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생때 해외로 이민 온 덬이야.
지금은 20대 중반이니 벌써 이민온지 10년이 넘었지.
한국에선 집이 꽤 잘 살았어.
좋은 아파트에 살았고
아빠는 대기업 높은 사람이였지.
하지만 아빠는 나와 동생들한테 그리 좋은 아빠는 아니였어.
매일 회사 끝나고 룸싸롱 갔다가 잔뜩 취해 들어와서 화내고 소리지르고.
술취해서 엄마한테 한다는 소리가 룸 외국언니는 돈을 찔러줘도 안 벗는다는 둥. 그런 얘기는 일상이였어.
내가 시험 공부 하는데도 그래서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펑펑 울다가 학교 간적도 있고
시험 끝난 다음날 아빠가 나한테 와서 너 시험 언제냐고 한적도 있고.
여러모로 좋은 아빠가 아니였어.
그리고 나서 곧 이민을 왔지.
아빠는 그 잘나가던 시절의 허물만 간직한 채 트럭 운전수가 되었어.
가정주부였던 엄마도 남의 가게에서 노동을 시작했고..
난 집에서 동생들 돌보는게 의무였고, 말 안통하는 학교에선 한국에 가고 싶어서 매일 울었어.
그나마 덕질하는게 내 삶의 희망이였던 것 같아.
그 마저도 아빠는 "그렇게 좋으면 가서 그 가수 새끼나 따라다녀라" 라고 했고, 내 돌이 독극물 테러를 당했을때는 걱정되서 우는 내앞에서 "죽던지 말던지" 라고 했어.
매일매일 아빠는 집에 와서 나한테 밥을 차리라고 맛있는거 없냐고 매일 들볶았지.
그리고 밥 먹다가 조금 이야기를 할라치면 말대꾸 하지말라, 넌 정신병자다 이런 소리나 들어야 했어.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이미 그렇게 50년 살아온 아빠는 안 변하더라.
엄마도 이혼한다 이혼한다 입에 달고 살면서 결국 안했어.
그리고 나서 나는 곧 대학생이 되었고, 말문도 트이고 친구도 여럿 사귀었어. 이제 좀 행복이 보이려는 시기였지.
난 한국의 정서도 물론 남아 있지만 현지에 적응을 더 많이 한 것 같아.
아빠는 나한테 밥상머리에서 이제 밖에 나가서 남자 좀 만나라고, 아빠는 "프리 섹스" 를 지향하는 관대한 부모라고 하더라.
나는 너무 웃겨서 속으로 코웃음 쳤어. 아직도 연락하는 내연녀 쉴드 치는건가 싶어서.
난 죽어도 결혼, 출산 안할거라고 아빠 앞에서 말했어. 그리고 그건 엄마 아빠를 보고 자라서 하는 소리라고.
그땐 정말로 내 돌 덕질 하면서 평생 살 수 있을거 같았어.
그런데 이런 나에게도 사랑이 찾아오더라. 웃기지
같은 과에 다니던 남자애랑 사귀게 되었어.
인종은 다르지만 서로 모든게 처음이고 그래서 더 정말 특별했어. 스물 넷에 처음 사귄 남자친구.
그리고 곧 남자친구가 나를 집으로 초대했어. 부모님도 함께 사는 집으로 하루 자러 오라고.
한국에선 보기 힘든 일이지만, 여기에선 연인 집에서 머무는거 일반적이고, 그다지 별난 일이 아니야.
그리고 나서 다음날 집에 왔는데 아빠가 날 쫓아와서 너 어디 있었냐고 하더라.
나는 솔직히 말했어. 남자친구 집에서 자고 왔다고.
역사적인 날이였지.
물건이 날아다니고 문짝이 부숴졌어.
아빠는 소리지르고 분노했어. 엄마는 아빠를 말렸어.
난 그때 계속 "그래서 내가 죄 졌어?" 이 말 밖에 안한거 같아.
사실 섹스도 안했는데, 아빠한테 섹스도 안했다고 하기엔 너무 수치스럽더라.
난 성인이고, 내 사생활인데.
그래서 결국 나는 아빠와 인연을 끊기로 다짐했고
그 날 이후로 더이상 아빠와 이야기 안한지 2년째야.
남자친구와도 얼마전 2주년이 되었고. 알콩달콩 잘 만나고 있어.
아빠는 화해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이지만 나는 받아줄 생각이 없어.
정말 후련하고 또 편해.
나는 아빠를 바꾸려는 생각을 포기했거든.
이젠 정말 내 행복을 위해서 살려고.
긴 글 읽어줘서 고맙고 또 불쾌했다면 미안해.
그럼 안녕.
지금은 20대 중반이니 벌써 이민온지 10년이 넘었지.
한국에선 집이 꽤 잘 살았어.
좋은 아파트에 살았고
아빠는 대기업 높은 사람이였지.
하지만 아빠는 나와 동생들한테 그리 좋은 아빠는 아니였어.
매일 회사 끝나고 룸싸롱 갔다가 잔뜩 취해 들어와서 화내고 소리지르고.
술취해서 엄마한테 한다는 소리가 룸 외국언니는 돈을 찔러줘도 안 벗는다는 둥. 그런 얘기는 일상이였어.
내가 시험 공부 하는데도 그래서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펑펑 울다가 학교 간적도 있고
시험 끝난 다음날 아빠가 나한테 와서 너 시험 언제냐고 한적도 있고.
여러모로 좋은 아빠가 아니였어.
그리고 나서 곧 이민을 왔지.
아빠는 그 잘나가던 시절의 허물만 간직한 채 트럭 운전수가 되었어.
가정주부였던 엄마도 남의 가게에서 노동을 시작했고..
난 집에서 동생들 돌보는게 의무였고, 말 안통하는 학교에선 한국에 가고 싶어서 매일 울었어.
그나마 덕질하는게 내 삶의 희망이였던 것 같아.
그 마저도 아빠는 "그렇게 좋으면 가서 그 가수 새끼나 따라다녀라" 라고 했고, 내 돌이 독극물 테러를 당했을때는 걱정되서 우는 내앞에서 "죽던지 말던지" 라고 했어.
매일매일 아빠는 집에 와서 나한테 밥을 차리라고 맛있는거 없냐고 매일 들볶았지.
그리고 밥 먹다가 조금 이야기를 할라치면 말대꾸 하지말라, 넌 정신병자다 이런 소리나 들어야 했어.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이미 그렇게 50년 살아온 아빠는 안 변하더라.
엄마도 이혼한다 이혼한다 입에 달고 살면서 결국 안했어.
그리고 나서 나는 곧 대학생이 되었고, 말문도 트이고 친구도 여럿 사귀었어. 이제 좀 행복이 보이려는 시기였지.
난 한국의 정서도 물론 남아 있지만 현지에 적응을 더 많이 한 것 같아.
아빠는 나한테 밥상머리에서 이제 밖에 나가서 남자 좀 만나라고, 아빠는 "프리 섹스" 를 지향하는 관대한 부모라고 하더라.
나는 너무 웃겨서 속으로 코웃음 쳤어. 아직도 연락하는 내연녀 쉴드 치는건가 싶어서.
난 죽어도 결혼, 출산 안할거라고 아빠 앞에서 말했어. 그리고 그건 엄마 아빠를 보고 자라서 하는 소리라고.
그땐 정말로 내 돌 덕질 하면서 평생 살 수 있을거 같았어.
그런데 이런 나에게도 사랑이 찾아오더라. 웃기지
같은 과에 다니던 남자애랑 사귀게 되었어.
인종은 다르지만 서로 모든게 처음이고 그래서 더 정말 특별했어. 스물 넷에 처음 사귄 남자친구.
그리고 곧 남자친구가 나를 집으로 초대했어. 부모님도 함께 사는 집으로 하루 자러 오라고.
한국에선 보기 힘든 일이지만, 여기에선 연인 집에서 머무는거 일반적이고, 그다지 별난 일이 아니야.
그리고 나서 다음날 집에 왔는데 아빠가 날 쫓아와서 너 어디 있었냐고 하더라.
나는 솔직히 말했어. 남자친구 집에서 자고 왔다고.
역사적인 날이였지.
물건이 날아다니고 문짝이 부숴졌어.
아빠는 소리지르고 분노했어. 엄마는 아빠를 말렸어.
난 그때 계속 "그래서 내가 죄 졌어?" 이 말 밖에 안한거 같아.
사실 섹스도 안했는데, 아빠한테 섹스도 안했다고 하기엔 너무 수치스럽더라.
난 성인이고, 내 사생활인데.
그래서 결국 나는 아빠와 인연을 끊기로 다짐했고
그 날 이후로 더이상 아빠와 이야기 안한지 2년째야.
남자친구와도 얼마전 2주년이 되었고. 알콩달콩 잘 만나고 있어.
아빠는 화해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이지만 나는 받아줄 생각이 없어.
정말 후련하고 또 편해.
나는 아빠를 바꾸려는 생각을 포기했거든.
이젠 정말 내 행복을 위해서 살려고.
긴 글 읽어줘서 고맙고 또 불쾌했다면 미안해.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