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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불멸의 편지,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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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8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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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로 가는 길-3] 어린 시절 고흐가 집을 떠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가 기숙사 생활이었다면, 두 번째 기회는 구필 상사의 헤이그 지점에 입사한 것이었다.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구필 상사의 헤이그 지점에 최연소 직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기숙사 생활이 그에게 좌절의 연속이었다면, 구필 상사 입사는 고흐에게 진정한 독립의 기회였다. 미술품거래의 메카였던 구필 상사는 당시 유행을 선도하는 명실상부한 그림 백화점이었다. 고흐와 이름이 같았던 빈센트 삼촌의 권유로 가능한 일이었다. 고흐의 아버지 도뤼스가 지극히 정적이고 금욕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던 반면, 빈센트 삼촌은 잦은 해외여행을 즐겼고 활달하고 명랑했으며 미술품 거래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사람이었다. 런던, 파리, 뉴욕, 브뤼셀에도 지점을 거느리고 있었던 구필 상사는 빈센트 삼촌에게 새로운 삶의 목표가 되었고, 고흐의 부모들은 학교에서 적응을 잘 하지 못했던 고흐가 구필 상사에서는 반드시 성공하기를 빌었을 것이다.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던 쥔데르트와 달리, 헤이그는 그야말로 휘황찬란한 대도시였다. 빈센트는 구필 상사에 입사한 3년 뒤, 브라반트의 오이스터베이크에서 통학하고 있던 동생 테오에게 첫 번째 편지를 쓴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던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산책을 하던 추억을 되새기는 정감 어린 편지였다. 이때만 해도 고흐는 자신이 반드시 '자립'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후 두 사람 사이에서 오고가는 절박한 생존의 문제를 둘러싼 긴장감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테오가 먼저 쓴 편지에 고흐가 답장을 한 날짜가 1872년 8월 18일이었다.



고흐의 그림으로 만든 엽서./사진=이승원

고흐의 그림으로 만든 엽서./사진=이승원


테오야, 편지 고마워. 네가 잘 도착했다니 안심이다. 며칠 동안 네가 참 그립더구나. 그날 오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 네가 없으니 무척 허전했어. 우리 함께 정말 즐거웠지? 비를 맞아가면서도 여기저기 구경하기도 하고, 산책도 했었잖니.

-1872년 8월 18일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다정함이 듬뿍 묻어나는 이 편지는 고흐와 테오 사이에 평생 동안 흐르던 우정과 신뢰의 씨앗이 된다. 나를 멈춰 세우게 한 것은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하나의 무덤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무덤은 오베르 쉬르우아즈에 있는데, 여기에 또 빈센트 반 고흐의 무덤이 하나 더 있는 것이었다. 뒷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빈센트와 이름이 똑같은 형이 사산아로 태어났다고 했는데, 바로 그 첫 번째 아들의 무덤이 이곳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사산아에게도 무덤을 만들어주는 것'이 그 가문의 자부심을 확인하는 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당대에는 최신 유행의 장례문화였다. 그전에는 사산아나 갓난아기들에게는 장례식조차 생략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에 비해, 자부심 가득한 이 신교도 목사부부는 '비록 사산아일지라도, 엄연히 우리의 큰아들'이라는 생각이 확고했던 것 같다. 공교롭게도 이 사산아가 태어나자마자 죽은 날짜와 똑같은 날, 우리가 사랑하는 빈센트 반 고흐는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형의 죽음'이라는 상처가 그의 이름과 생일에 낙인찍혀버린 것일까. 쥔데르트의 공립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해 자퇴한 고흐는 겨우 11살에 기숙사학교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었다. 고흐 인생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원체험(原體驗)은 바로 부모님이 노란마차를 타고 자신을 기숙사학교에 남겨둔 후 멀리 사라져가는 모습이었다.



쥔더르트 고흐의 방./사진=이승원

쥔더르트 고흐의 방./사진=이승원


 가족들 누구도 빈센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식구들 중에서 가장 다정다감하고 쾌활한 아이, 정말 우울한 빈센트 집안의 '햇살 같은 아이'였던 테오만이 형을 따르고 떠받들었다. 빈센트에게 '세상과 섞일 수도, 가족과 섞일 수도 없다'는 원초적인 좌절감을 안겨준 곳도 쥔데르트였지만, 테오와 함께 들판을 뛰어다니던 추억이 있는 곳, 테오와 함께 모래성을 만들고, 교회나 응접실에서 노래를 부르고, 다락방에서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며 우애를 키우던 장소도 바로 쥔데르트였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고흐를 최고의 영웅으로 대접하는 테오를 두고 '형을 숭배한다'고 놀려댔지만, 테오는 형의 물감과 캔버스는 물론 생활비와 병원비까지 지급하면서도 형을 향한 변함없는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고흐의 편지' 초반부는 늘 마음을 졸이며 읽게 된다. 고흐와 아버지 사이의 불화가 늘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원리와 원칙에만 충실할 뿐 예술의 열정이나 예측 불가능한 삶에는 전혀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목회자의 길을 포기하고 그보다 훨씬 어려운 화가의 길을 택한 고흐를 평생 이해하지 못했다. 아들을 정신병원에 집어넣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아버지를 어느 아들이 좋아할 수 있겠는가. 고흐는 남들보다 예민하고 열정적인 감수성을 타고나긴 했지만, 그는 결코 미친 것이 아니었다. 습작기의 고흐는 오직 주변의 사랑과 이해가 간절히 필요한 열혈청년일 뿐이었다. 고흐는 동생이 자신을 '불량한 건달'로 볼까봐 걱정하기도 하고, 아버지와의 불화 상태에서 동생이 아버지의 편에 설까봐 마음을 졸이기도 한다. 그는 거대한 편견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가 가장 필요로 했던 것,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따뜻한 정(情)이었다. 그가 예술가들은 공동생활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갱을 자신이 꾸민 '노란 집'으로 초대했던 것, 예술가들의 협동조합을 만들어 창작의 고통과 작품 유통의 불합리를 개선하려고 꿈꾸었던 것, 그 모든 몸부림들이 사실 이 '정'을 향한 간절한 굶주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암스테르담 고흐 박물관 입장권./사진=이승원

암스테르담 고흐 박물관 입장권./사진=이승원


 완강하고 엄격한 부모님은 그들의 천재적인 아들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지만, 테오만은 형의 광기 어린 집념과 불같은 열정을 이해했다. 빈센트의 그림이 잉태하는 경이로운 생각의 우주를, 테오만은 이해했다. 테오는 거의 천 통에 가까운 방대한 편지를 통해 형의 고뇌를 속속들이 알았다. 고흐의 편지가 없었다면, 테오의 무조건적인 애정과 헌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과연 이 아름다운 그림들을 오늘날까지 감상할 수 있었을까. 가눌 수 없는 열정과 광기 때문에 세상과 소통하는 데 실패한 고흐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가족과 세상으로 이끌었던 사려 깊은 중재자 역시 테오였다. 쥔데르트에서 테오와 고흐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아름다운 조각상을 맞닥뜨리자, 저릿한 아픔이 가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이렇게, 죽어서도 '영원히 함께'였다. 이제야 알 것 같다. 누군가 나를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것, 미주알고주알 다 알아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이해해줄 준비가 되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고흐는 위대한 삶의 주인공임을, 나는 이곳 쥔데르트에서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정여울 작가·문학평론가]



출처: http://v.media.daum.net/v/20160602150408456

이전글: http://theqoo.net/square/42369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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