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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요코하마 일포로부터 (3) - 별들이 너를 위해 정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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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1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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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어느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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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잡이를 하며 살아가던 마리오는 임시 우편 배달부가 되어 편지를 나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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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탄 마리오가 매일 찾아가는 사람은 칠레에서 여기로 쫓겨온 시인 파블로 네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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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는 네루다에게서 시를, 은유를, 아름다움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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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던 네루다가 물었다. 그물이 어떻지? 마리오, 고기잡이 그물에 어울리는 형용사가 필요해. 어부에게서 태어났고 어부가 되려고 했던 마리오는 답한다. 서글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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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서글퍼?' 하고 되묻더니, 그대로 쓴다. '나는 서글픈 그물을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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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가 친구에게 보낼 거라며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달라는 부탁을 하자 마리오는 첫눈에 반해버린 사람의 이름을 댄다. 베아트리체 루소. 사랑에 빠진 청년은 은유를 쓸 줄 아는 시인이 되었다. 

 

https://twitter.com/zzinpro/status/1138428594454011904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게. 

전 할 수 없어요.

할 수 있어. 말해 봐. 

베아트리체 루소. 

좋아, 잘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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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가 섬을 떠나며 편지하겠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남겨진 마리오는 상실감에 시달린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한 결혼. 곧 태어날 첫 아이. 하지만 음울해지는 세상사. 영원히 잃어버린 것 같은 짧은 우정. 

 

 

네루다가 머물던 집에서 그에게 보낼 옛 소지품을 정리하던 마리오는 무심결에 녹음기를 틀고, 벌써 화석이 되어가던 질문이 그에게 닿아 되살아난다. 마리오,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주게. 

 

 

너무 늦어버린 대답일지도 모르지만 마리오는 자신이 생각하는 섬의 아름다움을 하나씩 찾아내 녹음하기 시작한다. 편지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ㅡ 녹음을 했다. 소리를 채집하는 것으로 시를 지었다. 네루다가 섬과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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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youtu.be/gSHc6Fn2KSw

 

 

Number one: waves at the CaIa di Sotto. Small ones.

Number two: waves. Big ones.

Number three: wind on the cliffs.

Number four: wind through the bushes.

Number five: sad nets belonging to my father.

Number six: church bell of Our Lady of Sorrows... with priest.

Number seven: starry sky over the island.

Number eight: Pablito's heartbeat.

 

 

1번. 칼라 디 소토 바다의 작은 파도

2번. 큰 파도

3번. 절벽의 바람

4번. 덤불에, 나뭇가지에 이는 바람

5번. 아버지의 슬픈 그물

6번. 신부님이 치시는 교회의 종소리

7번. 별빛이 반짝이는 섬의 밤하늘

8번.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들 파블리토의 심장 소리

 
 
 

평생 바다에서 사셨던 아버지의 손에 들린 서글픈 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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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아름다워요. 이토록 아름다운지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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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선생님이 모든 아름다움을 갖고 가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저를 위해 남긴 것이 있음을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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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차준환이 남겨두고 떠난 오래된 편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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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포를 보면 떠오르는 파블로 네루다의 한 마디, 

"나는 누구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믿는다."

 

 

팬들 못지 않게 준환이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관찰해온 캐나다 해설자 테드 바튼은 2016년 요코하마 일포를 보고 차준환을 all-round skater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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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을 두 번 경험할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도 해설자는 어제 일처럼 요코하마 주그프를 기억하고 있었다. 연도를 틀렸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팀트로피 갈라에서 투란도트를 보던 그가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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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x.com/_l_i_n_g/status/1704868486131122464

 

이 청년이 2016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주그프에 출전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스타의 등장을 확인할 수 있었죠. 

그리고 2023년 현재, 그의 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https://twitter.com/estellasohn/status/164222712814099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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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훌륭한 스케이터이자 훌륭한 인간이라는 것.

테드 바튼은 팀트로피보다 한 달 앞서 있었던 세계선수권에서도 애정과 긍지가 가득한 기록을 써내려갔고 

 

 

 

여기에 다른 사람이 쓴 월드 리뷰도 있다. 

 

 

Skating to music, The Clockmaker 일부 발췌

https://skating-to-music.blog/2023/04/02/the-clock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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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차준환 선수의 주니어 시절부터 그의 커리어를 오랫동안 지켜봐 왔습니다. 항상 그의 스케이팅을 좋아했고 그의 프로그램을 즐겨왔죠. 그가 얼마나 훌륭한 재능과 밝은 미래를 가진 선수인지 처음부터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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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모든 세월 동안, 그의 점수와 메달 획득과 발전을 방해하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컨시 문제, 언더로테이션, 끝없는 부츠 이슈, 계속되는 부상... 마침내 모든 별들이 정렬된 것처럼 보였을 때조차도, 항상 그에게서 영광을 빼앗아가는 다른 이들이 있었습니다. 

 

 

항상 무언가, 또는 누군가가 있었어요. 

 

 

오래된 스타, 

새로운 스타, 

더 어려운 점프 구성을 뛰는. 

 

 

그래서 그는 정상에 오르지 못할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결코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 같았어요. 그의 우울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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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23년 3월, 사이타마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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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달 가능성과 커리어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해졌을 때, 그는 두 번의 눈부신 스케이팅을 선보이며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메달을 쟁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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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이것은 단지 상승세의 시작일 뿐입니다. 

바라노니, 시계 제작자(the clockmaker)가 아직 그의 가장 위대한 걸작을 만들지 않았기를. 

바라는 바이니, 우리가 '높이 날아오르고, 눈부시게 빛나고, 불타오르고, 왕관을 쓴' 그를 볼 때가 온 것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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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재다능한 재능이 끝없이 펼쳐지며 회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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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었을 때는 너무 긴 분량 때문인지 글 내용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순간 탁 와서 박힌 단어도 메달, 재능, 왕관 같은 것이 아니었다. star. all stars had finally aligned 마침내 모든 별들이 정렬된 것처럼 보였을 때조차도. 별. 언젠가 차준환은 별을 따서 들고 온 적이 있었다. 

 

https://twitter.com/wording_rang/status/9295826964892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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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짧게 머물고 가버릴 줄 알았더라면 있는 동안 더 열심히 사랑해주면 좋았을 거라고 후회했다. 그때는 누구 할 것 없이 사랑할 에너지가 바닥나있었다. 올림픽을 끝내고 추억이란 걸 곱씹을 여유가 생겼을 쯤에야 시작했다. 영영 다시 못 볼 프로그램이란 것을 알면서도 행성을 생각하는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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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어떻게 마음 안에 두는 게 좋은지. 이루지 못한 것, 완성되지 못한 이야기는 어디에 두고 말을 걸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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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그걸 고민해와서, 준환이가 월드에서 거둔 결실을 축복하는 리뷰를 처음 읽었을 때도 기억에 남는 단어라곤 그거 하나밖에 없었다. 

별. 행성 프로그램 말고도 준환이에게는 많은 별들이 있다. 

 

 

일포, 별과 바다와 바람과 첫사랑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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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아스라이 먼 별 헤매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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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윗스, 소년의 꿈을 지켜보고 있는 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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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란, 밤이 물러가고 별들이 사라지는 새벽이 오면 승리할 칼라프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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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하나 더 들자면 고요한 밤과 맹렬한 밤을 가로지르는 월광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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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모든 별들이 일렬로 정렬한 것처럼 보일 때. 

준환이를 위해 별들이 줄을 맞춰 선다면, 그 별들은 정체가 뭘까. 

 

 

 

 

우주적인 이벤트라는 행성 정렬이 일어날 때가 있다. 행성 퍼레이드, Grand Alignment 또는 Grand Cross. 태양계 행성들이 거의 완전하게 일직선으로 줄지어 늘어서는 일을 뜻하며, 드물긴 하지만 맨눈으로도 볼 수 있다. 한 두 개도 아닌 행성들이 밤하늘에 나란히 떠있는 광경을 보고 옛날 사람들은 불길한 멸망을 점쳤다고 한다. 재앙, 지진, 파괴, 죽음. 과학이 발전하면서 그런 신화는 희미해지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별들이 한줄기 직선으로 배열되어 있을 때 느껴지는 강렬한 예감과 신비로움만은 사라지지 않아서, 지금도 많은 창작물에서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을 '별들이 정렬되었다'라고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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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프로그램에서 준환이가 맡았던 역할은 뭐였을까. 우주를 건너는 순례자? 사람들이 별을 우러러보던 신화 시대를 이야기하는 음유시인? 평화, 전쟁, 환희의 별을 거쳐 지구에 당도한 어린 왕자?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성장하는 작은 소년? 아니면 그런 스토리는 없고 각각의 별들이 나타내는 이미지를 몸으로 표현하는 프로그램이었던 걸까. 준환이가 아예 사람이 아니라 별이었을 수도 있겠다. 의상이 파란색이니까 당연히 지구별. 만 15세와 16세에 맞이한 첫 시니어 시즌, 준환이는 우주로 나아갔다. 평탄한 시절이 아니어서 가고자 했던 별에는 다다르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먼 곳에 있다. 몇 년 동안 행성에 대한 감상은 그 정도 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번 월드가 끝나고 나서 다시 상상해봤다. 첫 올림픽을 위해 준비된 프로그램이 행성이라면, 차준환은 정말 무슨 이미지나 캐릭터를 연기했던 거지? 지금껏 공상했던 대로 행성을 노래하는 사람? 행성들 중 하나인 지구? 

 

 

혹시 항성일 가능성은?

대충 뭉뚱그려 별이라고 부르지만, 항성과 행성은 다르다. 

 

 

태양계에서 스스로 빛과 열을 내는 항성은 태양 뿐. '별 Star'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천체도 실은 태양밖에 없다. 그 외에는 '행성 planet'이다. 스스로는 빛을 내지 못하고 항성 주위를 도는 천체들, 지구부터 목성, 천왕성과 해왕성까지. 그리고 그 행성들 주위를 도는 천체가 위성, 지구에는 달.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걸 알지만, 만의 하나 준환이가 위성도 행성도 아닌 항성이었다면. 태양이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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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바라건대 

우리가 

높이 날아오르고, 눈부시게 빛나고, 불타오르고, 왕관을 쓴 차준환을 볼 수 있기를. 

 

 

태양 같은 차준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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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태양은 붉다고 생각하겠지만

차준환이 생각하는 불꽃은 새파랗게 타오르니까. 

 

 

얼음 위에 서서 행성을 이야기할 때 

너는 그 행성들을 비추는 항성, 유일한 태양이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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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애하는 파블로 선생님. 전 마리오입니다. 
절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에 선생님 친구분께서 우리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신 적이 있는데, 생각나는 게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이젠 알겠어요. 그래서 이 테이프를 보내드립니다. 친구분들과 함께 들으시거나, 아니면 혼자 들으셔도 되고요. 그럼 저와 이탈리아가 생각나실 거예요. 
 
 
전 선생님이 떠날 때 좋은 건 모두 갖고 가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를 위해 뭔가를 남기셨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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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시를 썼다는 것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읽어드리진 않겠어요. 창피하니까요. 
 
 
제목은 '파블로 네루다에게 바치는 노래'
내용은 바다에 관한 것이지만, 선생님께 바치는 시입니다.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전 이걸 쓰지 못했겠죠.
 
 
이 시를 사람들 앞에서 읽게 되었습니다.
비록 목소리는 떨리겠지만 전 행복할 겁니다. 
 
 
 
 
 
 
솔직히 말하는데 한때 나도 마리오처럼 생각했다. 다른 프로그램들은 뭔가를 남겼고 아직도 곁에 있는데 행성이나 여향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가끔 서운하고 오래 슬펐다. 너희는 떠나면서 좋은 걸 전부 갖고 가버렸네. 흔적도 자취도 하나 안 남기고. 
 
 
하지만 이번 시즌에 내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겨우 알았다. 부지런히 옛날 프로그램을 복습하던 백성들이 가끔 마잭을 떠올리게 만든다면서 옛 노비스 주니어 프로그램 사진들을 들고 왔다. 맘보와 코러스라인. 이번 시즌 제일 재미있는 리뷰 중 하나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죽무는 주니어 버전 시계공이지. 월광도 같이 넣어줘. 골든아워가 지나가버린 사랑에 대한 추억이래. 아니 똑같은 테마인데도 일포 시즌엔 사랑이란 단어를 그렇게 부끄러워하더니 다 컸네. 
 
 
그렇다면 남아있겠지. 여인의 향기도 행성도. 그때 무엇을 그려내려고 했든 무슨 역할을 맡았든 네가 연기했던 행성은 어딘가로 없어져버리지 않고 지금의 너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 함께 있었을 것이다. 시계공이 월광과 죽무를, 천죽이 여향을 안고 있었던 것처럼 007을 수행하는 네 옆에 행성이 있었다. 난 그렇게 믿는다. 
 
 
평창 시즌의 차준환에게도 그런 이미지를 실현할 힘이 충분히 있었지만, 네가 꿈꾸던 그 '거대하고 웅장하고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신체적인 성장과 기술의 완성만이 아니라 세월까지도 좀 더 필요했다. 굳세고 단단해진 너는 우리를 장대한 이야기로 데려갔다. 007 노 타임 투 다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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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세계선수권에서 별들이, 행성들이 항성 차준환을 위해 정렬했다면 아마 그들은 다른 무엇도 아닌 지난날의 준환이였을 것이다. 

아홉 살, 열 살, 열다섯 열여섯, 10대와 20대를 거치며 네게 머물렀던 모든 프로그램들이 월드에서의 너를 위해 하나도 빠짐없이 일직선으로 정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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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사이타마에서 로미오는 독을 삼키고 죽었다. 

그 애가 널 두 번 죽게 내버려둘 리 없지. 차준환은 살아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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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영상으로 박제된다 해도, 프로그램들이란 시즌이 끝나면 모두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우리와 준환이를 위해 남겨두고 간 것들이 있었지.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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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아워를 지나 어두움이 내려앉고 밤이 찾아오면, 새로운 별을 향한 항해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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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쳐온 별들 모두 밤하늘에 별자리로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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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지난 시간들이 

네 모든 프로그램들이 

 

 

네 주위를 맴돌며 

네 안에 깃들어 있었던 모든 별들이 

 

 

오로지 너를 위해 그날밤 정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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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떠오른 행성들도 

다음에 올 너를 위해 정렬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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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수많은 행성들에게 사랑과 축하를 전하며 

매번 더 먼 우주까지 나아가는 너의 여정에 앞으로도 우리가 동행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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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미아가 되고 어긋난 궤도에서 헤매더라도 

낯선 별을 찾아 떠나는 모험을 멈추지 않기를. 

 

 

시계공은 아직 그의 가장 위대한 걸작을 만들지 않았고 

우리가 여행하는 은하에서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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