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잘 읽혔던 대본, 작가님 만난 뒤 믿음 생겼다"
[PD저널=이미나 기자] "글쎄요, 해봐야 알겠지만...열심히는 할 겁니다.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최근 종영한 SBS <스토브리그> 마지막 장면. 꼴찌 야구단을 가을야구의 주인공으로 끌어올린 백승수(남궁민 분)가 새로운 도전에 나서기 전 시청자를 향해 남긴 이 대사는, 어쩌면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한마디와도 같았다.
지난 5년 간 자신의 대본을 갈고닦아온 이신화 작가, 야구선수를 방불케 할 만큼의 훈련량을 소화하며 역할을 준비했던 ‘드림즈’의 선수들, 그리고 신인 작가의 작품에 흥행 타율이 높지 않은 스포츠 드라마를 알아보고 출연 의사를 밝힌 배우 남궁민까지. 드라마의 성패는 '해봐야 알겠지만', 먼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다 했던 이들이 있어 시청률 19.1%를 기록한(닐슨코리아 전국기준) <스토브리그>가 있을 수 있었다.
24일 만난 정동윤 <스토브리그> PD는 "아직 (드라마가) 끝났다는 느낌은 안 든다"면서도 "<스토브리그>는 처음으로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려면 삼박자가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작품"이라고 말했다. 톱니바퀴가 맞물려가듯, 그렇게 "산 넘어 산 넘기" 같았던 7개월이 끝났다. 공교롭게도, 7개월은 봄부터 가을까지 승부를 펼치는 프로야구의 한 시즌이 치러지는 시간과 같다.
<스토브리그>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는 작품이었다. 상대적으로 스포츠 드라마는 흥행이 어렵다는 선입견도 있었다. 어떤 점에서 이 드라마의 가능성을 봤나.
"(SBS에) 들어온 대본들을 PD들이 읽고 의견을 나누는 회의가 정기적으로 있는데, 그 회의를 준비하느라 <스토브리그> 대본을 봤다. <운명과 분노>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엄청 시끄러운 장소였는데도 잘 읽히더라. 흡입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작품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휴가도 앞두고 있을 때여서 '설마 날 시키겠나' 했다. (웃음)
<스토브리그>를 하려면 7월 중순에서야 (작업을) 시작할 수 있어서 (직접 연출하는 건)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신화 작가님을 만나 보니 동갑이고, 이야기도 잘 통하더라. 첫 만남 치곤 디테일한 질문도 드렸는데, 막힘없이 대답하시는 걸 보고 '정말 오랫동안 준비했고, 많은 것들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믿기로 했다.”
SBS '스토브리그'의 정동윤 PD(사진 맨 오른쪽) ⓒ SBS
넉넉하지 않은 시간이라 준비도 빠듯했다고 들었다.
"처음 팀을 꾸린 뒤 생방송 수준으로 준비한 것 같다. 야구단 의상부터 로고, 폰트 등 확인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꼴찌 팀 이야기라 그런지 제작을 도와줄 야구장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SK와이번스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줬다. '지금 야구가 조금 침체된 것 같은데, 분위기를 살려보고 싶다'는 홍보팀장의 말씀에 정말 야구인으로 야구를 사랑하는 분이라는 걸 느꼈다. 또 대본에는 프런트 이름이 6명밖에 안 나와서, 실제 야구단 프런트도 그 정도 규모인 줄 알았는데…실제 야구단 사무실 견학을 가보고 '이게 뭐야' 하고 뜨악했다."
그럼에도 실제 야구팬들에게 리얼리티가 높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완성도 있는 드라마를 내놨다.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하나.
"우리끼린 '가성비 안 좋은 드라마'라고도 했다. 회의 장면을 한 번 찍으면 헤어 나올 수가 없다. (웃음) 1, 2부 방송될 때쯤 7~8부를 찍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에게는 (모든 작업이) '산 넘어 산 넘기' 같았다. 초반 작업해, 하와이 촬영 가, 돌아오자마자 드림즈가 얼마나 야구를 못하는지 보여주는 장면 촬영이 있었고, 그 다음부터는 (야구단) 세트 촬영 찍어…. 정말 일이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초반부터 분위기가 좋았고, 스태프와의 호흡들이 잘 맞아서 간신히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백승수 단장이 떠나고, 드림즈가 좋은 기업에 매각되는 등 엔딩의 얼개가 처음부터 정해진 것들이었다. 어떻게 중간을 채우느냐의 문제지 방향은 뚜렷했던 만큼, 작가님을 믿을 수 있었다. 또 작가님이 열린 마음을 갖고 계셔서 수정 의견도 잘 받아주셨다. 그런 하모니가 잘 맞았다. 작가님과는 처음부터 누굴 통하지 않고 직접 소통하자는 약속이 있었고, 실제로 그랬다."
눈에 띄는 장면들도 많았다. 이를테면 사장실 안에서 권경민(오정세 분)과 백승수가 대립하는 장면에선 각 인물을 화면 구석에 배치해 대립각을 강조한 장면이라든지.
"처음부터 '연출력을 뽐낸다'는 생각보단 대본을 충실히 담으려고 노력한 장면들이 많다. 권경민과 백승수의 장면들은 오정세‧남궁민 씨가 정말 친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느낌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사장실이라는 공간 안에선 사실 할 수 있는 게 몇 없다. 그 안에서 (움직임의) 제한을 두지 않았고, 같이 상의하고 '이런 것들은 어떠냐' 물어본 경우도 있었지만 두 배우 역시 합을 맞춰보곤 각자 공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생각해 오셨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장면들인데 정말 연기를 잘 해주신 거라고 생각한다."
백승수의 과거 장면과 백승수가 단장실을 떠나는 현재 장면을 같은 구도로 찍거나, 바이킹스와의 연습 경기에서 임동규(조한선 분)와 백승수의 대치 장면이 앞서 트레이드 에피소드에서의 장면과 비슷하게 연출된 것도 흥미로웠다.
"그 장면들은 의도가 좀 있었다. 연습경기 장면은 둘의 관계를 다시 표현하지 않더라도, 장면을 통해 (둘의 관계를) 설명할 수도 있고 긴장감도 생기니까. '이렇게 붙여 볼까요' 했는데 편집감독님의 도움이 컸다. 과거 신은 SBS 사무실에서 찍은 건데, 마침 세트 구조가 비슷하더라. 우리끼리 '이렇게 하면 재밌겠다' 해서 찍은 건데, 알아봐 주는 분들이 있어 좋았다."
듣다 보면 스태프, 배우, 작가에게 공을 돌리는 표현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연출하면서도 서로 협력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리더십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 같은데.
"나는 슈퍼맨이 아니니까. (웃음) 전문적인 분들과 함께 하는데, 그런 분들의 의견을 듣는 게 필요한 일이지 않겠나. 어쨌든 결과물의 책임은 내가 지는 거니, 그 과정에서 최대한 좋은 의견들을 받아내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내가 화를 낸다고 해서 좋은 의견을 내줄 것도 아닐 테고. 자연스럽게 의견을 나눌 수 있게 하고, 그 의견에 맞춰서 작업하는 게 맞다고 봤다."
SBS '스토브리그' 스틸컷 ⓒ SBS
3부 쪼개기 편성은 과했다거나 PPL이 튀어 보인다는 지적도 여럿 있었다. 연출자로선 아쉬운 부분일 법도 하다.
"어떻게 보면 그걸 찍어서 내보내야 한다는 입장에선 나도 책임이 있다. 시청자가 아쉽다고 생각하고, 비판한다면 그것은 내가 책임지고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다. 반문을 안 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내 이름을 걸고 방송된 거니까. '다음 작품에선 더 잘 하겠다'는 말씀을 드려야할 것 같다."
<스토브리그>는 오피스 드라마로서의 의미도 컸다고 본다. 특히 프런트의 각자가 극중 전개 속에서 그동안 지피지 못했던 마음속의 불씨를 되살리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대본집을 보면 아마 공감할 것 같은데, 사실 대본은 무척 건조하게 쓰였다. 그대로만 만들면 장르 드라마처럼 느껴질 것 같아서, 이 대본에 '펌프질'을 하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변화'에 초점을 맞추자고 했다. 예를 들어, 처음 드림즈의 경기에서 선수들이 실수하는 장면은 원래 없었다. 드림즈가 야구를 못하는 팀이었단 걸 확실히 보여주려면 그런 장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야구단 사람들이 점점 변해 한 팀이 되고, 끝내 권경민까지 변하는, 그런 변화가 드라마 전체의 콘셉트라고 생각했다.
희망이 없던 조직이 새로 한 사람이 들어와 바뀌는 것, 그 변화하는 모습을 시청자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도 그런 사람을 원하고,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만 쉽지 않다. 아마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마지막 회 '강한 사람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서로 도울 거니까요'라는 문구 역시 종방연 가는 길에 넣은 거다. 기획안에 있는 문구인데, 나는 그 말이 정말 좋았다. 변화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좋은 결과를 만드는 거지. 우리 드라마와도 전체적으로 맞아떨어지는 말이 아니었나 싶다."
그 문구가 나오기 직전 백승수가 시청자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글쎄요, 해봐야 알겠지만...열심히는 할 겁니다.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장면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백승수가) 시청자를 한 번 보면 좋을 것 같았다. 백 단장은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판타지적인 인물인데, 이 사람이 우리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걸 이 사람의 시선으로 보여주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가님께 말씀드렸고, 그에 맞춰 (대본을) 써 주셨다. 남궁민 씨도 자연스럽게 연기를 해 주셨고. 한편으로는 '이런 사람(백승수 단장 같은 사람)이 당신이 될 수 있다'는 의미도 있다. 그게 <스토브리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닌가 싶다."
2010년 입사한 뒤 이제 두 작품의 메인 연출을 마쳤다. 혹시 앞으로 연출하고 싶은 작품들이 있다면.
"개인적으론 이신화 작가님과 한 작품을 더 하고 싶다. <스토브리그> 시즌2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얘기를 해 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시즌2로 비슷한 이야기를 하느니 아예 새로운 이야기를 조금 더 완벽하게 보여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긴 하다. 작가님은 굉장히 상식적인 분이면서, 휴머니스트다. 백승수가 '케미가 좋다'는 대사를 하는데 정말 나와 작가님 이야기다. (웃음) 또 예전에 단막극으로 <엑시트>라는 드라마를 했는데, SF 장르도 정말 좋아한다. 칼로 찌르고 막 그런 게 아닌, 스릴러 장르도 언젠가는 꼭 한 번 해보고 싶다."
SBS '스토브리그'의 주요 장면들 ⓒ SBS
[<스토브리그> 명장면 비하인드] 오정세의 '조커' 신, 하늘이 도왔다?
임동규가 다시 드림즈로 돌아올 때 배경에 담긴 바다에 야구공 모양이 비치고, 임동규가 과거를 회상하는 흑백 화면에서 야구 교본만 색깔이 보이는 장면도 많이 회자됐다.
"사실 그것 말고도, 9회 백승수가 길창주(이용우 분) 집에 찾아갔을 때 CG로 밤하늘에 뜬 별이 야구공 모양으로 보이게 한 적이 있다. 당시 하늘이 너무 휑해서…워낙 엉뚱한 걸 좋아하기도 해서 조연출에게 '한 번 심어봐' 했는데 조연출이 '정말 심어요? 정말?' 하더니 심었더라. 그땐 백승수의 감정에 집중하게 하고 싶어서 (야구공이) 잘 안보이게 했는데, 13회는 좀 더 찐하게 심었다. '볼 사람만 보겠지' 했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알아봐주시더라. 오정세 씨는 '사장실에도 야구공 CG를 넣어 달라'는 이야기를 했고, 작가님은 '장공윤 선생'이라고…. (웃음)
그리고 과거 회상 장면은 색보정팀과 촬영팀의 의견이었다. 작정하고 의도했다기보단 흑백을 바탕으로 푸른빛을 살렸다가, 마지막엔 (임동규 숙소의) 등으로 하이라이트를 주자는 정도로 생각했다. 촬영해 보니 마침 등이 있는 그 자리에 교본도 있었고, 보다 보니 좋아서 그렇게 확정한 장면이다."
길창주가 입단하는 과정을 그린 에피소드에서 외국인 용병 영입이 좌절된 당시 '막다른 길'(Dead end) 표지판을 비춘 장면도 놀라웠다.
"하와이 촬영 마지막 날, 마지막 신이라 진짜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표지판이 그렇게까지 주목받을 줄 몰랐다. 조연출과 처음 문구를 논의하는데, 딱 떨어지는 게 없었다. 가장 의미가 통하고 상황과 맞는 게 '막다른 길'이었다. 개인적으론 너무 직접적이라, 좀 더 은유적인 것은 없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 표지판은 실제 그 길에 없다. 한국에서 만들어 가기엔 수하물 문제가 있어서, 미국에서 제작해 땅에 꽂았다. (웃음) 촬영지도 실제론 그렇게 황량하지도, 도로가 하나만 있지도 않다. 엄청 초록초록한 곳이고 길도 여러 갈래 있다. 모두 CG 작업의 덕분이다."
권경민이 사촌동생을 향한 분노를 처음으로 표현한, 10회 마지막 장면이자 이른바 '조커' 오마주 신에 대한 반향도 상당했는데.
"그날 그 바람이 절묘하게 불어줬다. 낙엽들이 쌓여 있긴 했는데,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부는 것 같아 '빨리 찍어야겠다' 해서 두 번만에 찍었다. 우리끼리도 찍으면서 '이건 얻어 걸렸다'고 했다. (웃음) 사실 권경민은 백승수처럼 안이 보이는 인물은 아니라서…디테일한 걸 설정하고 싶어 하셨는데, 의견을 구해 오면 '경민이면 이런 느낌 아닐까요' 했고 혼자 정말 생각을 많이 해 오셨다. 맨 마지막에 재송그룹 회장(전국환 분)에게 돈을 돌려주는 장면에선 '권경민이 비싼 시계를 차고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며 풀고 오셨더라. 권경민이 차 안에서 혼자 듣는 락 음악은 실제 촬영에서는 없었고, 나중에 넣은 거다. '락이었으면 좋겠다' 해서 몇 곡을 들었는데 그 곡(메탈리카의 '마스터 오브 퍼펫')의 가사가 가장 잘 맞더라."
출처 : PD저널(http://www.pdjourn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