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서 검색하면 까페글들이 꽤 걸리는데
예전부터 있던 농구 까페글들이 허재에 관한 게 꽤 있어서
검색하다가 흥미로운 글 퍼 옴.
원래는 기사인 거 같은데, 구글링 해 보니 잘 안 나오네.
까페에서도 펌글이라고 되어 있음.
제목에 쓴대로 프로 출범 원년에 결승전 때 뛰지 못했을 시기 얘기야.
전창진 감독과의 인연도 재밌음,
https://cafe.daum.net/ilovenba/34Xl/138?svc=cafe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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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글:스포츠 서울-노창현의 흥야흥야] 허재를 위하여(8)-"제발 허재만 데려와라..."
97프로농구리그에서 기아의 우승 축하연이 열린 그날 밤 어디론가 사라진 허재는 친구들과 함께 술만 들이켰습니다.기아 최상철 단장과 정재공 국장이 집 앞에서 새벽까지 기다렸지만 만날 수가 없었지요.허재의 소재가 파악된 것은 하루가 더 지난 5월 3일 오전이었습니다.
이날은 스포츠서울이 주최하는 올해의 프로농구대상 시상식 날이었습니다.기아의 수상자는 넷이었습니다.대상에 우승의 주역 강동희,감독상에 최인선감독,프런트상에 정재공 국장.그리고 또 한사람이 바로 허재였지요.당시 스포츠서울은 포지션별 베스트5를 선정했는데 스몰포워드상을 허재가 받은겁니다.
하지만 상을 주면서도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챔치언결정전에서 허재의 모양이 너무 안좋았기때문이지요.물론 기아가 정규리그도 우승한만큼 공헌한 허재의 수상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사람들의 뇌리엔 챔피언전의 기억만 각인됐을테니까요.무엇보다 자존심 강한 허재가 시상식에 불참할 것이 걱정됐습니다.
기아측에 허재를 무슨 일이 있어도 데려와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이날 오전 허재와 함께 있다는 정재공국장의 연락을 받고 안도의 한숨도 잠시,막상 시상식장에 허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정재공국장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게 말이지.허재가 잠깐 사이에 튀어버렸어..."하더군요.
정국장은 이날 아침까지 술에 취해 있던 허재를 끌고오다시피해서 여의도 기아 사무실로 데려왔답니다.그런데 술을 깨기위해 사우나 다녀온다는 허재의 말에 속고 만 것이죠.정국장이 연신 미안해했지만 어쩌겠습니까.
허재는 그후로도 상당기간 잠수를 탔습니다.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와 같이 시간을 보낸 인물중에 TG의 전창진감독이 있었습니다.당시 삼성 농구단의 총무였지요.당시만 해도 허재와 전창진 감독이 친밀한 관계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전감독과 허재의 인연은 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허재가 상명초등학교 4학년 2학기때 전학오면서 2년 선배인 '창진이 형'을 알게 된겁니다.
전감독은 키도 작고 귀여운 허재를 유난히 귀여워했습니다.허재의 말입니다."초등학교때 창진이 형네가 주유소도 운영하고 무지 잘 살았거든요.집에 놀러가면 좋은 것도 많아서 매일 갔어요.1년중 절반은 그 집에서 살았을거야..."
허재는 창진이 형을 따라 용산중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전감독이 고려대에 갔으니 응당 허재도 고려대에 갔어야 했습니다.용산고 1년때부터 스타덤에 오른 허재였기에 각 대학은 스카우트에 총력을 기울였었지요.전감독 역시 허재와의 인연덕분에 학교측으로부터 스카우트의 특명을 받습니다.덕분에 허재도 두어번 고대를 방문했답니다.
다시 허재의 이야기입니다."창진이형 생각하면 당연히 고대가야 했는데...지금 와서 얘기지만 그때 고대갔으면 도망갔을지 몰라.어휴~훈련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한지 자신이 없더라구요.그리고 연세대는...사실 마음에 들었지.신촌을 한바퀴 둘러보고 뻑 갔어요.정말 놀데 많다면서...흐흐흐~아마 연세대 갔으면 농구 그만뒀을지도 몰라.술먹고 노는 재미에..."
허재가 중앙대에 간 것이 부친 허준씨와 정봉섭 중앙대 감독과의 의리때문이라는건 너무 유명한 이야기가 됐지요.일각에선 정봉섭 감독이 허재 중학교때부터 스카우트를 위해 허준씨와 낚시친구를 하는 등 수년간 정성들인 덕분이라고도 하는데요.진짜는 의리와 신뢰를 중시하는 두사람의 기질이 통했기 때문이라는게 정확합니다.
정감독은 그시절 학교에 농구연습장이 없어 용산고 체육관을 빌려썼는데요.거의 매일 허준씨와 마주치며 친해졌지요.재미있는 것은 정감독이 스카우트를 먼저 말한 적이 없다는겁니다.정감독이라면 도통 데려가겠다는 얘기를 안하니까 어느날 허준씨가 그랬답니다."우리 허재 안데려갈거요?" 정감독은 그 순간을 기다렸던 것이죠.두사람은 이심전심으로 허재의 장래에 합의한 셈이었습니다.
허재가 코트의 풍운아,혹은 이단아처럼 비쳤던 것도 어쩌면 대학과 실업팀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생긴 이미지탓일수도 있습니다.당연히 갈 것으로 보였던 팀들을 외면하고 엉뚱한 선택을 했으니 뭔가 도전적이라는 인상을 주었을 것입니다.자유분방하고 반항아적인 기질이 그런 편견을 더욱 심화시켰을거구요.
허재와 전창진감독의 '팀 인연'은 84년 허재의 중앙대 입학이후 13년만에 재현될 기회가 생깁니다. 원년 챔프전 파문이후 허재는 "기왕이면 창진이형 있는 곳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하지만 이때만 해도 삼성의 허재 스카우트는 물밑단계에 불과했습니다.기아는 팀의 상징인 허재를 내보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특히 허재를 아들처럼 여긴 기아의 최상철단장은 요지부동이었지요.
우여곡절 끝에 허재는 기아 복귀를 선언합니다.겉보기에 상처는 치유된 듯 했지만 아는 사람들은 그가 조건부 합류를 한 것으로 보았습니다.한 시즌만 더 뛰고 명예롭게 이적한다는 시나리오말입니다.코칭스태프와 감정은 풀었지만 허재는 이미 새로운 곳에서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겠다는 생각이 확고했습니다.허재다운 오기의 도전장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듬해 챔피언결정전에서 허재의 놀라운 부활을 목격합니다.챔피언전 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승부였고 지금도 많은 이들에 의해 감동적으로 언급되는 불굴의 투혼이었습니다.준우승에 그치고도 허재는 MVP의 영광을 안았지만 그는 한번도 웃지 않았습니다.용산고시절 팀이 우승하고도 자신의 플레이가 마음에 안들었으면 밥도 굶은 허재였습니다.사람들은 허재가 최선을 다했다고 믿지만 정작 그는 우승을 못했으니 최선을 다한게 아니라는 논리인게지요.
그러고보니 95년 아시아클럽선수권대회에서 이른바 '신들린 농구'로 필리핀의 용병스타를 압도하고도 허재는 웃지 않았습니다.경기후 상대선수들이 사인공세를 펴는 전대미문의 해프닝에도 얼굴은 굳어 있었습니다.환상적인 플레이에 넋이 나간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하는데도 그는 경기에서 진 것이 분할 따름이었지요.
98년 여름 허재는 기아와의 11년 인연을 회한속에 접었습니다.영광과 좌절이 함께 있었습니다.기쁨만큼 슬픔도 있었습니다.그의 나이 서른다섯.허재가 마지막 농구인생을 펼 곳이 나래로 결정된 것은 뜻밖이었습니다.왜 전창진 감독은 또 허재에게 물을 먹게(?) 되었을까요.
허재가 삼성에 가지 못한 것은 대체로 두가지 이유였습니다.하나는 기아와 삼성의 모기업 상황이 도저히 정상적인 비즈니스를 할 처지가 못된 것입니다. 당시 삼성은 자동차산업에 진출할 계획아래 공략대상으로 점찍은 기아자동차와 치열한 대립을 할 때였습니다.허재의 삼성행은 기아자동차가 삼성에게 팔리는 것과 같다는 거부감이 심했습니다.또하나는 삼성의 신입사령탑으로 거론되던 연세대 최희암감독의 팀 구상과 허재가 맞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그런 전환기의 미묘한 상황을 간파한 인물이 나래의 최형길 국장이었습니다.최국장은 허재의 용산고 4년 선배로 전창진 감독만큼 오랜 인연은 아니지만 허재를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역시 용산동문인 이홍선 구단대표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최국장은 기아에 강력한 콜을 보냅니다.샐러리캡 등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한 기아는 허재를 내보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명분만들기에 들어갑니다.
허재를 내주는 대신 정인교와 윌리포드,두명을 한꺼번에 요구한겁니다.물론 모양은 토종-토종,용병-용병교환이었지만 당시 윌리포드의 비중이 허재 못지않았다는 걸 고려하면 엄청난 결단이 필요했습니다.그뿐인가요.이듬해 신인지명권까지 하나 양도하라는 보너스옵션까지 기아는 요구했던 것입니다.
훗날 최형길 국장은 "아무리 허재를 데려오는게 중요하지만 정말 지독한 조건이었어요.도저히 안되겠다싶어 이홍선대표에게 보고하는데 수용하자는 거에요.놀랬지요.그만큼 허재에 대해 애정이 많았던 겁니다." 허재도 이때의 트레이드에 대해선 미안한 마음이 많았습니다.팀이 너무 많은 희생을 했기때문이죠.하지만 나래의 엄청난 투자는 5년후 TG의 짜릿한 우승으로 결실을 맺었으니 결과적으로 충분히 가치있는 거래가 아니었을까요.
재미있는 것은 전창진감독이 이듬해 시즌이 끝나고 삼보로 이름이 바뀐 나래에 코치로 합류한 겁니다.전창진감독은 84년부터 13년간 그렇게 허재를 끌어오려 애썼는데 정작 자신이 허재에게 끌려갔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