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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퀘어 농구) [펌] 후추닷컴 명예의 전당 - 허재 (上-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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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2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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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후추 얘기 썼던 덬인데 ㅋㅋㅋㅋ 이거까지만 자표하고 그만할께.


후추랑 허재로 검색해 보니, 여기저기 퍼져서 남은 글들 있길래 가져와 봄.


퍼 온 글 링크는 아래


https://m.cafe.daum.net/ilovenba/1p8S/4283?listURI=%2Filovenba%2F1p8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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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 허재 [上] [후추닷컴]
스포츠 웹진 후추닷컴 명예의 전당 - 허재 [上]

● 후추 명예의 전당 제4호 헌액자 - 허재
● '후추가 말하는 천재’
● 한마리의 ‘다람쥐'에서 ‘스타 탄생'까지…
● REPLAY one: 1983년 6월 26일, 대통령기 고교 농구 대회
● '초록색 피가 흐르고 있는 허재'
● REPLAY two: 1998년 4월 2일 (KBL 챔피언 결정전 2차전 기아 : 현대)
● 후추 증언석 1 - '천재라 부를 수 없는 천재, 나의 후배 허재’
● 후추 증언석 2 - 나의 아들 허재 - ‘천재 만들기'
● 아직도 못다한 허재 이야기


▩ 후추 명예의 전당 제 4호 헌액자 - 허재

'농구 천재', ‘농구 9단', '농구 대통령'등의 수식어는 이제 허재에게 별 의미가 없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애칭들. 20여년 가까이 들어온 얘기다. 결국 허재를 죽인 셈이 된 그 많은 수식어들. 하지만, 그 수많은 세월동안 허재의 이름 앞에 ‘인간' 字를 붙여서 불러 준 사람은 몇 안 된다. 기껏해야, ‘인간'도 아닌 허재 정도? 왜일까? 일반 스포츠팬들이 스포츠를 즐기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모름지기 그 선수들의 환상적인 플레이를 통해서 얻는 ‘대리만족'이 아닌가 싶다. 스포츠를 보면서 ‘페어플레이 정신'을 배우고 ‘선의의 경쟁심'을 키운다는 얘기도 좋은 얘기다. 그리고 무작정 ‘즐기기'위해서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스포츠가 주는 그 예측을 불허하는 드라마틱하고도, 감동적인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잠시나마 우리 힘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될 수 없는 ‘슈퍼스타'가 되어 보기도 한다. 내가 바로, 9회말 2사 만루에서 역전 홈런을 때리는 히어로가 되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런 엄청나게 짜릿하고 중독성 짙은 이 스포츠의 ‘대리 만족감'을 그라운드에서 제공 해 주는 선수들에게 우리는 종종 ‘공인' (公人)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공인' (公人) 이란 무엇인가? ?1. 국가 또는 사회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2. 공직에 있는 사람.? 으로 사전에 표기되어 있다. 사실 이 말처럼 광범위하고 모호한 단어가 또 있을까? 가끔 연예인들이 TV에 나와서, ‘전 이젠 공인의 몸이기 때문에..' 라며 자칭 ‘공인'을 선언하는 사람들도 있다. 좋다.. 그럼 그들을 ‘공인'이라고 치자. 공무원들? 물론 ‘공인'이다. 그럼 운동 선수들은 언제, 왜 ‘공인'이 되어야 하는가? 아마도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경기에 임할 때만큼은 분명히 ‘공인'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그럼 대표팀 탈락한 선수들도 평생 ‘공인'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가? 경찰관 옷 벗고 삼겹살 집 차린, 집 앞 파출소 ‘김 순경님'도 죽을 때까지 ‘공인'? 그들이 옷 벗고 난 후에도, ‘우리가 낸 세금'으로 밥 먹고사는 ‘공인'?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공인'이고,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공직 생활' 이란 말인가? 운동 선수들에겐 그 명확한 기준이 없다. 혹시, 우리가 일반적으로 단정짓는 ‘공인'의 정의는 그저 ‘공개적으로 얼굴이 팔린 사람' 정도는 아닌가? TV에서 몇 번 얼굴 본 선수가 무슨 사고를 치면, 앞뒤 가리지 않고 그저 무작정…'저런 죽일놈.. 소위 공인이라는 놈이 하는 짓하곤..' 이건 아니었나?

연예인들이 TV에 나와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시청자 여러분, 앞으로 더 열심히 할 테니 많이 사랑해 주세요.' 이런 말을 하면서 공개적으로 ‘구애'하는 운동선수는 몇이나 될까? ‘오빠부대'의 우상인 ‘오빠들' 몇 명 정도? 우리 일방적으로 그런 운동선수를 응원하고 아껴줬음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그들이 코트 안팎에서 우리를 실망시켰을 때, 거기에 대한 화풀이로 ‘공인타령'을 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리고, 우리는 정말 그들에게 ‘아이고, 나라를 위해서 정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살고 계시는 우리 어려운 일 하시는 공인님들…' 하며 살고 있는가? 진정으로 그들에게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공인 대접'을 해 주고 사는가? 그저 씹기 좋고, 갈아 마시기 편한,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모두의 ‘소주집 안주'는 아니었나? 외국에서도 스포츠 스타를 보고, ‘ROLE MODEL' 이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사회에 모범이 되는 사람'정도로 의역할 수 있다. 그쪽 선수 대부분 이런 역할을 마다하지 않지만, 굳이 강제적으로 시킬 수 있는 부분은 절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정서 역시 꼭 ‘서양식 정서'라고 못 박아 버릴 수도 없는 문제다. ‘평양감사도 제가 싫으면 안 한다.' 라는 말은 어디 리투아니아 속담이던가…

왠 난데없는 ‘공인 타령'이냐고? 이런 여러 가지 의문 사항에 대한 우리 모두의 진솔하고 냉정한 고백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농구천재 허재'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이루어 질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질문들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맞아, 사실 그런 면도 없지 않았지' 라면, 지난 35년간 살아오면서 ‘농구 선수 허재', 그가 우리에게 잘못한 일은 별로 없다. 그는 그저 그가 살고 싶은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에게 ‘공인'이라는 가면만 뒤집어 씌워놓고, 그 누구에게보다도 더 가혹하고 집요하게 그를 무너뜨린 것은 아닌가?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여관방에서 여자 끼고 자도 OK, 와이프 몰래 ‘불륜 여행' 떠나 옷 한 벌씩 턱턱 사줘도OK, 술이 ‘떡이 되어서' 사방을 기어다니고, 벽을 타고, 택시 안에서 오바이트를 해대도 OK. 사회에 대한 책임감? ‘사회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 그 한마디로 모든 게 용서된다. 하지만, 허재는 술도 마시면 안 되고, 허재는 자기가 좋은 여자랑 데이트해도 안되고, 허재는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도 안되고, 허재는 식당에서 건 똥간에서 건 마주치는 사람들한테 무조건 친절해야 하고… 왜? ‘공인' 아니, ‘슈퍼 맨' 이어야 하니까.

이젠 제발 그만 해두자. 이젠 그만 그를 풀어주자. ‘공인이기 때문에'라는 이유는, 국회에서 매일 쌈박질이나 해대고 ‘잔대가리' 굴려대는 국회의원들에게나 적용시킴이 적합하다. ‘싸가지 없는' 허재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기자들. 기자들이야말로 ‘공인'으로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교훈을 심어 주고, 얼마나 깊은 감동을 주었단 말인가? 흔히들 말하길, ‘이 시대 운동 스타는 운동만 잘 해선 안 된다.' 라고 들 한다.

거기에 대한 후추의 반박은, ‘운동부터나 잘 해라.’이다. 이 세상에 우리 입맛에 꼭 드는 스포츠 선수는 아무도 없다. ‘이눔은 이래서 안되고, 저눔은 저래서 안되고…' 그럼 우리의 스포츠 미래를 책임져 줄 어린아이들은 도대체 누굴 꿈꾸며 따라하고 응원하면서 그들의 ‘내일'을 설계해 볼 수 있단 말인가? 결국엔 실력이다. 실력만이 스포츠 선수들을 평하는데 있어서 가장 생명력 있는 잣대가 될거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농구인 허재'는 농구 코트에서 만은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서비스'를 해왔고, 우리의 보답은 미흡했다. 아주 미흡했다.

이젠 얼마 남지않았다. 우리 평생에 그만큼 농구 잘하는 선수를 우리 눈으로 직접 볼 수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필자가 스포츠팬으로서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을 가장 후회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일본열도 속의 한국인 장훈 선수'의 3,000 안타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다는 점과 ‘메이저리그의 전설 조 디마지오'의 56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눈으로 보지 못해서이다. 10년, 그리고 20년 후에 ‘허재의 전설'을 듣고, 나와 똑같은 아쉬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모두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허재는 한국 농구를 한 단계 끌어올린 ‘개척자'다. 그전까지는 ‘듣도 보도 못한 新 농구'를 팬들 앞에 선사해서 우리들의 ‘눈높이'를 끌어 올려 주었고, 지독한 ‘농구계의 엘리트주의'를 상대로 우리 대다수 ‘비주류' 국민들과 농구인들을 대신해서 ‘대학 농구 평준화'에 기여했고, 그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에게 ‘노력'과 ‘오기'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똑똑히 가르쳐 주었다. 단지, ‘인간성 더럽다.'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매장 시키기엔 그의 농구 인생은 너무나 많은 투쟁을 경험했다. 우리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특별한 삶'을 걸어 온 허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를 ‘농구인 허재'만으로, 아니 우리와 똑같은 ‘인간 허재'만으로 그를 대해 주자. 지난 십수년 동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동료들의 ‘질투 펀치들', 심판들로부터 당해 온 ‘왕따 판정', 그리고 언론의 ‘돌팔매질' 만으로도 그의 그 ‘개같은 성격'은 모두 다 용서되어야 한다.

후추는 죄없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음주 운전' 자체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근본적으로 거만한 성격의 소유자를 두둔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농구인 허재'가 사는 법과 성격이 우리의 그것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농구인 허재'에 대한 평가가 무슨 ‘패륜아' 취급받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또, 허재보다 더 문란하고 더 오염되고 더 오만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취재 기자들의 보도에만 의존하여, 허재의 또 다른 인간적인 모습과 성격들이 완벽하게 가리어 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96년 음주 사건으로 구속되는 과정에서 일부 ‘새파랗게' 나이 어린 취재 기자들의 욕설과 모욕을 참을 때까지 참다가 결국 허재가 그들에게 날린 한마디가 있었다. ‘그래, 사진 찍어! 이 X새끼들아~' 막 범법행위를 한 인간이 내뱉는 소리치곤 건방지기 짝이 없게 들릴 수도 있다. 허재를 욕하는 사람들이나 기자들의 주장은 항상, ‘애정이 있다 보니…' 정도다.

과연 그럴까? ‘야, 야.. 허재가 쇠고랑 찼대. 이거 특종이다., 특종! 그 인간 그 잘난 척 하다가…이제 좀 정신 차리겠구만…' 하는 기자들이나 팬들은 없었을까? 입장을 바꿔서, 우리 팬들이나 기자 본인 또는 친인척이 그런 절박한 상황에 당면했을 때, 누군가 그들의 ‘남겨진 식구들'을 위해서라도 따뜻한 격려와 위로의 한 마디를 전해 준다면 당사자 입장에선 그 얼마나 눈물나도록 고맙고 더 깊은 반성의 기회가 될까? 질투인지 애정인지는 몰라도 허재에게 그렇게 후한 사람들은 없었다. 이게 바로 우리의 ‘공인 대접'이다.

앞으로도 언제 또 그는 우리를 실망시킬지 모른다.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허재는 어디선가에서 ‘한잔 꺾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손치더라도 그의 위대한 ‘농구 업적'은 평가절하 되어선 안 된다.

‘공인 허재'가 아닌, ‘농구인 허재'를 후추 명예의 전당에 헌액시킨다. 그가 그 동안 들어온 별의별 욕지거리들은 다 그가 ‘공인'이라고 생각한 사람들 (‘공인 대접'은 둘째치고)의 입에서 나온 소리들이지만, 후추는 그를 오랫동안 ‘공인'이라기 보다는 ‘농구 선수'로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가 쓸쓸히 은퇴한 후에 아무리 그의 이름을 불러 봐도 그땐 이미 ‘농구인 허재'는 우리 곁에 머물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너무나 많은 ‘대리만족'을 시켜 주었고, 농구를 위해 너무나 많은 삶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허재 그는 정말 농구하나만은 ‘귀신'같이 했기 때문에….



▩ '후추가 말하는 천재'

흔히들 ‘우리나라가 낳은 천재' 1순위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씨, 음악계의 서태지, 그리고 농구 천재 허재..정도로 꼽는다. 보통 ‘천재'라는 표현은, ‘태어날 때부터 아주 탁월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을 일컬어 쓰여진다. 공식적인 해설은 이렇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볼 때, 천재란, ‘어린 나이'에 어른들도 잘 하지 못하는 일들을 척척해 낼 때, ‘쟤, 천재 아냐?' 라는 말을 쓰곤 한다. 또 한가지 필자가 통상적으로 ‘천재'란 말을 붙이는 경우는, ‘누가 봐도 맡은 일을 정말 기막히게 변함 없이 잘할 때' 그런 표현을 사용한다. 다소 세련되지 못하고 전문용어가 부족하다 싶은 ‘정의'지만, 누가 보더라도 지극히 자연스럽고 ‘서민적'인 해석이라고 본다.

하지만, 허재의 농구를 보면서, 무작정 태어날 때부터 무슨 ‘농구 신의 기'를 받아, 옹알이도 하기 전에 자유투를 던졌을 정도로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난 ‘천재'라고 단정짓기 조차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는 그의 ‘천재성'에 버금가는 ‘노력'을 쏟아 부은 선수이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소위 ‘천재급' 아니, ‘신이 내린 재능'을 발휘한다는 여러 분야의 ‘천재'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 다 보면, 그들의 ‘선천적인 자질'보다는 ‘후천적 훈련'이 그들을 훗날 ‘천재'로 평가받게 하는데 더욱 더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자, 그럼 후추는 허재를 왜 천재라고 부르는 것일까…?

허재 본인은 자신의 ‘천재성은 40%, 노력은 60% 정도로 본다,' 라고 밝힌 바 있다. 그가 말하는 ‘천재성'은 아마도 위에서 언급한 그 두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허재는 어려서부터 농구를 워낙 잘했다. 천재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부분이다. 또, 허재는 워낙 오랫동안 농구를 잘해왔다. 역시, 천재라는 표현이 부적합하지 않는 부분이다. 과연 얼마나 어렸을 적부터 농구를 잘 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한결같이 농구를 잘해왔는지… 다시 말해 그를 왜 ‘농구 천재'라고 부르는지 한번 되짚어 보자.



▩ 한마리의 ‘다람쥐'에서 ‘스타 탄생'까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허재는 1974년. 동북국민학교 3학년때부터 정식으로 농구팀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누구 말대로, ‘젊은 시절 복서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아버님의 욕심'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시킨 농구도 아니었고, 허재 스스로 공 가지고 놀던 것이 좋아서 자연스럽게 공과 친하게 되었다. 허재가 농구선수가 되었다는 사실 역시 그의 부친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동북국민학교 시절부터 이미 허재의 ‘깜짝쇼'는 시작되는 듯 했다. 유치원 때부터 공이란 공은, 찢어질 때까지 가지고 놀던 허재가 농구코트에서 드리블이니, 뜀박질이니… 남들보다 못할 이유가 없었다. 1년 동안 동북국민학교에서 농구 선수로 활약하다가 당시 동북국민학교 농구팀이 해체되면서, 그는 ‘첫 스카우트 파문'에 휩싸인다. 국민학교 농구 대회에서 ‘펄펄 날던' 허재를 보고 당시 상명국민학교 농구팀 코치였던, 이철호 선생님의 ‘레이더'에 포착되고, 상명국민학교로 전학 가는 과정에서 동북국민학교 농구팀이 부활할 지경이 되었으니 말이다 (부친인터뷰 참조).

당시 나름대로 농구팀이 탄탄했던 상명국민학교로 옮기면서, 그는 다시 ‘정식 선수'로 복귀하게 되고, 국민학교 농구대회에 나가서 반포국민학교를 꺾고, 첫 우승을 기쁨을 맛보게 된다.

‘한 마리의 다람쥐처럼' 코트를 누비며 우승의 주역이 된다. 난생 처음으로 역전 ‘버저 비터'를 성공시키면서...

1978년. 허재는 농구 명문 용산 중학교로 진학한다. 당시, 용산 중 농구팀에는 ‘유재학, 전창진' 이란 청소년 대표급 선수들이 판을 치고 있었지만, 허재는 곧바로 주전 가드 자리를 꿰차면서 중학교 1학년 시절의 ‘전승 행진'에 시동을 건다.

그로부터 6년 (용산 중학교 3년, 용산 고등학교 3년) 동안 허재는 ‘용산 신화'를 만들어 간다. 그가 6년간 용산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대회 전적 요약은 다음과 같다.



●용산 중, 고교시절 대회 전적●
용산중 1학년 전승
용산중 2학년 3관왕
용산중 3학년 전승
용산고 1학년 우승 1회, 준우승 1회, 3위 1회
용산고 2학년 전승
용산고 3학년 전승


고등학교 1학년에 진학하면서 허재의 이름은 만인에게 공개되기 시작하고 고교 농구를 취재하던 당시 기자들의 입에선 ‘김영기의 묘기, 신동파의 득점력, 그리고 김동광의 드리블을 모두 갖춘 샛별 탄생' 이라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듬해 용산고는 ‘춘계 연맹전, 종별 선수권, 쌍룡기 쟁탈전' 등의 전국 대회를 싹쓸이하며, 고교 농구 최강자의 자리를 확인한다. ‘고2'였던 허재는, 당시 경기 당 평균 25.17점이란 꾸준한 득점력을 과시하고, 리바운드, 어시스트 부문에서도 기존의 그 어떤 가드들이 (대학, 실업 포함) 보여주던 수준과는 월등한 차이가 있었다. 이러면서 허재는 1982년 9월. 처음으로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게 된다. 10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렸던 제7회 아시아 청소년 농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면서 말이다. 그때 허재와 함께 대표팀에 발탁된 선수들이 한기범, 김성욱, 김유택..등이었다.
당시 ‘고2 허재'의 플레이를 보고 감탄을 금하지 못하던 농구계 인사들은 이렇게 얘기했다.

* 농구협회 김세훈 이사 ?10년 만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선수!?
* 용산고 양문의 코치 ?신선우 이래 용고 최고의 스타!?

고등학교 3학년에 진학하면서, 용산고는 여전히 전승가도를 달렸고, 허재의 주가는 매 대회마다 ‘상한가'를 쳤다. 팀이 우승하기까지 있어서, 나머지 4명의 동료 선수들과의 호흡은 필수적지만, 허재가 뛰던 당시 용산고의 농구는 ‘허재로 시작해서, 허재로 끝나는 - 허재의 모노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가 차지하는 팀내 비중은 독보적이었다.

여기서 잠깐 허재의 고3 시절 출전했던 한 경기를 REPLAY 해보자.



▩ REPLAY one : 1983년 6월 26일, 대통령기 고교 농구 대회

세월이 지나면 많은 것이 변하기 마련이지만, 용산 고등학교 3학년 시절 허재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일단 약간은 ‘부시 맨'을 연상케 하는 어정쩡한 길이의 ‘스포츠 형' 머리. 눈도 마치 ‘덜 뜬 것'처럼 보여질 정도로 작아 보였고, 얼굴도 너무나 애띤 모습이었다.

그나마 외관상으로 가장 지금의 허재와 비슷하게 느껴진 부분은, 그때부터 서서히 울퉁불퉁해지기 시작한 그의 팔, 다리 근육이다. 1983년…. 이 얼마나 오래 전의 얘기란 말인가? 국내 TV 편성표엔 아직도 ‘쇼쇼쇼'가 프라임 타임에 잡혀져 있었고, 아이린 카라의 ‘Flashdance-What a feeling'과 폴리스의 ’Every Breath You Take'가 빌보드 차트의 1-2위를 다투고 있었고, 국내 가요 중에선 조용필의 ‘나는 너 좋아'와 송골매의 ‘그대는 나는' 정도가 한창 뜨고 있던 시절. 그리고 사회적으론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이 벌어 졌던 그 옛날 옛적의 이야기다. 그 1983년, 허재의 농구는 도대체 어느 정도 였길래 연-고대를 비롯한 국내 최고의 대학팀들이 ‘허재 모시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나?

허재가 재학 중이던 고등학교 3년 동안 용산고는, ‘전 대회 우승' 이라는 무시무시한 ‘대기록'을 달성하고, 고교 농구의 1인자로 군림하며 ‘막강 용산'의 동문, 재학생들의 어깨에 힘을 불어 넣어주던 팀이었다. 이날 경기의 스타팅 라인업 역시, 지난 3년 간 한솥밥을 먹으며 ‘후암동 농구 신화'를 창출 해 오던 ‘졸업반 3인방'이 축이 되었다. 그때 당시에도 약간은 뻣뻣한 자세로 다소 높은 드리블을 치며 돌진 해 오던 ‘33번 센터 이민형', 그리고 외곽 슛이 돋보였던 ‘11번 포워드 한만성', 그리고 이때부터 ‘포지션 없이' 휘 집고 다니던 ‘6번 허재'. 반대로 준결승에서 맞붙은 ‘농구 명문' 휘문고에는, ‘못다핀 꽃 한송이 - 9번 이완규' 그리고 그 후 실업팀에서도 활약한 바 있는 7번 박상수 정도로 구성된 팀이었다.

허재가 이 경기에서 가장 유감없이 그의 실력을 발휘해 준 부분은 2가지 정도로 정리 된다. 첫째는 당시 농구 팬들이 귀빠지고 처음 목격하게 되는 그의 ‘전천후 플레이'이었고, 둘째는 그의 ‘승부근성'이었다. 경기 종료 2분전까지 용산고를 리드해 나가던 휘문고는, 결국 마지막 2분을 지키지 못하고 72-71로 무릎을 꿇는다. 남들보다 큰 키로 가드를 보던 허재는, 경기 내내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그 자체였다. 용산고가 속공할 때 시작되는 ‘아웃랫패스'는 항상 허재의 손끝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속공 플레이를 끝내주는 역할 역시 10번 중에 반은 허재의 몫이었다.

그때부터 돋보였던 그의 ‘낮은 드리블'로 상대 수비진을 파헤치고 골 밑까지 쳐들어가, 레이업 슛 대신 더블 클러치한 상태에서 외곽으로 다시 내 주는 현란한 골밑 플레이, 리바운드 찬스마다 몸을 내 던지는 그의 볼 집착력, 중앙에서 상대 팀의 센터를 달고 두번, 세번의 페인트 모션을 거듭한 후에 ‘얹어 놓는' 골밑슛… 세련미만 조금 떨어졌지,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플레이엔 큰 변화가 없는 듯할 정도다.

정확히 16년 전, 1983년도에 허재의 농구가 이랬다. 허재를 마크하던 ‘휘문의 자존심 이완규' 역시, 팀의 막판 스퍼트가 절실했던 종료 5분을 남기고 5반칙 퇴장 당하고, 2분을 남기고 터진 용산의 역전포도 허재가 찾아낸 ‘오픈 맨'이 성공시킨 깨끗한 외곽슛이었다. 키로 보면 분명히 4번 포워드나 5번 센터를 뛸 선수였지만, 그의 플레이를 보면 정말 어디에 놓아야 할지 갈등을 때리게 했던 허재였다. 그가 우리 농구 팬들에게 보여준 ‘新 농구'의 핵심은 바로 그런 그의 ‘다 기능성'이었다. 그전까진 그 어떤 국내 스타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더욱이 재미있는 부분은 언론에서도, 허재의 고등학교 3학년 시절 플레이를 보고, 당시 국가대표 농구 팀 포인트 가드를 보던 박수교 (현 기아 감독) 선수와 ‘직접 비교'를 했다는 점이다. 그 기사의 결론은 물론 허재의 손을 들어 주면서 말이다. 이미 그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허재는 ‘리바운드 잡는 가드'였고, ‘드리블로 뚫고 나가는 센터', 한마디로 ‘만능 선수'였다.

용산과 휘문의 ‘결승전 같았던 준결승전'에서의 마지막 1분 동안 허재는 자신의 탁월한 ‘승부 근성'을 단적으로 과시한다. 1점차로 리드를 넘겨 준 휘문의 ‘올코트 프래스' 수비를 상대로, 제일 먼저 공을 찾는 사람도 바로 허재다. 상대 진영 하프 코트의 ‘4 모서리'를 골고루 휘젓고 다니며 환상적인 드리블로 수비수를 따돌리는 허재의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80년대 초 한국 고교생의 실력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파울로 끊는다는 일념으로 달려드는 상대 수비수들을 ‘환영'이라도 하듯, 허재는 인바운드 되는 공마다 그의 손으로 잡는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결국 자유투를 쏘게 될 것이라는 것은 ‘기정 사실'이었고, 고등학생 신분으로 그런 긴박한 순간을 ‘일부러' 즐길 리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허재는 마지막 순간까지 공을 원한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가 ‘작정하고' 드리블 치고 다니는 걸 그 아무도 파울로도 못 끊는다는 사실이다. 항상 하는 얘기지만, ‘농구 천재'와 ‘단순히 잘 하는 선수'와의 차이점은 바로 이런 순간에 극명하게 구분된다. ‘내 손으로 끝을 보기 원하는 선수'와 ‘끝은 다른 사람이 해 주길 원하는 선수'로 말이다.

허재에 대한 극찬은 새롭지 않다. 하지만, 그의 고교 시절 플레이를 보면서 가장 눈에 띄는 특성은 바로 그의 기술적, 그리고 정신적 ‘스타기질'이었다. 그런 ‘스타 기질'이 그를 어려서부터 ‘이기게끔' 도와주었고, 그렇게 어려서부터 항상 잘하고 이기다 보니, 그의 이름 앞에는 자연스럽게 ‘천재'라는 단어가 붙게 된다. 하지만, 누군가 얘기했지만, 그는 만능선수가 되기 위해서 대학, 실업 팀 선배들의 플레이를 본 따려고 수 없는 반복을 거듭 하였고, 비틀거리는 상대방에게 ‘마지막 한방'을 날리는 선수가 되기 위하여 아버지와 코치 선생의 혹독한 ‘정신력 훈련'을 달게 치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로부터 15년 후까지 ‘농구 대통령 허재'로 굳건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감히 예상하는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당시 그의 플레이를 보면서 고등학생의 플레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드물었던 것처럼 말이다.



▩ ‘초록색 피가 흐르고 있는 허재'

‘애 아빠'를 놓고 ‘야, 저 사람 정말 천재다!' 하고 부르는 일은 흔치 않다.

그 만큼 ‘천재'라는 호칭은 나이 든 사람에겐 왠지 어색한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분명 예외는 있다. 그런 ‘특별 케이스'로 해당되는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무지하게 꾸준하고 오랜 세월동안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허재의 이런 ‘장기 집권' 역시 이미 중학교 때부터 그 조짐이 보였지만 10년, 15년 이상 그가 ‘해 먹으리라곤' 그 아무도 예측하지도,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허재는 보란 듯이 그 도전에 응했고, 아직까지도 ‘혈투' 없이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길 사양한다. ‘천재 농구'가 처음으로 그 정점에 도달하고 십 수년간 ‘부동 자세'로 ‘천재성'을 고집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결정적인 배경은 바로 중앙대학교 진학이다. 그가 ‘평생 스승'으로 섬기는 정봉섭이란 존재에게로부터 농구를 배웠고, 비전을 나눴으며, 쟁취를 맛보았다. 그리고는 영영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향해 달렸다. 허재의 몸 속에선 아직도 중앙대의 ‘초록피'가 끓고 있다. 그 초록의 의미는 ‘정상'이요, ‘도전'이요, ‘개척'이었던 것이다.

1984년 봄. 허재는 중앙대학교로 진학한다. 그의 중대 진학 배경은 이미 많은 이들에 의해서 소개되었고, 실제 많은 ‘전설'을 남겼다 (인터뷰 참조). 그리고 같은 해. 생애 처음으로 성인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된다.

여기서 잠깐, 잠시 눈을 감고 회상 해 보자. ‘내가 대학교 1학년 때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리고 나이 먹어서 돌이켜 보면 그때 그 시절이 얼마나 철없고 꿈 많던 시절이었나…?' 다 같이 잠시만 생각해보자. 지금부터는 허재가 대학교 1학년 당시 그의 ‘스케줄'을 소개한다. 그가 평균 ‘1인 3역'을 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먼저 그의 ‘본업'이었던 중앙대 가드 역할이 있었다. 4년 동안 단 한번도 대학팀에겐 져본 일이 없었을 정도로 1학년 때부터 중대 파워는 막강했다.

둘째, 허재는 청소년 대표로 발탁되어 서울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대회 결승전에서 중국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다. (28득점, 6 리바운드, 3 스틸).

셋째, 고배 유니버시아드 대회 대표로 또 선발되어서 선. 후배들과 손발을 맞추며 AIA, IOWA 대학 같은 미국팀들과의 친선 경기를 치뤄야 했다.

그리고 넷째, 첫 성인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된다. 하루에도 새벽반, 오전반, 오후반, 야간반…으로 나누어서 각기 다른 멤버들과 호흡을 맞추어야 했다. 이제 막 스무살도 채 안 된 대학교 1학년 학생의 스케줄이다.

대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허재는 평생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 중에 하나로 꼽히는 큰 시합을 치른다. 심판에게 항의하다가 징계를 당한 중대 정봉섭 감독이 벤치를 떠난 코트에서, 중대는 실업 강호들을 하나씩 격침시키며 '85 농구대잔치 2차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프로가 생기기 전, 한국 농구의 가장 크고 권위 있는 농구대잔치 역사 상 처음 있었던, 말 그대로 당시엔 ‘스캔들'이었다.

1986년에는 본격적으로 국가대표 부동의 가드로 자리 잡는다. ‘양 날개'에 이충희, 김현준 (얼마 전 작고)이란 빼어난 슈터들에게 볼 배급을 해주던 ‘원 가드 시스템'에서 ‘지휘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해 1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렸던 ABC 대회에서는 중국을 꺾었고, ‘우리 집 앞마당'에서 열렸던 ‘86 아시안게임에서는 비록 선전했지만, 아깝게 준우승에 머무른다. 중국과의 결승전에선 경기 시작 5분만에 발목을 다쳐, ‘힘 한번 못 써보고'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1987년, 그가 중대 졸업반 시절. 우리 농구 역사에 오랫동안 깨지지 않을 대 기록을 수립한다. 대학농구 연맹전 대 단국대 전에서 허재는 ‘75득점'이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남기고 대회 MVP 트로피를 거머쥔다.

밤을 세고 술을 펴 마셔도, 쇠철을 씹어 먹어도 끄떡없을 정도의 넘치는 체력을 바탕으로, 허재가 진정으로 ‘펄펄 날' 때였다. 많은 농구인들은 지금도 말한다. 허재가 중대 3-4학년 때는 정말 ‘신기'에 가까운 농구를 했다고.

우리 농구 역사 상, 많은 스타들이 스카우트 파문의 대상이 되었었다.

‘헬리콥터 납치 사건의 이동균'을 비롯해서 이충희, 최철권, 한기범, 서장훈…등. 그들의 행보에 모든 언론이 동원되어서 ‘생중계'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비록 ‘알짜배기 스토리'는 다 비공개 처리되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대학 시절 허재만큼 당시 ‘판돈'이 (10년 전 ‘3억 + 알파') 컸던 선수도 없었을 것이고, 대학교 2-3학년 때부터 국가대표 주전 가드로 활약했던 허재가 가는 실업 팀의 미래는 온통 ‘장미빛'으로 물들 게 뻔했다. 허재는 어느 팀에서, 어느 포지션을 뛰어도 ‘일당 백'을 보장하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중앙대학교라는 ‘복병'에게 농구 천재를 이미 한번 빼앗긴 ‘농구계의 주류, 연-고대'출신이 득실거리던 현대, 삼성은, ‘이번엔 결코'를 외쳐대며 ‘허재 잡기'에 총력전을 펼쳤다. 하지만 이게 왠걸? 난데없는 ‘기아산업 농구단' 이란 팀이 몇 해전 창단 되면서, 중대 출신 선수들, 아니 ‘정봉섭의 수제자'들은 모조리 ‘기아 호'에 몸을 싣는 게 아닌가…

허재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봉섭 감독과의 의리. 그리고 ‘중대 신화의 불'을 꺼뜨리지 말자는 목적 하나로 돈이고 뭐고 다 등을 돌렸다.

§ [88올림픽 선서]

허재가 ‘기아호'에 합류하던 첫해에 세계에 얼굴을 알리는 기회가 온다. 88올림픽 개회식 행사의 ‘선수 선서"에 선수 대표 자격으로 당시 핸드볼 대표팀의 수문장 손미나 선수와 나란히 단상에 오른다.

물론 그의 훤칠한 키와 남성적인 외모가 한몫을 했겠지만, 당시 ‘허재가 선서한다'는 사실에 그 누구도 심각하게 반대표를 던진 사람은 없었다. 그 정도로 이미 그는 ‘한국의 보배' 위치에 우뚝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12월 8일. 국민대를 상대로 치르는 농구대잔치 데뷔전에서 허재는 27 득점, 18 리바운드를 기록하면서 허재의 농구 역사, 아니 한국 실업 농구의 판도는 영영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농구대잔치 89-96 대회 전적●

89. 2.19 기아 농구대잔치 1-3차전 싹쓸이
91. 3. 3 기아-현대 전, 임달식, 김성욱 허재 폭행
93. 3 리바운드 1000개 돌파
95. 2. 25 농구대잔치 챔프 결정전 연속 17득점.
총 41득점으로 우승
96. 1. 14 3점슛 600개 돌파
96. 1.19 통산 최다 어시스트 기록 (716)
농구대잔치 8년 동안 7회 우승 기여.
96. 2. 27 Best 5 상 6회 수상
MVP 2회

아주 간략하게만 정리하더라도 농구대잔치 사상 허재만큼 개인의 명예와 팀의 영광 한꺼번에 누린 선수도 없다. 허재와 기아를 위한 농구대잔치였기 때문이다. 허재가 기아 유니폼을 입고 참가한 8번의 농구대잔치 중, 93-94시즌 서장훈, 이상민, 문경은을 앞세운 연세대에게 일격을 당했던 한해를 제외하고 모두 일곱 차례 우승으로 이끌었다. 96년 2월. 상무를 마지막 기아 우승의 제물로 삼고 허재와 한국 실업 농구는 프로의 세계로 뛰어든다.

8년 전 실업 데뷔전에서도 그랬던 것과 똑같이 ‘최고의 자리'에서 말이다. 꾸준하게 남들보다 월등히 잘 한다는 이유 때문에 허재를 ‘천재'라고 부른다면, 이쯤해서 컴퓨터를 꺼도 되지 않을까…?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이 글의 종착역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대략 상상이 가리라 본다. 그렇다. 허재 입장에서 볼 때 ‘치욕의 현장'이었던 프로 원년 기아 우승 상황은 차차 얘기하기로 하고, 바로 98년 4월로 시계추를 돌려보자.



▩ REPLAY two:1998년 4월 2일 (KBL 챔피언 결정전 2차전 기아 : 현대)

KBL의 두 번째 시즌 챔피언 결정전은 길지 않은 KBL 역사 상 가장 위대한 7차전 시리즈로 평가되고 있다., 걸출한 용병 선수 (맥도웰, 웹)의 파워 게임과 절묘하게 조화된 이상민, 추승균, 조성원의 외곽 공격, 그리고 전광석화처럼 치고 나가는 젊은 현대 팀의 속공은 정규시즌을 45전 31승 14패 (승률 .689) 라는 빼어난 성적으로 마감하고 플레이오프 준결승전에서 정규시즌 5위팀 동양을 3연승으로 격파. 느긋하게 결승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 전년도 우승 팀 기아는, ‘허-동-만' 트리오의 노화 현상과 용병 센터 저스틴 피닉스의 부상 결장으로, 노장 김유택이 스타팅에 기용되는 등. 다소 불안한 심정으로 챔피언 결정전에 임하게 되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대전에서의 1차전 결과는 99-90으로 노장팀 기아의 완승. 불의의 일격을 당한 현대가 재정비하고 나선 2차전 역시, 허재의 ‘원맨쇼'에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필자가 본 경기를 Replay 하려는 이유는, 이 경기에서 허재는 그의 ‘농구 25년'. 아니, 그의 ‘농구 기본기 25년'에 대한 ‘클리닉'을, 현대뿐만 아니라 만인에게 선사했던 경기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어렵게 구한 2차전 경기의 테이프를 보면서, 그 동안 허재하면 떠오르던 ‘신기' 또는 ‘화려한 개인기' 보다는, 그의 ‘신체의 한 부분' 이라고 까지 보여지던 그의 탄탄한 개인기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허재의 화려한 개인기에 늘 가리어져 다소 과소평가 되어온 그의 ‘농구 바탕'을 제대로 보여 주었던 게임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경기보다도 더 많은 점수를 내고, 더 많은 리바운드를 잡고, 더 많은 어시스트를 한 경기는 있었지만, ‘허재 농구의 초석'인 기본기가 눈에 띄게 돋보였던 경기를 찾아 낸 기쁨이 남달랐다.


● Footwork (푸트 워크)

10년 전의 경기에서나 이 경기에서나, 허재의 플레이 중 가장 남들의 그것보다 눈에 띄게 차이가 났던 부분이 바로 이 Footwork가 아닌가 싶다.

그의 발은 언제나 움직인다. 공이 손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마찬가지다. 그가 수많은 상대 수비수의 Pick (스크린)을 헤집고 빠져 나와 공을 받기까지 그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잔걸음을, 재빠르게 디디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 짧고 빠른 발걸음으로 말이다. 그의 이런 재빠른 움직임이 바로 지난 십 수년 동안 상대 수비수들의 ‘비굴'하게까지 보여지던 ‘밀착마크'를 따돌리고, ‘자유의 몸'으로 농구 림 (Rim)의 정면을 쳐다보며 슛을 때릴 수 있게 해준 밑거름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는 그런 ‘노마크 찬스'가 오면 심중 팔구 골로 연결 시켰다. 또, 그의 이런 치밀한 Footwork는 그가 이번 챔피언 결정전 7경기동안 25개 (경기 당 3.57개) 라는 믿을 수 없는 숫자의 스틸 (가로채기)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보여진다. 허재의 Footwork는 상대 공격수를 마크하는 데에도 한몫을 했지만, 공이 가는 ‘길목'을 차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 많은 스틸을 기록할 수 있었다. 그가 수비를 할 때면, 상대 공격수는 그저 ‘움직이는 그림자' 정도로만 시각적인 견제를 해주고, 나머지 양 눈 옆으론 공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다니며 수비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허재의 Footwork는 좌-우, 전-후진, 대각선을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그의 모든 플레이의 가장 기초적인 요소가 된다.

아마도 아주 어려서부터 열중해온 ‘줄넘기'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 아닌가 싶다.

●Fake (페인트 모션)

슈터 (shooter ) 또는, 1번 가드에게 이 페인트 모션은 농구의 가장 기본이라고 볼 수 있다. 샤킬 오닐과 같이 야투의 절반 이상이 무식하게 꽂아 내리는 덩크슛을 쏘는 선수가 아니라면, 1대1 대결의 ‘필수과목'은 바로 이 페인트 모션이다. 허재의 페인트 모션. 이 경기 내도록 그는 ‘페인트 모션의 모든 것'에 대해 ‘시범'을 보이는 듯하다.

찰거머리같이 달라붙는 수비수들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야투 환경'을 연출하기 위해 대부분 페인트 모션을 쓰지만, 역시 많은 선수들이 상대 수비수들의 파울을 유도하기 위해 페인트 모션을 쓰기도 한다. 현대팀 농구의 ‘지휘자'이자, ‘허재 전담맨'이던 이상민을 상대로, 그는 ‘페인트 모션의 진수'를 상대의 코앞에서 보여준다. 결과는, 4쿼터 4분 2여 초를 남기고 ‘허재 28점째 득점, 이상민 5반칙 퇴장.' 3쿼터까지 15-20점 차까지 몰리던 현대가, 2점차로 따라 붙으며 한창 분위기를 타던 시점에서 허재의 이 ‘한방'은 현대의 컴백무드에 완전히 찬물을 끼 얻는다.

3점 라인 밖에서 자리 잡고 있는 ‘노마크' 허재에게 찔러준 패스. 이어지는 허재의 Head fake. 수비수는 이미 저기 어디 사이드 라인쯤에서 나뒹굴고 있고, 허재는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한발 옆으로 가서 3점슛을 때린다. 그물 밑에서 한번 ‘말리며' 떨어지는 깨끗한 3점포. 허재 농구를 보다 보면 얼마나 자주 보는 장면인가. 이 경기에서 허재가 보여준 페인트 모션 ‘레퍼토리'로는, 단순한 Head Fake뿐만 아니라, 어깨와 발을 한번 흔들어주며 ‘첫 스텝'을 치고 나가는 Shoulder Fake, 패스하는 척하고 이미 그 쪽으로 쏠려있는 수비수의 반대쪽을 쏜살같이 지나가 버리며 레이업을 뜨는 Pass Fake, 밀착된 상대 수비를 달고 드리블 해 나가며 한번 ‘엇박자'로 발걸음을 해 주며 잠시 멈춘 상대 수비수의 빈 공간을 침투하는 Stutter Step… 등, 40여분간 ‘페인트 모션의 교과서'를 다시 쓴다.

● Dribble

아마도 필자가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처음 ‘Behind-the-Back Dribble'(공을 등 뒤로 넘겨서 드리블하며 방향 전환하는 기술) 을 목격하게 해 준 장본인은 아마도 김동광 현 삼성 감독으로 기억된다. 70년대 후반 일본에서 열린 ABC 대회에서 말이다. 이처럼 허재보다 더 먼저 이런 화려한 드리블을 소개해준 선수도 있었다. 하지만, 허재의 경기를 지켜보면서 필자가 ‘거품'을 물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은 바로 그의 ‘낮고 빠른' 드리블 때문일 것이다. 우선, 그가 ‘왼손잡이'라는 점이 그의 드리블을 더욱 더 위협적인 ‘1차 공격 무기'로 만들어 준다. 선천적으로 ‘오른손잡이'가 많고, 오른손 드리블에 익숙한 선수들이 많은 농구 코트에서 뛰다 보니, 수비수의 좌측으로 움직이는 수비가 훨씬 더 몸에 익은 선수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정면을 향한 상태에서 오른쪽으로' 발만 움직이라는 주문은, 쉽게 적응하기 힘든 일임엔 분명하다. 그러다 보니 수비수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그의 드리블에 ‘뚫리기' 일쑤고, 쉬운 레이업으로 이어지는 실점을 하게 된다. 허재의 드리블은 항상 그의 몸 앞에서 논다. 속공을 펼칠 때나, 지공을 지휘할 때나 항상 빠르고 낮게 말이다. 너무 몸을 틀고 드리블해서 뒤에서 ‘더블 팀' (2중 방어)하는 수비수에게 공을 빼앗기는 일도 없을 뿐더러, ‘드리블 핸드'를 바꾸는 일에도 그만큼 동작이 간략해 진다. 이 경기에서 역시 허재의 이런 탄탄한 드리블 덕분에 수비수 이상민을 ‘조기 퇴출' 시키게 된다. ‘핸드 체크' (Hand Check), ‘리치 인' (Reach-in) 등의 불필요한 파울을 범하면서 말이다.

이밖에도 그가 이 경기에서 보여준 ‘몸에 붙은' 기본기는 그의 '화려한 플레이'를 완전히 묻어 버린다. ‘무릎으로 쏘는 자유투', ‘두팔을 쭉 뻗으며 팔꿈치로 보호하는 볼 키핑 및 집착력', '높게 아치 (arc)를 그리며 띄워주는 포스트에서의 엔트리 패스'…

허재는 그의 플레이의 반을, 이런 아주 단순하지만 철저한 ‘기본기'로 풀어 나간다. 그리고 나머지 그의 득점과 어시스트는 그가 선수 생활을 해 오면서 터득한 경기 운영 능력, 넓은 시야, 그리고 ‘오기'로 풀어 나간다.

다음은 현대와의 2차전에서의 허재의 활약상을 쿼터 (Quarter)별로 요약해본다.


●1쿼터

1차전에서 29점을 쏘아 올리며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허재를 현대는 초반부터 봉쇄하려고 하고, 허재 역시 득점 측면에서는 그 다지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한다. 오른손 등 부상으로 반깁스를 한 채 가급적 왼손만으로 공을 주고받는 허재였지만, 3점슛 라인 중앙에서 강동희에게 찔러주는 ‘Backdoor Pass', 종료 25초 남기고 터지는 허재의 3점슛으로 1쿼터는 22:22이란 시소게임으로 끝이 난다. (허재 8득점)


●2쿼터
2쿼터 초반에 탱크처럼 속공을 리드하는 맥도웰을 상대로, 오펜스 파울을 유도하려 정면 충돌을 피하지 않는 ‘서른 네살, 웅이 아빠 허재'. 충돌시 허재의 다리가 약간은 움직인 듯 했지만, 어느 쪽으로 휘슬을 불어줘도 이의가 없을 정도의 아슬아슬한 장면이었다. 결국 허재의 수비 파울로 판정이 나고, 아니나 다를까 허재는 심판의 얼굴을 향해 튀어 오른다
.
격렬한 항의와 함께. 가차없이 심판은 허재를 보며 ‘T'자를 그리고, 이에 허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또 한번 울분을 삼킨다. 심판의 애매한 ‘콜' 하나로, 1차전에 이어 2차전에서도 허재의 모터에 발동이 걸린다. 다음 공격권에서 기아의 허재는 곧바로 오른쪽 모서리에서 3점슛을 성공시키며, ‘그래, 오늘 한번 또 붙어보자.' 라는 표정을 짓는다. 잠시 후, 또 기아의 리드 선수가 ‘테크니컬'을 먹게 되고, 허재가 또 심판 앞에 나선다. 방송 해설자들은 여느 때와 같이 계속 허재의 ‘자제'를 외쳐대면서… 이쯤해서 관중석의 환호 소리는 확연하게 ‘청-백'으로 나뉘어 진다. 가냘픈 소프라노 오빠부대의 ‘현대', ‘이상민' vs 굵직한 태너 넥타이 부대의 ‘기아', ‘허재'로 말이다. 이때부터 허재는 3점슛 2방을 연달아 쏘아 올리고, 백코트 하는 척하다가 가로 챈 패스를 잡아 이상민을 등지다가 바람처럼 레이업슛을 성공시킨다. 관중석에선 난리가 나고, 어느새 방송 중계자들도 ‘허재 혼자 다 합니다.'를 외쳐댄다. 기아 수비 진영에서 ‘루즈 볼'로 흘러 나오는 공을 허재는 비호같이 달려가서 또 한번 3점슛으로 연결시킨다. 2쿼터 종료를 알리는 버저 소리와 함께 말이다. 3점슛만 4개, 2쿼터에서만 14점을 득점한다. (총 22점)

●3쿼터
3쿼터 시작하자 마자 허재는 더블클러치를 하면서 정확히 뱅크 슛을 성공(24점째) 시키고, 조급해진 현대의 장거리 슛 난사로 기아는 3쿼터 내내 10 / 15 / 20점 차이의 편안한 리드를 즐기게 된다. 전의를 상실한 듯한 현대의 루즈한 플레이를 틈타 허재는 또 하나의 가로채기, 그리고 이상민의 4번째 파울을 유도해 자유투 2개를 성공시키며 (24점째) , 3쿼터를 65-50으로 마친다.

●4쿼터
잠시나마 ‘나사가 풀린 듯 한' 기아의 집중력 때문인지, 이상민, 추승균, 조성원 등의 3점 슛으로 현대는 금새 7점차까지 따라 붙는다. 허재는 4쿼터에도 역시, 마치 코트의 반을 갈라 놓은 듯, 달랑 자신과 이상민 만이 남겨 진 상태에서 ‘아이솔레이션 플레이' (1:1 플레이)를 펼친다. 경기 내내 허재의 1:1 공격을 막지 못하는 이상민을 도와 주기 위해 멕도웰이 ‘헬프 디팬스' (2중 방어)를 자청하고 나서지만, Double Team이 될 때마다, 허재는 노마크 상태가 되어 있는 동료 선수를 찾아내고 패스로 연결, 현대의 강압 수비를 무너뜨린다. 이상민과의 두번의 1:1에서 쉬운 레이업슛으로 연결시키는 허재는 결국 4분 20여초를 남기고 이상민을 제치며 중앙 ‘페네트레이션' (침투) 후, 완벽한 골 밑 어시스트를 만들어 주며 파울로 끊으려 하던 이상민을 벤치로 내 보낸다. 4쿼터 내내 중거리 포로 2점차까지 따라 왔던 현대로선 게임의 리더를 잃은 격이 되고, 이 사이를 틈타 허재는 또 한번의 스틸과 이번엔 조성원을 달고 중앙 레이업으로 득점. 30점째 포인트를 올리게 된다. 경기 종료 2분 전, 이번엔 자신이 잡은 수비 리바운드를 몰고 코트 끝에서 끝까지 단독 드리블, 골 밑에 있던 리드에서 ‘떠 먹여 주고', 종료 1분 전에 허재는 또 스틸을 성공, 2차전 역시 기아의 승리로 굳힌다. 허재 - 30득점, 11어시스트, 5 스틸. AMEN…

왜 우리는 허재를 ‘농구 천재'라고 부르는가? 그 누구보다도 허재는 어려서부터 농구를 남들보다 잘했다. 아주 월등히 잘했다. 성적과 기록이 입증 해 준다. 그리고 허재는 ‘그짓'을 너무 오랫동안 해 왔다. 본인도 최근에 사석에서 그런 말을 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 나이 이제 서른 다섯인데… 정말 농구를 해도 너무 오래 했다. 어쩔 땐 정말 주저앉아서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언제 운동 좀 그만하고 일반인들처럼 살아 보나…?' 하고 말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가 속 시원히 설명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 ‘왜 그는 최고가 아닌지…' 아니, 무엇이 그를 진정한 농구 천재 대접받는 것으로부터 그토록 훼방을 놓고 있는지 말이다.

혹시라도, ‘진짜 천재는 단 1%의 후천성 노력도 하면 안 되고, 타고 난 기량만으로도 펄펄 날아야 한다.' 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면 허재는 분명 천재가 아니다. 그럼 이 부분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죽어라고 연습해도 안 되는 선수들은? 천재의 잉태, 성숙 과정은 본인 말대로 ‘40% 선천적, 60% 노력'에 의해서 가능해 진다는 말이 가장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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