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모든 이야기는 또다시 2016 요코하마 주니어 그랑프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아직 GOE 시스템이 -3부터 +3까지밖에 없었던 시절, 첫 랜딩부터 GOE 2점을 받았던 쿼드러플 살코
해설에서는 이미 처음부터 상당한 수준이었던 쿼살, 최연소 쿼드러플 점프를 뛸 정도로 빠른 성장세, 넓은 링크장을 자유자재로 누비고 다니는 스피드 등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장점이 나열된다.
그들이 예감했듯 차준환은 2년 뒤 평창 올림픽에 나가게 되며,
올림픽 프리 스케이팅은 요코하마와 같은 일 포스티노.
거기서부터 다시 4년 후, 투란도트 의상을 입은 준환이는 일포 엔딩 포즈를 취하며 베이징 올림픽을 기다렸다.
프로토콜 상으로 준환이가 실전에서 트리플 악셀을 뛰기 시작한 것은 14-15 시즌부터. 연습은 이전부터 해왔으며, 이 시즌에는 거의 프리 스케이팅에서만 트악을 시도했다. 마지막 대회였던 동계체전에서는 쇼트에도 트악을 넣었고, 15-16 시즌부터는 쇼트와 프리 구성 모두에 트악이 포함된다. 국제대회에서 처음 트악을 인정받은 건 2015 어텀 클래식 프리 스케이팅 흑조(어텀에서 트악을 뛴 선수는 준환이밖에 없었다.), 국내에서는 2015 랭킹 죽무 쇼트. 2016 주니어월드 쇼트 프로그램에 출전한 남자 싱글은 모두 38명, 거기서 더악이 아닌 트악을 뛴 건 17명. 준환이도 그 중 하나였다.
그다음 시즌 주니어 그랑프리에 데뷔한 준환이는 4회전 살코를 뛰기 시작했고, 점프 구성은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
14-15 시즌 : 1트악(프리)
15-16 시즌 : 2트악(쇼트, 프리)
16-17 시즌 : 1쿼드 2트악(4회전은 프리에만)
지금 같은 성장속도라면 다음엔 뭘 보여줄까 모두가 기대하고 있었을 때
https://twitter.com/180ENTJ/status/1502358105513869312
신체변화가 폭풍처럼 준환이를 휩쓸고, 지나가지 않았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몸에 적응하려고 애쓰던 소년은 성장통으로도 모자라 부상을 입어 멀쩡한 곳이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도 자국에서의 올림픽 데뷔를 위해 쇼트 1쿼드, 프리 2쿼드(쿼살 1, 쿼토 1)로 구성을 올리려고 전쟁 같은 싸움을 하고 있었다. 여름에 열렸던 평창 1차 국가대표 선발전을 복기하는 일에는 아직도 용기가 필요하다. 준환이는 쇼트에서도 프리에서도 모두 쿼살 랜딩에 실패했다. 프리에서는 2개의 트악을 모두 싱글로 처리한다.
많은 경우 피겨에서 체형 변화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며 남자 선수들 역시 성장이 완전히 멈추기 전까지는 흔들리고 무너지는 점프를 다잡기 위해 꽤 오랫동안 고생해야 한다. 코치의 말에 따르면 준환이는 '몸은 자라고, 부상으로 망가지고, 타이밍은 완전히 엉망이 된 상태로(His body was growing, he was broken, his timing was all messed up.) 시니어 그랑프리 데뷔 시즌을 맞이했다. 준환이의 화려한 주그프 데뷔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하루 종일도 가능하지만, 첫 시그프 때 했던 고생에 대해서는 차마 단어 하나도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 준환이 역시 당시를 제일 힘들었던 시기로 기억한다.
https://twitter.com/jyunang1021/status/1495717434015481859
새해가 밝고 올림픽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종합선수권에서 준환이는 쇼트 1쿼드, 프리 2쿼드 대신 쇼트 1트악, 프리 1쿼드 2트악을 가져왔다. 이 구성은 평창까지 이어졌고 준환이는 아쉽게도 올림픽 프리 스케이팅에서 쿼살을 뛰다 넘어졌다. 그러나 나아지지 않은 몸 상태에서도 3-3과 트악이 준환이를 버티게 했고 프리에서 국제대회 퍼스널 베스트를 경신한다. 차준환은 언제나 언제까지나 평창의 아이, 평창의 소년이다.
https://twitter.com/180ENTJ/status/1495130002978840576
https://twitter.com/Stsquence/status/1489566822730911750
자국 올림픽을 경험한 소년은 18-19 시즌에 반환점을 돌아 전과는 전혀 다른 선수가 된다.
He turned the corner this season. Starting in summer – I could see just a different person.
우리가 본 차준환은 지금까지 봐왔던 차준환과는 달랐다. 그는 전혀 어린 아이 같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스케이팅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고 스케이트를 탔다. 인내심 있게 스케이팅했고 자신감 있게 점프를 착지하고. 그에게는 새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는 음악과 함께 움직였고, 해냈다. 스타가 탄생했다. 사실이다. 다음달이면 그는 만 17세가 된다.
평창을 위해 준비했던 쇼트 1쿼드, 프리 2쿼드 2트악이 드디어 가시화된 것도 이 시즌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러츠 콤비네이션 점프의 연결 트리플 점프가 바뀌었다. 트리플 토 룹에서 트리플 룹으로.
3러츠 3룹(트럿트룹) 콤비 점프는 4토룹 2토룹(쿼토더토) 콤비와 기초점이 같다. 다만 GOE에 관해서라면, 가산점은 처음에 뛰는 점프의 기초점에 연동해 매겨지므로 4회전을 뛰는 후자보다 3회전을 뛰는 전자의 가산점이 낮은 편이다.
그러나 트럿트룹 콤비는 다종 쿼드 시대니까 쇼트에서도 2쿼드를 뛰어야 고득점을 노릴 수 있다는 절대 명제 아래에서 4~5년 동안이나 준환이를 보호해왔다. 쿼드를 하나 더 넣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트악과 함께 철통 같은 컨시로 기술점을 지키고, 쇼트에 강한 준환이가 많은 예술적 도전을 할 수 있게끔 도왔다.
22-23 시즌 트악에서 많은 기술점 손실이 있었고 트럿트룹도 흔들린 적이 있었다는 걸 상기하고 다시 찬찬히 점수를 들여다보면, 어떻게 이런 성과를 냈는지 놀라울 정도다. 쿼토에서 고전을 거듭할 때 트악과 트럿트룹이 손해를 만회했던 것처럼, 이번 시즌엔 그간 믿고 의지하던 점프들 대신 오래 고생시켰던 쿼토가 든든한 수비대장이 되어준 셈이다. 공격대장 쿼살 옆에서.
그러나 나도 다른 사람들도 모순된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 넘어지는 건 견딜 수 없어하면서 점프는 한 시즌만에 달고 오길 바랐다. 준환이는 평창에서부터 줄곧 자신의 페이스를 지켜가겠다고 공언해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준환이를 재촉해 빨리 성과를 내라고 닦달했다. 차준환이 스스로를 증명하고 입증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피겨는 도깨비 방망이로 부리는 요술처럼 하룻밤만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https://twitter.com/junjuly8_/status/1639607991250067457
좁아도 너무 좁은 판에서 훈수를 두는 사람들만 열에 아홉, 준환이는 거기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나가는 힘을 기르며 올림픽 사이클 2번을 보냈다. 서둘러 급히 가지 않고 발밑에 있는 토대를 단단히 다져가며 일구는 밭. 준환이가 일일이 손으로 돌을 골라내며 씨를 뿌렸다는 걸 이제는 안다.
처음엔 프리에 트악 하나, 다음 시즌엔 쇼트에도 프리에도 사이좋게 하나씩. 그다음엔 1쿼드 2트악. 오랜 시간을 투자하며 완성시킨 2쿼드 2트악. 트럿트토에서 트럿트룹, 그리고 트플 오일러 트살에서 트럿 오일러 트살.
https://twitter.com/Olympics/status/1646461370391572480
준환이는 시니어도 아닌 2017 주월에서부터 단독 쿼살에 더하여 4S+2T를 뛰었다. 4회전 콤비네이션을 연습하기 시작한 건 최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역시 같은 시합에서 늘 뛰던 트플 오일러 트살 대신 트악 오일러 트살을 시험해보기도 했다.
https://twitter.com/junjuly8_/status/1508593022141104128
같은 오일러를 첫 시니어 그랑프리 스캐에서도 시도했고, 뒤에 똑같은 오일러 트살이 붙어도 앞에 오는 점프를 트플, 트럿, 트악 다양하게 시도하고 조합하면서 제일 좋은 구성을 찾아 최적화하려고 했다. 준환이가 가지고 있는 표현력과 예술성을 희생시키지 않고 뛰기 위해 트리플부터 쿼드까지 얼마나 많은 점프 구성을 시험해왔는지 모른다.
https://twitter.com/jomag55/status/1611372515137564674
https://twitter.com/jhc1021_/status/1584402359744331779
점프를 꽉 채우기 위해 지상훈련과 체력강화에 힘쓰고 있다. 트악 더악 시퀀스를 안정시키려고 엄청나게 애썼다는 건 이번 시즌 경기를 한 둘만 지켜본 사람도 알 일이다.
그리고 19-20 시즌, 새로운 도전.
준환이는 시즌 첫 국제대회 쇼트에서 4S+3T, 4T 그리고 프리에서는 기존에 뛰었던 쿼살과 쿼토에 더해 4F 쿼드플립을 선보였다. 4-3 콤비도 쿼플도 처음이었다. 이걸 그랑프리에서 시도한다는 것은 역시 위험한 모험이었기에 스아에서는 쇼트 구성이 이전과 동일하게 변경된다. 그럼에도 두 번째 그랑프리 컵오차 쇼트에서 준환이는 충격적일 정도로 낮은 점수를 받았고 이런 기록은 15-16 시즌 이후 처음이었다. 팬들을 뒤흔들게 만든, 정말로 큰 고비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최악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짓을 저지르지 않고, 조심스러운 다정함에는 똑같은 무게를 지닌 다정함으로 답했다. 차준환이 어떤 선수인지는 이 장면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말할 수 있다.
https://twitter.com/viadante1/status/1497896732553728001
고난이도 기술을 시도하든 말든 참담한 수렁에 빠지는 듯한 기간이 이어지든 말든 신체적 성장은 끝날 기미가 없어보였다. 시즌 초 수척해질 정도로 말라서 나타난 것과 몸이 계속 자라는 건 아예 다른 카테고리에 속하는 문제였다. 매 대회마다 달라지는 게 느껴질 만큼 부쩍부쩍 크고 있는 육체를 공중에서 4회전하기에 적합하도록 컨트롤하는 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컵오차 프리와 국내대회를 거치며 구성은 이전 시즌과 동일하게 돌아왔다. 프리 2쿼드 2트악이라는 구성으로 국내대회에서 클린한 적은 있었지만, 아직까지 국제대회 클린은 없었다. 평창 올림픽 2년 뒤, 다시 자국에서 열린 챔피언십 대회 사대륙. 눈앞에서 등 뒤에서 양옆에서 넘실대는 태극기에 둘러싸여 차준환은 2쿼드 2트악을 뛰어낸다.
그날의 더파윗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가. 내가 몇 년이나 그래왔듯 꺼내보기도 싫은 프로토콜과 한맺힌 마음으로? 망친 경기, 돌이킬 수 없는 실수, 이 이유 저 이유로 잊고 싶은 대회는 어떤 방식으로 처리해야 할까. 기쁨은 금방 잊혀지고 고통은 몇 시즌이 지나도 마음을 후벼파는데 그래도 그늘진 곳에 있는 경기를 계속 떠올려야 하나. 그래야 한다. 준환이가 걸어온 길에서 어둠과 빛 중 하나를 제외하고 다른 하나를 말할 수는 없다.
https://twitter.com/day_off_daying/status/1636713494329344001
2012년 아시안 피겨 스케이팅 트로피부터
2023년 월드 팀 트로피까지
올해로 국제대회 출전 10년을 넘어서는 동안
상승과 하강, 비상과 낙하.
우리가 빛의 속도로 다른 은하에 간다 해도 무슨 소용인가.
하늘로 날아오른 것만 되새김질하느라 깊은 골짜기와 어두운 밤을 통과한 나날을 잊어버린다면.
구성을 높이려면 연기와 예술적인 측면은 어느 정도 포기하고 지나가야지 모든 걸 손에 쥘 수는 없다. 그러다 다 망한다. 심판들이 언제든 배신하기 쉬운 구성점보다는 기술점을 먼저 노려야지 높은 기술점을 받을 수 있는 선수라는 걸 각인시켜놓고 예술해도 안 늦잖아. 이거 스포츠야. 하지만 차준환은 높은 기술과 피겨만의 아름다움 모두를 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이만하면 할 만큼 했다는 손쉬운 타협을 시도하는 선수가 아니다. 목표는 언제나 기술과 예술 전부.
https://twitter.com/bluestar_1021/status/1585252548034048000
https://twitter.com/180ENTJ/status/1494577226112978952
https://twitter.com/jhc1021_/status/1652263902963712001
둘 다 자신 있으니까.
https://twitter.com/180ENTJ/status/1492962718584049664
그렇다면 2020 사대륙은 당연히 차준환이라는 선수가 고난도와 표현 양쪽 모두를 포기하지 않을 때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스케치를 마치고 첫 채색을 시작한 대회로 쓰여져야 마땅하다. 요코하마 주그프에서의 일포가 세계 신기록을 수립해서만이 아니라 1쿼드와 2 트악이라는 고난도 점프와 더불어 예술적인 성취를 이뤄내서 높이 평가받는 것처럼.
2020 목동 사대륙과 2021 세계선수권 사이는 텅 비어있다. 사대륙에서의 기세를 타고 갈 수 있었던 2020 월드도 취소되었고 어떤 그랑프리도 국제적으로 열리지 않았으며 캐나다 국경은 봉쇄되었다. 성한 곳 하나 없는 몸으로 관객석이 텅 빈 월드에 출전한 준환이는 올림픽 출전권 2장을 쥐고 기진맥진하여 귀국했다. 가을, 드디어 베이징 올림픽으로 가는 시즌이 시작되었는데도 준환이는 크리켓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대역병 기간 동안 국대들조차 지방에 있는 아이스링크를 전전하며 귀한 시간을 이동에 허비했다.
차준환이 캐나다에 있는 그의 훈련 장소로 돌아가 투란도트 프로그램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https://twitter.com/insideskating/status/1457094645188595718
그런 정제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
2년이나 이어진 팬들의 기원은 나중엔 소리 없는 비명 비슷한 것이 되어갔다.
올림픽 시즌이에요.
준환이를 크리켓으로 보내주세요.
제발.
그러나 어둠이 깊으면 빛도 더 환히 떠오르는 법이라고, 올림픽은 4년 전과 마찬가지로 준환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https://twitter.com/180ENTJ/status/1515046287975976960
https://twitter.com/180ENTJ/status/1501613577215434753
https://twitter.com/180ENTJ/status/1492487340878856195
https://twitter.com/180ENTJ/status/1495713596063596545
평창을 경험한 18-19 시즌 준환이가 눈부시게 반짝였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베이징에서 돌아온 준환이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꿈 위에 기대를, 그 위에 희망을 쌓아올려가며 손꼽아 기다렸다. 대회보다 링크 면적이 상당히 줄어드는 아이스쇼에서도 준환이는 쿼살을 뛰었다. 쿼살에 트악, 트플까지 계획했다. 연결 점프만 하나 더 있다면 그 구성 그대로 대회에 나가도 된다. 마음 편히 즐겨도 되는 갈라에서 쿼살을 성공시키는 모습을 보며 기대는 더 부풀었다.
새 시즌 선곡을 발표하는 뉴스에서는 4-3 콤비를 연습하는 모습이 나왔으며
트리플 연결 점프를 붙이는 연습은 쿼살과 쿼토 어느 쪽이라도 가능하도록 연습 중.
https://twitter.com/estellasohn/status/1640748080235687942
플라잉 체인지 콤비네이션 스핀을 가져오면서 스핀 구성도 더 높아졌는데
https://theqoo.net/2597094683
https://twitter.com/chacha_2127/status/1608397232793096193
정작 새 시즌을 앞두고 준환이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불안과 의심을 자기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 투쟁했을 시간을 생각하면 내 마음마저 고단해지지만, 올림픽을 두 번 거치고 더 높은 이상을 가지게 된 선수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면 되려 그게 더 비현실적일지도 모른다. 준환이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날지 않으면 닿을 수 없을 만큼 높이 있으므로.
챌린저 두 번을 거치고 그랑프리가 개최되었을 때 준환이는 쇼트에서 4-3 콤비를 뛰려던 계획을 수정하고 몇 년간 써서 익숙해진 점프 구성으로 돌아왔다. 쇼트에서부터 4-3 콤비를 넣겠다는 플랜도 유효했지만, 작은 요소 하나까지 잘 짜여진 프로그램으로 쇼트 1쿼드 100점을 노리겠다는 전략 역시 의미가 있었다. '기술과 프로그램적 구성 모두에서 균형잡힌 종합적 아름다움'으로 승부를 보는 건 차준환의 특기니까.
시즌 초반보다 점프 수준을 낮추었다고 해서 준환이가 쇼트 100점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심판들은 올림픽 시즌 쾌도난마처럼 연속 클린 행진을 거듭하던 시계공에게 끝까지 세 자릿수 점수를 내주지 않았지만, 선수와 코치진에게는 시계공~마잭으로 반드시 100점을 받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본다.
https://twitter.com/tto_1021/status/1655618704942727170
4회전을 뛰는 어지간한 남싱들이라면 연습에서 3~4종 쿼드를 랜딩하지 못한 선수가 없고, 다른 요소 없이 그 점프 하나만 뛰어보라고 하면 역시 많은 선수들이 더 많은 쿼드 착지에 성공할 것이다. 하지만 연습과 실전은 다르고, 그냥 하는 것과 잘하는 것, 그냥 뛰는 것과 정말 잘 뛰는 것은 더 다르다. 높은 기초점을 노리고 어려운 기술을 배치했다가 삐끗하면 기초점도 온전히 가져갈 수 없다. 마잭과 007 선곡은 선수 본인이 직접 결정했고 쉽지 않은 프로그램을 잘 소화하기 위해 준환이는 '일단 어쨌든 많이'가 아니라 '단 하나라도 꼼꼼히, 그래서 모든 것을 확실히 잘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https://twitter.com/chacha_2127/status/1652269700116799490
https://twitter.com/jhc1021_/status/1655631484232019968
https://twitter.com/_hiraka_/status/1625273420081684480
기본기를 다지고 내실을 쌓기로 한 결정은 성공했다. 월드 쇼트에서 쿼살 가산점은 몇 년만에 최고점을 기록하며 4점대를 깼고
'이름 좀 있는 남싱 중에 쿼토 쿼살 못 뛰는 선수 아무도 없다'라는 소리를 들으며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었던 그 단독 쿼토와 쿼살로, 차준환은 월드 프리에서 기술점 105.65점 중 26.89점을 쓸어담았다. 도박도 없이, 꼼수도 없이, 요행수를 바라지 않고 몇 시즌 내내 묵묵히 정진하면서 갈고 닦아온 기술들은 각자가 가진 최대치의 힘을 발휘해 다종 쿼드에 조직적으로 대항했다.
더 낮은 기초점을 가진 점프로 더 높은 기초점을 가진 점프를 이길 수도 있다.
준환이는 4회전 개수보다 4회전의 질을 높이는 것에 가치를 두었고, 프로그램 안에서 그 4회전을 어떤 경지까지 이끌어내기 위해 육체와 마음과 정신 모두를 던져가며 헌신했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면서도 노력해왔던 근간이 준환이를 지켜냈다.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쿼토에서 넘어지고 트악이 흔들리더라도 쿼살은 축적된 노력이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보여주며 준환이를 밑에서 받쳐 올렸다. 처음부터 잘 뛰었다지만 그런 쿼살이라고 매번 성공했던 건 아니다. 결정적일 때 무너진 적도 있다. 일례로 평창 프리에서 준환이는 쿼살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이번 시즌에도 실수했었다. 그러나 위험천만한 상황에 봉착했을 때 준환이를 떠받쳐 끝까지 내달리게 해준 것도 쿼살이다.
예술과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 쉽게 저지르는 오류가 있다. 어린 나이에 짜릿하게 이뤄낸 큰 이벤트만 두고두고 칭찬하는 것. 준환이가 만 14세에 최연소로 4회전을 뛴 기록은 물론 대단하다. 우리도 아마 50년 뒤까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준환이 쿼살을 칭찬할 때 제일 첫머리에 오는 근거가 '최연소 쿼드러플 랜딩 성공'이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도 틀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쓰고 싶다.
We are what we repeatedly do.
Excellence, then, is not an act but a habit.
우리는 반복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다.
그렇다면, 탁월함은 행동이 아닌 습관이다.
당신의 진정한 모습은
당신이 반복적으로 행하는 행위의 축적물이다.
탁월함이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습성인 것이다.
국제대회에서 만 14세에 쿼살을 랜딩해서가 아니라
수년에 걸쳐 교과서처럼 강하고 아름다운 쿼살을 뛰게 되어서
단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오랜 세월 견고하게 다듬어온 노력 때문에
넘어졌다고 절망하지 않고 성공했다고 과장하여 흥분하지 않았기에
너의 쿼살이 훌륭한 건
재능 이상으로 네가 쿼살을 위해 쏟은 시간 덕분이다.
네가 천재라면 최연소로 쿼살을 뛰어서가 아니라,
남들이 쿼살과 쿼토만으로는 안 된다고 말했을 때
벽에 부딪혔다고 생각했을 때
가지고 있는 전부를 바쳐 기술을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한 시즌이 마무리되고 나서 기록들을 펼쳐보면 2보 전진했음이 확실한데, 왜 두 걸음 앞으로 나간 건 가볍게 여겨지고 1보 후퇴한 것만 기억나는지. 베올 사이클 동안 퍼스널베스트 10위 안에 들지 못한 적이 없는데도 뒤에서 누가 쫓아오고 있는 것처럼 조급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실적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영업사원처럼.
하지만 앞으로 나가는 길은 뒤로 물러가는 것처럼 보이고, 밝음은 때로 어두움처럼 느껴지며, 큰 그릇은 완성됨이 없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은 보통 이렇게 해석된다. 큰 크릇은 늦게 이루어진다. 다른 해석도 있는데 이걸 좀 더 좋아한다. 큰 그릇은 완성됨이 없이 보인다. 커다란 그릇은 늦게 완성되기보다는, '완성됨이 없다.' 다시 말해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는다. 그런 것처럼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큰 그릇을 상상해 보면, 정해진 모습이 없다. 정해진 용도는 더더욱 없다. 어떤 형체로 만들어질지 어떤 쓰임새를 가지게 될지 미리 재단할 필요가 없다.
어떤 프로그램은 이전보다 더 큰 차준환을 필요로 한다. 그러면 준환이는 바닥에 떨어뜨린 접시처럼 깨져나갔다. 더 많은 걸 담기 위해서. 몇 번이고 불구덩이로 들어갔다. 다시 만들어지려고.
낮은 곳으로 떨어질 때마다 지켜보는 이들이 몸서리쳐지는 두려움에 시달렸어도, 거센 저항을 받고 나면 준환이는 더 강해졌다. 큰 파도를 넘고 나면 호흡이 더 깊어진다. 넘어지면서 배우고 불에 달궈지면서 단단해지고 산산조각나면서 확장되어갔다.
https://twitter.com/ETinseon/status/1647013785788633089
스케이터로서 완성되었을 때 어떤 모습일지, 준환이가 어렸을 때는 조금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준환이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할지, 어떤 스케이터로 기억될지 떠올리기 어렵다. 정해진 용도가 없는 큰 그릇처럼 무엇이라도 할 수 있고 무엇이라도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월드 은메달을 두고 늦게 이루졌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차준환이라는 스케이터는 아직 완성됨이 없다.
다음에 눈을 뜰 때 그가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모른다. 무엇이든 담을 수 있고 어떤 것이라도 품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의 성장에 경계를 긋는 일 같은 건 이제 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