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 책에 대해서 하고싶던 얘기는 신선하다는 거였어. 책 판형이 가로가 짧은 편이라 스마트폰에서 읽는 것 같은 느낌이 신선했고, 작가가 90년생이라 그런지 몰라도 주인공이 데이트 할 때 보는 영화가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라는 점이 신선했어.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까 조금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 거 같더라고.
신비한 분위기를 만드는 장치
<얼굴 없는 딸들>에서는 주인공이 이웃에 사는 경진이랑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이 두 번 나와. 한 번은 ‘멜론 맛 아이스크림’을 먹고 또 한 번은 ‘커피 맛 아이스크림을 둘로 나눠’ 먹어. 멜론 맛 아이스크림은 그렇다고 쳐도 둘로 나눠 먹는 커피맛 아이스크림은 당연히 ‘더위사냥’이잖아? 그런데 왜 메로나를 메로나라 부르지 않고 더위사냥을 더위사냥이라 부르지 않을까.
어떤 서사가 현실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핍진성이라고 해(박상영 소설을 떠올려봐). 이 책에서는 반대로 현실 같은 느낌을 주지 않으려는 거지.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어딘가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딘가 다른 세계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한 장치라는 거야.
한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면 <셋>에서 주인공은 친구 ‘해리’와 ‘연희’와 함께 P시로 여행을 가기로 해. 그런데 야경이 유명한 도시인 P시는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10시간이나 가야한다는 설정이야. 물론 여기 나오는 인물들이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같은 대륙에 살고 있을 수도 있지만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기 위한 설정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지?
<노크>에서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나에게 줄 게 있다는 모르는 여자와의 통화가 잡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 것이나, <얼굴 없는 딸들>에서 나와 엄마가 탄 이삿짐 트럭 운전기사의 손가락이 여섯개인 것도 이 책을 신비하고 서늘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소재들이야.
일상에 도사리는 신비
소설 속에서 어떤 상징이나 장치로 기능하진 않지만 작가가 일상 속에서도 늘 신비로운 순간을 관찰하고 있구나 하고 알게 해주는 장면들도 있어.
<조커>에서 주인공이 있는 카페는 2호선 역에서도 올 수 있고 3호선 역에서도 올 수가 있어. 그런데 어느 출구로 나오는지에 따라 여기까지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지는 거야. 2호선 역으로 나오면 번화가를 지나 조금만 걸어오면 되는데 3호선 역으로 나오면 주택가만 즐비한 얕은 언덕이라 길고 지루해. 같은 장소지만 어느 출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장소가 되는 거지. 무슨 느낌인지 알겠어?
또 <조커>에 나오는 여자의 이름은 성경이야. 어릴 때 몸이 아파서 개명을 했어. 몸이 아프거나 사고를 자주 당한다는 이유로 개명한 친구가 주변에 하나 쯤은 있지 않아? 다른 이름과 다른 운명을 갖게 되었지만 본질적으로 그 사람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이렇게 일상 속에서 무심코 지나갈 수 있는 신비로운 순간들을 포착하고 있는거야.
그럼 이 작품의 제목은 왜 조커일까? 트럼프 카드는 1(A)에서 13(K)까지 4개의 문양으로 총 52장의 카드가 있어. 이것들을 섞으면 무수히 많은 경우의 조합이 나오게 되지. 그런데 만약 조커를 한 장 넣으면 어떻게 될까. 원래는 내게 와야 할 카드가 조커에 순서가 밀려서 상대에게 가게 돼. 숫자와 문양을 조합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조커가 이번 게임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거지.
운명의 반대편
운명이라는 건 존재할까? 우리는 매순간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운명이란 게 정말 존재한다면 우리가 삶의 기로에서 내리는 선택은 우리의 의지가 아닌걸까? 이런 얘기가 너무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것 같다면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해보자.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이 우주는 3차원이라는 공간에 시간이라는 축을 더한 4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대. 무슨 뜻이냐면 시간은 흘러가는(변화하는)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시간 축을 우리가 3차원의 ‘현재’라는 단면으로만 볼 수 있다는거지. 그러니까 미래는 앞으로 다가올,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지만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거야(혹시 좀 더 이해해보고 싶으면 아래 영상을 보는 걸 추천할게).
우주가 빅뱅이라는 큰 폭발로 시작되었다고 하잖아. 그럼 그 폭발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그 폭발을 일으켰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을까? 과학이 우주에 대해 더 많이 밝혀낼수록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점점 그럴싸해진다는 아이러니가 정말 재밌는 거 같아.
운명에 대해서 조금만 더 얘기해보자. 우리 삶의 시작과 끝을 잇는 선이 운명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꼭 하나일 필요는 없어. 예를 들어 X, Y축에서 점 A에서 B까지의 가장 짧은 거리는 하나 뿐이지만 가장 짧은이라는 조건을 제외한다면? 시작과 끝은 정해져있지만 그 과정은 어떠한 선택도 허용하는 게 아닐까. Z축이라는 깊이를 더해보면 더 무수히 많은 선택지가 있을 수 있겠지? 다시 말해서 운명이라는 게 존재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매순간 모든 선택이 다 정해져있다는 뜻은 아닐지도 몰라. 그렇다면 어떤 계기(조커)로 인해 우리의 운명이 바뀌었을 때 원래 우리가 갈 예정이었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분량 조절 실패로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