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딸 현주에게 (82년 이해찬 수감당시, 가족에게 보낸 편지)
사랑하는 딸 현주에게
현주야, 그동안 잘 지냈니?
어제 현주 얼굴을 보고 오늘 또 현주한테 편지를 쓰는구나. 현주는 편지가 무엇인지를 아직 모를 거야.
편지란 멀리 떨어져 있는 현주에게 아빠의 뜻을 말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것이란다.
아빠가 현주를 보고 싶고 안아보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도록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니
편지로 현주한테 말하는 거야.
이제 몇 밤만 더 자면 되는 12월 14일은 현주의 세 번째 생일이야.
면회할 때 현주생일 하고 아빠가 말했는데 현주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
생일이란 현주가 이 세상에 나온 날이야.
현주가 엄마 품속에서 오랫동안 잠을 자다가 꿈을 깨면서 으앙하고 태어난 날이 바로 생일이란다.
현주는 엄마와 아빠가 지금부터 10년 전쯤에 만나 사랑을 하고 이뻐하고 하면서 키워온 싻이
두껍고 무거운 땅을 헤치고 솟아난 예쁜 아기 꽃인거야.
현주가 그려서 보내준 그림에도 아기고기 하고 엄마고기가 있었는데
현주는 바로 아기고기처럼 조그만한 새싹이란다.
아빠는 현주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생일을 모두 현주하고 떨어져서 맞이하였는데
현주에게는 너무너무 미안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첫 번째 생일을 첫돌이라고 부르는데 현주가 태어나서 첫돌이 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어.
현주가 태어난 12월은 일년중에서 가장 춥고 눈이 많이 오는 겨울이었고,
현주가 백일을 맞이한 3월은 바람이 많이 불고 꽃이 피려고 꽃봉오리가 맺기 시작한 봄이었어.
아빠는 그 봄이 지나고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여름이 오려고 할 때쯤 해서
현주하고 떨어져 살게 되었지.
여름이 지나고 감이 익고 사과도 익고 하는 가을이 지나서야 현주의 첫돌이 다가왔지.
또 겨울 · 봄 · 여름 · 가을이 지나 현주의 두 번째 생일인 두 돌이 되었고
이제 몇일이 지나면 세 돌이 되는 거야.
현주가 아빠의 이 편지를 받았을 땐, 그날이 바로 생일일지도 몰라.
먼저 보낸 편지에는 현주 생일엔 아주 좋은 선물을 만들어 주라고 엄마한테 말했으니까
엄마가 좋은 것을 마련해 놓았을 거야.
아빠가 현주하고 함께 있다면 마당 한구석에라도 나무 한 그루를 심고 싶어.
그러면 현주가 자라듯이 나무도 무럭무럭 자라서 현주하고 키재기 놀이를 할 수 도 있을 텐데.
지금 사는 아파트에는 나무를 심을 마당이 없어 어떻게 하지.
이제 조금 있으면 아빠가 현주하고 같이 살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마당이 넓은 곳으로 이사를 해서 현주 생일마다 나무를 한 그루씩 심을 거야.
또 엄마 · 아빠 생일에도 나무를 심고, 사과나무, 밤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 감나무 같은
과일나무도 심고, 장미, 목련, 철쭉 같은 꽃나무도 심고,
소나무, 잣나무, 오동나무 같은 것들도 심어 나갈 거야.
현주가 크고 아빠 · 엄마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무도 자라면
먼 훗날에는 조그만 숲을 이루게 되겠지.
아빠는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 올해로 현주는 세 살, 엄마는 스물아홉 살, 아빠는 서른 살이고
봄 · 여름 · 가을 · 겨울이 한번 지나가면 한 살씩 나이가 들게 되는데
지금부터 18년이 지나면 현주가 스물한 살, 엄마는 마흔 일곱 살, 아빠는 마흔 여덟 살이 되는
서기 2000년이 되는 거야.
서기 2000년이란 아주 뜻 깊은 해가 될지도 몰라.
아빠 엄마. 현주처럼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살아 온지가 아주 오래되었는데,
그중에서 예수라는 위대한 사람이 세상에 나오신지가 2000년이 되었다는 뜻이거든,
현주 같은 아기예수가 이 세상에 태어난 지 2000년이 된 거야.
그때쯤이면 현주는 대학교에 다니고 있겠지.
엄마가 다녔던 학교도 좋고, 아빠가 다녔던 학교도 좋고 아니면 현주 마음에 드는 어떤 학교라도 좋아.
현주가 안동에 왔을 때 이런 말을 했지.
학교에 공부하러 갈 거라고, 엄마 없이 혼자서 갈 거라고.
현주가 먼저 국민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다음엔 중학교 · 고등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그리고 나서 대학에 가서 공부할거야.
아빠는 현주가 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자주 그려보곤 한단다.
엄마 · 아빠가 학교 다니던 때와는 달리 현주의 학교생활은 훨씬 자유롭고 재미있을거야.
그때쯤에는 세상도 훨씬 좋아지고 자유로와질 테니 말이야.
얘기를 하다 보니 현주 생일에 쓰는 편지가 현주의 앞날 얘기로 흘러갔구나.
이처럼 앞날을 그려보는 것은 재미난 일이야. 아빠는 또 이런 생각을 했어.
현주에게도 남자 동생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현주가 같이 노는 상민이처럼 생긴 동생 말이야.
그러면 현주가 자전거도 태워주고 학교에도 같이 가고, 그러다가 서로 싸우기도 하고 할 텐데.
현주야.
지금 아빠가 살고 있는 이곳에는 함박눈이 많이 내려쌓여 있어.
앞산에도 눈이 많이 내렸고 멀리보이는 들판에도 눈이 덮고 있어.
고개를 올라가는 차들도 살금살금 기어다니고,
어쩌다 바람이라도 불면 눈가루가 날리는 모습은 참 멋지구나.
현주는 아직도 아빠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겠지만 아빠는 현주가 무척보고 싶어.
안동에 있을 때는 현주가 오면 꽃도 묶어주고 오징어도 주었는데
여기서는 그러지를 못해서 화가 나기도 하는데다가 현주가 자꾸 커가면서
말을 잘하기 시작하니까 더욱 보고 싶단다.
엄마 편지를 받아보면 현주는 아주 욕심쟁이에다가 고집쟁이인 모양인데
아빠는 그런 게 오히려 더 좋단다.
현주야 오늘은 이만큼 얘기하고 다음에 또 말해줄게.
면회 오면 만나볼 수도 있을 테고 이번에는 오징어를 잘 구워놓았다가 줄게.
오징어하고 쥐포는 같다고 했지. 또 쯔비쯔비바 하고 무엇하고 같다고 했지?
다음 면회때 알으켜 줘.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엄마 말 잘 듣고 맛있는 것 많이 먹고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
멀리 떨어져 있는 아빠가.
편지의 주인공은 이해찬 의원.
당시 전두환 독재 비판하고 민주화운동하다가 감옥가서 고문당하고(후유증으로 병도 얻음...)백일된 딸 안아보지도 못하고 옥살이함.
이해찬이 딸이 갓난아기일때 어린 딸에게 보낸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