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각자 아카데미 입학 당시를 떠올려 보자
엄태화: 우리 기수(28기, 참고로 김정훈 감독님 홍석재 감독님도 이 기수)에게 조성희 감독의 <짐승의 끝>(2011), 윤성현 감독(두 분 다 25기) <파수꾼>(2010)이 정말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아카데미에 들어갈 즈음 나온 영화이기도 했고, 이곳에 입학하면 그런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기대가 정말 커진 때였다.
홍석재: 그래서 그런 마음에서 시작한 결과 엄태화 감독이 <숲>(2012)이라는 평가가 좋은 영화를 쯕은 거 아닌가. (웃음)
Q: 허진호, 봉준호, 김태용, 장준환, 최동훈 감독 등이 오래도록 아카데미를 대표해왔다면 장편과정이 거둔 성과는 일종의 세대교체를 가능케 했다. 이제는 영화에 꿈을 둔 이들에게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감독들이 아카데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예이자 일종의 롤모델로 자리하고 있다.
홍석재: 사실 초면인데, 여기 있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ㅋㅋㅋ) 나는 정말 윤성현 감독님의 <파수꾼>을 보고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싶었다(웃음). 장편과정이 들어오기 이전에는 장편영화를 찍는다는게 엄두가 안 났다. 장편과정이 생기고 나서 <파수꾼> 같은, 누가봐도 좋은 결과물이 나온 거다. '여기 가서 어떻게든 장편을 찍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영화하는 이들이 모두 하게 된 거다. '아카데미라는 곳은 좋은 영화와 감독을 배출하는 곳이다'라는 생각으로 기대감이 컸다. 막상 들어와서 보니 시스템이 만들어낸다기보다는 윤성현 감독이 예외적인 거구나, 재능이 뛰어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웃음).
윤성현: <파수꾼> 끝내고 후배들에게 가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여기에 판타지를 갖지마라." 봉준호, 김태용, 장준환, 최동훈 같은 아카데미 출신의 유명 감독들을 보고 이곳에 왔다가 절망하는 사람들도 많다. 현실하고는 엄청난 괴리가 있으니가. 나는 그런 선배에 대한 기대보다는 같은 기수 동기들과 작업하면서 만들어내는 것에 아카데미가 가진 의미가 더 크다고 본다. 아카데미도 시스템이다 보니 완벽할 수는 없다. 실망할 수도 있지만 같이 작업하는 동기들을 통해 배워가고 얻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홍석재: 맞다. 시스템이 우리가 원하는 걸 만들어줄 수는 없다. 좋은 쪽으로 갈 수 있도록 우리가 기대하는 판타지를 해석하고 임할 필요가 있다. 아카데미가 가진 장점은 자기 돈 안 들이고 지원받고 장비 대여하고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모인 사람들과 의기투합해 영화를 만들 수 있다. 교수님도 중요하지만 난 입학 동기인 엄태화 감독이나 <들개>(2013)의 김정훈 감독 같은 형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에 영향받고 배운 게 더 많다. 태화 형은 정말 우리기수에서는 너무나 유명한 에이스였다.
안국진: 그럼그럼. '제 2의 봉준호 감독'이 나왔다고 학교에 소문이 자자 했으니까.
홍석재: 아카데미는 과제에 대해서 시간을 안 지키면 프로젝트 예산이 깎이고 패널티가 세다. 그런데 태화 형은 한번도 그걸 어긴 적이 없다. 대단한 사람이다. 보고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못 배우고 졸업했다(웃음).
안국진: 홍석재나 나는 항상 늦었다. (시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여기서 빵터짐) 그래서 내가 이번에 늦었으니 다음엔 네가 더 늦어라, 나 좀 가려지게, 서로 그런 이야기도 했다.
홍석재: 서로 정말 의지를 많이 했다.
엄태화: 이건 좀 과장인 게, 솔직히 내가 잘맞춘다기보다는 이 둘이 항상 좀 늦더라(웃음). 과제를 빨리 낸 건 패널티를 받으면 제작지원금이 깎이니 그건 안되겠다 싶어서였다.
윤성현: 우리 기수는 완전 꼴통이라 규정이 있어도 대체로 쇠귀에 경읽기식이었다. 조성희 감독이 소위 말하는 모범생이었고, 특히 나는 입학할 때부터 워낙 말 안듣는 걸로 선생님들 사이에 각인이 됐다. 동기들은 그런 내 덕에 용기를 좀 얻기도 했을 거다. '윤성현처럼 과제를 안 내도 잘리지 않고 다닐 수 있구나' 이런 본보기를 제시한 거다.
Q: 장편과정의 괄목할 만한 성과들이 나오기까지, 시스템과 교육과정의 강압적인 분위기를 손꼽는다. 실제 상업영화계로 나와서도 겪을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평가와 서로간 경쟁을 부추기는 시스템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그게 작품 연출에 미친 영향은 어느정도인가?
홍석재: 아카데미 안 갔으면 지금 영화들을 찍을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결과적으로 생각해보니 그 압력들이 있어서 자의건 타의건 밀려서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영화사 집에서 아이템을 개발하고 있는데, 했다가도 안 풀리고 게속 제자리를 맴도는 기분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뭐든 해야한다는 마음에, 작업실 사람들끼리 벌금 걸고 마감을 해보기도 했다. 제작사가 있지만 혼자 작업하니 아카데미에서 작업할 떄와는 다르다. 그땐 매일 학교 나가고 일년 내내 동기들과 붙어 있고, 영화에 대해 토론하고 하다 보니 처음에는 준비가 안 돼 있었도 어느 순간 뱉어내게 된다. 그런 방식으로 하다가 혼자만 있으니 불안한 마음이 크다. 나만 그런 건가. 다들 아카데미 아니어도 가능하다고 생각 하나.
Q. 장편과정을 통해서 데뷔작을 내놓았고, 비평과 흥행 측면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다. 첫 데뷔 작품이 거둔 성과만큼 두번째 작업에 대한 고민도 커지는 시점이다. 소재나 관심사 면에서 아카데미에 재학 중일 떄와 상업영화 진영으로 나왔을 떄 제약이 생기는 부분들이 있나.
홍석재: 외부에서는 아카데미용 영화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 아카데미에서 작업하면 그런 게 없다. 무슨 이야기를 하라거나, 이런 이야기를 꼭 해야한다는 가이드라인이 없다. 각자가 원하는 아이템을 가지고 와 작업하고 그래서 다양한 결을 가진 아카데미 영화들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카데미의 장점이라고 본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다르게, 시나리오를 작업하다보면 이게 상업적인 걸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당장 나만 재밌어서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그러다보니 이상해지더라.
홍석재: 우리 영화를 보러 와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끝까지 보게 할 수 있냐라는 고민이 있다. 이런 영화를 예매할 것 같은지, 개봉주에 상위권에 드냐, 못 드냐 그런 것부터 고민하게 된다. 예전엔 그런 세계를 아예 상상하지 않고 살았다면 지금은 그 세계에 들어온 것 같다. 요즘은 생각만 하지 말고 직관적으로 찍어야 겠다는 다짐을 한다. 태화 형 옆에 있으니 그런 마음이 더 크게 든다. 태화형은 그 부분에서 나와 많이 다르다. 고민하는 시간에 무작정 시작한다. 반면 나는 직관적이고 충동적으로 매달리기보다 명분과 의미를 찾으려고 하니 평생 진척이 안되는 거다. 정말 못할 수도 있겠다, 라는 위기감이 점점 커진다. 장기적으로 영화를 만든다면 나 같은 작업 스타링느 할 때마다 힘들고 태화 형은 할 때마다 능숙해질 거라고 본다.
엄태화: 석재는 나와 영화를 만드는 기준이 다르다. 나는 재밌겠다 싶으면 주제를 던지겠다는 생각없이 그냥 시작하고 나중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고민한다. 반면 석재는 처음 소재를 접할 때부터 그 고민을 한다. 그래서 <소셜포비아>와 <잉투기>가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는데도, <잉투기>가 보여주지 못한 것들을 보여준 것 같다. 석재 같은 경우에는 그런 고민을 별로 안 해도 되는게, 이미 대중과 그런 지점에서 맞닿는 감각이 있는 것 같다. 수상도 많이 했고, 6천만원 들여 찍은 영화가 25만이라는 관객을 동원하지 않았나. 그래서 내가 옆에서 계속 '그냥 써'라고 이야기 해준다.
Q: 고민의 시간 끝에 내놓을 다음 작품을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
홍석재: 첫 영화가 잘됐으니 부담이 된다, 그런 건 나 역시 없다. 그런데 정말 지금 시나리오가 진전이 잘 안된다(아 감독님 머리 이젠 어깨에 닿겠더라). 관심은 국한되어 있고 마이너한데. 그걸 몇 백만명이 보는 상업영화로 컨버팅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 관객에게 대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키워드가 있고, 그런 키워드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연출자들이 존재한다면, 나는 그쪽으로 아예 결여된 게 아닌가하는 이런저런 고민들을 하고 있다. 하위문화에 관심이 있는 내 모습을 긍정하면서 어떻게 잘, 더 많은 사람들과 만늘 수 있을까를 고민 중이다. 거창한 게 아니더라도 현실을 반여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고 있다.
윤성현: 누구도 좀비라는 소재로 천만 관객 영화가 나올 거라곤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관객의 소재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크고, 소재가 가진 힘이 크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이젠 상업적이다, 아니다 예측하는 것 자체가 지금의 관객을 저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기존 영화에 대한 강박을 가지거나 스타 캐스팅에 대한 압박을 가지지 말아겠다 싶다.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고 싶고, 동시대 감독들도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