소위 기사체가 아니다. 6하 원칙은 깨졌고 객관적 보도는 무너졌다. 문장은 짧고 주장은 명료하다. 자식들이 흙의 희망이라니! 한 줄 기사가 아니라 한 수 시였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름은, 기형도. 입사한 지 2년 갓 넘은 신참이었다. 기자가 시인인 줄 몰랐던 독자들은 이 통렬한 기사에 환호했다. 편집국에선 금기를 깬 기사란 평이 잇따랐다.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28092#home )

그런데도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기형도 전집(이라고는 해도 단권이야) 맨 앞에 실린 '편집자의 말'에는 '기사는 기형도 시인이 쓴 글이긴 하지만 특정 신문사에 소속된 직업인으로 목적을 갖고 씌여졌다는 이유로 논의 끝에 제외했다'고 적혀 있어서 넘나 야박시럽게 느껴졌던 것..
영원히 늙지 않는 문청으로서 박제하려는 욕심에서였다면 차라리 다행이겠고, 중앙일보측과 기사 저작권 문제를 매듭짓기가 버거웠던 탓이라면 뭐 그런가 보다 할 것 같은데, 행여나 ‘그냥 다 귀찮아서’가 원인이라면(신문기사를 싣는다면 기사문만 덜렁 기재해서는 안 되겠고 앞뒤 사정까지 차근차근 해설하는 것이 필수일 테니) 나 너무 슬퍼질 듯 ㅜㅜ

카뮈의 팩트에 기반한 힘 있는 목소리를 수려한 한국어로 옮기니까 요새 르포 기사 보는 것처럼 페이지 확확 넘어가더라.
「알제리 전쟁 1954-1962」 129~130쪽에 실린 발췌 인용문이랑, 같은 내용을 다룬 「카빌리의 비참」 23~24쪽, 26~27쪽을 견주어 본다면, 이 얼마나 물 흘러가는 듯한 번역인지 충분히 와닿을 거라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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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와중에 아주아주 쪼금 아쉬운 부분도 있었으니 117쪽에 실린 문단이 딱 그랬어.
왜 결론이 '유럽 착유업자들의 작업 실정-현재의 방식으론 맛이 떨어지는 기름밖에 나오지 않는-을 고려하면 품질은 향상될 수밖에 없다'로 나는 건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더라구.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서 고민한 끝에 '기존의 올리브 생산량만으론 부족한 가운데, 여기서 최대한 많은 양의 기름을 뽑아 낼 수 있는 방식이 있긴 한데 다만 기름 맛이 별로란 게 단점이다. 그렇지만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릴 수만 있다면 굳이 이런 방식을 쓰지 않더라도, 기름 맛을 해치지 않는 통상적인 방식으로 기름을 뽑으면 충분할 것이다'로 이해하고 넘어갔는데 과연 이게 맞는지 도통 자신이 없네..

그리고 저 ‘산도’라는 용어도 그래. 이게 과연 산화도를 뜻하는 건지 산성도를 뜻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단 점이 찜찜하더라구. 내 느낌에는 산화도 같긴 한데 막상 국어사전에서 ‘산도’를 찾아 보니까 산성도로서의 뜻만 나와 있지 산화도에 대해서는 아예 없던걸. 결론은.. 문송합니다아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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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건 내가 읽으면서 가장 마음이 울렸던 대목.
근 백 년 전에 의도적으로 교육으로부터 소외당한 이들에게도 또렷했던 절절함이, 기형도의 나라에선 대명천지 21세기임에도 대체 와이?


이 책의 존재를 운명처럼 내게 일깨워 준 덬에게 다시 한번 감사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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