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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온돌의 확대
(나무위키 - 경신대기근)
또한 추위를 견디고 체력을 보존하기 위해 온돌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조선 전기까지 상당수 남아있던 2층 한옥이 2층에는 온돌 설치가 불가능한 문제로 인해 이 시기 이후로는 사라졌고, 온돌로 인해 나무땔감의 수요량이 급증해 조선의 삼림자원은 급속히 고갈되어 갔고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민둥산이 아닌 산이 없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나무위키 - 온돌)
하지만 확산은 생각보다 더뎠던 모양이다. 조선 영조때의 기록에는 당시 궁궐에도 온돌이 많이 없었는데 왕의 편전인 경복궁의 사정전 역시 온돌방이 아니었다고 한다. 나인이나 내관들이 추위를 견디다 못한 나머지 임의로 건물을 온돌식으로 개조하였는데 이로 인해 땔감 공급하는 백성들이 곤란을 겪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궁궐조차 저럴 정도면 일반 민간 보급은 흔치 않았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신대기근을 불러온 17세기 소빙하기를 겪으면서 난방이 생존의 문제로 인식되어 온돌이 확산된 계기로 보고 있다.
2) 청나라 쌀 수입?
1671년 여름 아사자가 최고도에 달했을 때, 형조판서 서필원이 청나라의 쌀을 수입할 것을 현종에게 건의했는데, 당시 조정은 운송과 후환을 두려워해서 반대했다. 그해 말 기아를 구제하기 위한 정부의 미축미가 바닥나자 현종이 청나라 쌀 수입건을 다시 꺼냈는데, 신하들은 국가의 위신이 훼손된다고 반대를 했다. 명분에 집착하는 신하들에게 현종은 "이곳의 사세가 이 지경이 되지 않았다면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으나 신하들은 그 조차도 부정적이었다
(정묘호란 1627년, 병자호란 1636년)
이당시 청나라 황제 강희제 (청나라 황금기 중 황제)가 한 말 - 군약신강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한 소치라고 한다. 돌아가서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라.- 강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