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en Day, ‘Last Night on Earth’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아니라, 아닌 밤중에 삼성동이라고, 이우연은 생각했다.
‘우연 씨, 저…….’
‘이우연 씨와 같이 전광판 광고를 보러 가고 싶다’. 얼마 전 지하철역 내부 통행로에 크게 게재되었던 헌정 광고가 당초 공지된 일정보다 빨리 내려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팬카페에서 접하고 안절부절못하던 인섭이 조심스럽게 부탁을 해온 것이다. 마뜩잖다는 기색을 한껏 내보이며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자 심약한 연인은 금세 의기소침해졌다. 분위기를 기민하게 눈치챈 듯한 존이 인섭의 발치로 다가와 애교스레 머리를 부벼댔다.
‘죄송해요. 우연 씨는 그런 데 가는 거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데……. 그냥 저 혼자서 보고 오겠습니다. 집에서 멀지도 않고, 잠깐이면 돼요. 금방이에요.’
‘인섭 씨.’
‘네.’
‘듣자 하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그렇게 예쁘게 해요. 지금이 몇 신 줄 알아요? 이 야심한 시각에 유부남이 혼자 어딜 돌아다녀. 인섭 씨 유부남이잖아. 아니에요?’
반지를 낀 왼손 손등을 보란 듯이 내보이며 늘 그렇듯 무논리로 대응하자 인섭이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게 하다못해 한숨 쉬는 것도 좆같이 귀여워서는. 씨발.
‘유부남 맞습니다. 압니다. 유부남인 거.’
‘알면서 그래요? 난 또, 까맣게 잊어버린 줄 알았네.’
‘…….’
‘이리 와요. 오밤중에 밖에 돌아다닐 시간 있으면 섹스나 합시다. 잠자리도 남편으로서 성실히 이행해야 하는 의무 중 하나인 거 알죠.’
‘정말 잠깐이면 되는…….’
‘안 돼. 잠깐이고 나발이고 너 없이 있는 거 단 1초도 싫어.’
‘우연 씨…….’
‘…….’
‘…….’
‘하아……, 정말…….’
인섭은 때때로 좀처럼 꺾기 힘들 정도로 고집을 부리곤 했다. 오늘이 그랬다. 끝끝내 허락하지 않으면 야음을 틈타 기어코 몰래 나가기라도 할 기세였던 것이다. 그런 인섭에게 못 이기는 척 져주는 일도 이우연의 큰 기쁨 중 하나라는 것을 인섭은 과연 알까 몰랐다.
‘……알았어요. 알겠으니까 같이 가.’
그리하여, 유동 인구가 거의 없는 심야임에도 마치 암행하듯 나온 참이었다. 커다란 후드를 뒤집어쓴 채 슬릿이 깊은 검은색 로브 코트를 걸친 이우연과, 그런 이우연의 손길로 다소 과하다 싶게 중무장한 인섭이 전광판 앞에 나란히 섰다.
“이게 그렇게 보고 싶었어요?”
“네.”
이우연으로서는 감흥 따위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전광판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인섭이 곧 눈을 맞추며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발긋하게 상기된 뺨과 곱게 휘어지는 커다란 눈, 작은 목소리로 온순하게 대답하며 부끄러워하는 기색마저도 그저 좆같이 사랑스러울 따름이었다.
“옆에 이렇게 실물 버젓이 놔두고?”
이우연이 기다란 검지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인섭에게 물었다. 실물도 아니고, 인쇄된 광고판을 보러 굳이 시간을 할애하는 행위를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인섭의 청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인섭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 아니라 정말 죽을 수도 있었으므로.
“저게 좋아요, 내가 좋아요.”
“…….”
“대답 못 하네. 전광판 속에 들어가서 저 새끼랑 살림이라도 차릴 거예요? 나 버리고?”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리고 저 이미지도 어차피 똑같은 이우연 씨인데…….”
“무슨 부연이 그렇게 길어. 그래서 누가 더 좋으냐니까.”
“그게…….”
무엇 때문인지 잠시 머뭇거리던 인섭이 이내 작은 입술을 달싹이며 수줍게 말을 꺼냈다.
“실은…… 이 광고,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본 이우연 씨 광고였습니다.”
“…….”
“그날 무척 추웠거든요. 그런데…… 추운 줄도 모르고 한참을 같은 자리에 서서 봤었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나요.”
“…….”
“우연 씨 얼굴에서 꼭 빛이 나는 것 같았어요.”
“…….”
“그땐 너무 멀었었는데…….”
지난 기억을 더듬는 인섭의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말갛고 무결했다. 아, 너는 어쩌면 이다지도…….
“지금은 매일매일 우연 씨가 제 옆에 있는 게…… 너무 신기하고…… 가슴이 터질 것처럼 행복해서…….”
“…….”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었어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이우연이 등뒤에서 인섭을 한껏 감싸 안으며 동글동글한 가마가 있는 작은 머리통에 턱을 얹었다. 인섭이 아직 갓난아기였을 때, 숨을 쉴 때마다 팔딱팔딱 뛰는 숫구멍이 있었을 자리. 정수리가 채 굳지도 않았을 아기를 버려야만 했던 부모는 어떤 사람들일까. 이우연은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착해빠진 인섭은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지만, 자신은 결코 그럴 수 없었다.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다만 다시는 인섭을 홀로 외롭지 않게 하리라. 그것만은 확언할 수 있었다. 인섭의 가느다란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애틋했다.
“……그까짓 광고판이 뭐라고 추운 데서 한참씩이나 보고 있었어요. 몸도 약한 사람이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려고.”
“감기 안 걸렸어요. 추운 것도 못 느꼈습니다. 속상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도 싫어. 다시는 그러지 마. 그럴 일도 없겠지만.”
“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약속할게요.”
“아프면 안 돼. 약속.”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고 엄지를 맞대어 도장도 꾹 눌러 찍었다. 작게 소리 내어 웃은 인섭이 살포시 몸을 기대어온다. 어린 새의 날갯짓 같은 그 미약한 몸짓만으로도 외투 속 인섭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듯한 충만감을 느끼며, 이우연은 인섭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우연 씨.”
“응.”
“같이 보러 와주셔서 감사해요.”
“말로만.”
사위는 고요했다. 오가는 사람 하나 없이, 마치 유령도시에 폐허로 남겨진 역사(驛舍)처럼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특유의 조심성으로 이쪽저쪽을 신중하게 살핀 인섭이 발돋움을 했다.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낮춘 이우연의 입술 위로 이내 부드럽고 폭신한 입술이 살포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공공장소에서 이래도 되는 거예요? 명색이 배우인데 공연음란죄로 잡혀가면 어떡해요, 나.”
“우연 씨 절대 잡혀가지 않으세요. 저만 잡혀갈게요. 우연 씨는 제가 보호해드리겠습니다. 얼굴도 가려드리고요.”
“인섭아.”
겁 많고 소심한 내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대책 없이 용감한…… 나의 빛. 나의 숨. 모두가 외면했던 나의 고장 난 세계를 완전하게 이루는, 나의 전부.
“그럴 때는 그냥…… 유치장에 같이 들어가주겠다고 하는 거야.”
이윽고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두 입술이 맞물렸다. 갈급하지 않은, 가만하고 정결한 입맞춤이었다. 조용히 입술만을 거듭 붙였다가 떼던 이우연이 인섭의 두 뺨을 감싸쥐고 말했다.
“사랑해.”
“…….”
“사랑해, 인섭아.”
이윽고 얇은 물막이 어린 눈동자로 이우연을 올려다본 인섭이 웃으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우연 씨.”
Keep a memory green. 전광판 속 문구가 어둔 하늘에 뜬 달처럼 환히 빛나는 어느 평범한 밤, 두 연인이 그렇게 그곳에 있었다.
내가 찍은 사진이랑 이번 삼성역 광고를 영접한 뒤의 감상을 담아본 글이라 후기 카테고리로 올리는데 혹시 적절하지 않다면 댓글로 얘기해조(´._.`)🧡 좀 더 첨언하자면 사랑의 멋짐을 모르고 기껏 하는 짓이란 게 음습한 악의로 민원이나 넣는 게 전부인 정병들이 불쌍하고...(›´-`‹ ) 인생 최대의 업적=민원 넣어서 멀쩡한 광고 내려가게 하기... 응... 추태 잘 봤읍니다...🔧🧱 정병들이 제아무리 그런들, 저곳에 있었든 없었든 나를 포함한 모든 벽돌단들이 받았을 감동은 물론이고, 그 무엇도 결코 퇴색시킬 수 없을 정도로 벅찬 경험이었다는 소감을 남기며...!
우연인섭 영사해🧡 우토님 만수무강해🧡 감람님 찬양해🧡 벽돌단 포에버🧡 (+) 아코 열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