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덬들아!!!!
에세이를 조금씩 읽으면서 번역해보다 보니까 전체를 끝내게 되어서
혹시 같이 볼 덬들 있을까 들고와봤어!!!
내가 솜씨가 많이 없어서...
의역도 직역도 있고 어쩌면 심하다 싶은 의역이나 오역이 있을 지도 몰라 8ㅁ8
(오타도 아마...)
그런 부분 피드백 해준다면 정말 누구보다도 빨리 수정하도록 할게!!!!!♡
혹시 문제가 있다면 펑 할 수 있게 꼭 말해주길 부탁해!!!!
총 22개의 타이틀이야
01 그 시절의 에너지
의미 없는 것을 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아이란 모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 생각하면 좀 대단했는지도 모른다.
귀여운 걸 말하자면, 중학교 시절의 여름 방학 연례행사, 「24시간 테레비」에 모금하러 가기 투어.
살고 있던 "하무라"라는 거리는 일단 도쿄 시내에는 있지만, 23구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거의 시골이라고 해도 좋은 곳이다.
중학생들에게는 좀 따분한 거리.
그곳에서 「24시간 테레비」생방송이 이루어지고 있는 일본 무도관까지, 자전거로 간다는 것.
거리로 따지자면 편도 50km.
도대체 몇 시간씩 왔다 갔다 했는지.
밤이 되면 친구들과 모여서, 「그럼, 슬슬 가볼까」 하고 출발.
지도 따위는 없었다.
길은 대충 찍어서, 어딘지도 모른 채 갈 수밖에 없었다.
어떤 해에는, "고쿠분지"쯤에서 방향을 잃어서, 길 가는 할머니에게 물어봤던 기억이 있다.
「무도관은 어느 쪽인가요?」
고쿠분지에서 무도관은 아직 멀었다.
물어봤던 할머니도 당황스러워했다.
「일단 큰 거리로 나가서, 쭉 가면 되지 않으려나」
트럭이 붕붕 달리는 밤의 국도를, 자전거 중학생 군단은 비틀비틀대며 나아갔다.
아직 어두울 때, 어떻게든 무도관에 도착해서 줄을 서고, 모금을 건넨다.
동전을 한데 모아서 넣어둔 작은 비닐 주머니를 출연자에게 건네주고서, 악수도 했었나.
모금 창구는 더 가까운 거리에도 있기야 했겠지만, 우리는 무도관에 가고 싶었던 것이었다.
큰 의미 따위는 없다.
아이들끼리, 자전거가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던 거 같다.
심야의 자전거 여행은 겨우 귀여운 정도이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장난 방식은 좀 더 하드하게 된다.
하치오지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가까운 곳에 놀 곳은 없고, 그 주위 고등학생에게, 자극적으로 즐거운 것이라면 싸움과 오토바이 정도밖에 없었다.
남자 고등학생 전원이 그랬다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내 친한 친구들에게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싸움을 하기도 했다.
마치 만화 속 세상 같은 철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엄청나게 맞기도 했는데, 그런 날은 얼굴이 부어서 집에 돌아가지만, 어머니는 특별히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끔 "여자와 어린아이는 없었겠지"라고 묻고는 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약간의 장난은 못 본 척해준다는 것.
가장 아팠던 것은 학교에서의 싸움이었다.
상대는 동급생으로, 싸움의 이유는, 나의 그녀를 그 녀석이 울렸다는,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이야기.
화를 참지 못했던 나는 수업 중에 그놈의 클래스에 뛰어들어, 느닷없이 덤볐다.
숨을 멈추고 보고 있는 여자와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선생님들 사이에서,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다.
영문도 알 수 없는 듯한 맞붙은 싸움 도중에, 상대의 펀치가 훌륭하게 내 코에 명중.
내 코는 있을 수 없는 방향으로 휘어 버렸다.
흥분했기 때문에 아프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데 인생 최고의 고통은 맞았을 때가 아니다.
그 후의 일이다.
기세 좋게 코피를 흘리며 병원으로 끌려갔다.
간호사 5명 정도에게 의자에 단단히 눌러진 모습으로, 콧속에 쇠 소독 막대기 같은 것이 깊이 파고들었다.
혀를 깨물지 않도록 타월도 입에 넣었다.
"간다"
의사의 담담한 느낌의 한마디 후, 전신에 믿을 수 없는 충격이 통했다.
시야가 새하얗게 되고, 의식이 나가떨어질 뻔했다.
아프고, 무지하게 아팠다!
"네, 되돌아왔어요"
내 코는 그럭저럭 원래대로 쭉 곧아 있었다.
싸움만 했다니, 어쩌니저쩌니 자랑으로도 되지 않는다.
지금 막 청춘 시절을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도, 전혀 추천할 생각은 없다.
자랐던 장소의 분위기도 있었겠지만, 나와 친구들은 그렇게 하는 것으로밖에 젊음을 발산하는 방법을 몰랐다.
바로 젊은 혈기의 소치.
의미는 제로.
의미가 없는 걸 말하자면, 고교 시절로 기억하고 있는 대규모 사건이 하나 있다.
열혈 생활 지도! 같은, 귀찮은 선생님에게 보복(!)이란 명목으로 행했던 속수무책인 장난.
그것은 학생들 30명 정도로 해서, 학교 주차장에 놓아두었던 선생님의 차를, 벽에 기대게 하자, 라는 것이다.
모두 "하나~둘!"이라고 외치며 차를 들어서, 교정의 벽에 90도에 가까운 각도로 세운 것이다.
도대체 선생님은 어떤 반응을 할까?
교정의 위쪽에서 우리는 계속 주차장을 관찰했다.
퇴근하려던 선생님은 우선, 차가 있던 주변을 지나쳤다.
어라? 라며 고개를 갸우뚱.
그리고 주변에서 허둥지둥하다가, 벽에 세워져 있던 차를 일단, 발견.
그러나 당장은 사태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왜인지 다시 한번 주차되어 있던 근처를 찾으며 두리번두리번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 가까스로, 장난을 깨달은 것이다.
자초지종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실컷 웃으며 뒹굴었다.
물론, 그 후, 호되게 혼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교내 방송에서 있을 수 없는 성난 목소리로, 우리는 불려 나간 것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그때의 그런 에너지는, 어디에서 샘솟아 나는 것이었을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거니까 그야말로, 무한의 파워.
무리해서라도 열중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지금, 내게 그런 힘이 있다면…. 아니 그렇게 생각지는 않는다.
그리운 건 있지만, 역시 귀찮다.
내게는 지금, 하고 싶은 일도 할 일도 있으니까.
02 메일 보다 전화
메일이나 LINE이 싫다.
상대방을 생각해서, 전혀 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하면 직접 전화로 말하는 타입.
저쪽에서 메일이 와도, 그 대답은 곧바로 전화를 거쳐서 끝내려고 한다.
단순하게 귀찮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상대방은 메일로 괜찮잖아, 라고 하겠지만, 신뢰하고 있는 동료에 대해서는 특별히 그러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너무 의식은 하지 않지만, 어디선가 선 긋기를 하는 것 같다.
메일에는 메일로 답장하고 그것으로 끝내도 괜찮은 상대와 전화 통화로 더욱더 깊어져 가고 싶은 사람.
그리고 이 사람과는 절대로 전화로 얘기하고 싶다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니,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걸 알았다.
긍정적으로 향상심이 있는 사람.
나는 스스로 긍정적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그렇게 되려 하고 있기 때문일까, 부정적인 마인드나 음의 오오라(負のオーラ) 같은 것을 밝히고 있는 사람이 굉장히 어렵다.
가능하면 그런 사람과는 엮이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꿈이나 목표에 대해서 욕심이 많은 사람, 향상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좋다.
평소에는 실없는 느낌도 괜찮고, 자신의 심지에 "이것"이라고 정한 것을 가진 사람이 좋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동료라는 관계가 될 수 없다.
산다이메 J Soul Brothers의 멤버들이 모두 그렇다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일의 장르가 다른 개인적인 친구에게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놈밖에 없다.
나는 전에, 미용사였기 때문에, 친구로도 미용사가 많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사이가 좋은 친구는, 역시 엄청나게 긍정적으로 커다란 꿈을 갖고 있다.
그 녀석은 이제 하라주쿠에 자신의 가게를 하고 있어서 업계에서는 꽤 유명한데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점포를 더 늘리거나, 해외 진출을 노리며 날마다 일을 마주 보고 있다.
함께 있을 때는 시시한 장난도 치고, 아침까지 마시고서 그대로 일하러 간 적도 있다.
그 녀석과는 바보 같은 이야기를 많이 한다.
"모두 열심히 일해서, 람보르기니를 사자"
그걸 한다면 즐겁겠네, 같은 꿈이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우리는 엄청 좋아한다.
미용사 시절의 지인에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미래는 어떻게 할 거야?"라고 질문해도, "일단 스타일리스트가 됐으니까, 다음은 점장이려나"같은 현실적인 대답밖에 돌아오지 않는다.
람보르기니의 이야기를 해도, "어, 괜찮네, 그거"라는 반응이 되어버린다.
그런 사람과는 더는 친해질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대의 흐름은 쉽게 간다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방향으로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남들과 진한 관계 따위 성가신 것이라고도 생각되고 있겠지.
하지만, 긍정적으로 향상심이 있는 녀석들이 진한 느낌으로 연대한다면, 그거 최강 아니냐고 제법 생각해왔다.
서로 자극하여, 각자의 꿈을 이룰 수 있다면, 이런 행복은 또 없을 거다.
그런 이유만은 아니지만, 나는 오늘도 메일의 답장을 전화로 하려 한다.
03 미국과 국도 16호선
어린 시절, 7월 4일은 특별한 날이었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
자랐던 거리 근처에 있는 요코타 기지가 개방되는 날.
국도 16호선의 건너편에 있는 요코타 기지의 안은 정말 미국이라서, 당연하게 일본어는 통하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팔고 있는 음식이나 잡화 등, 모든 것이 신선하고 특이한 것이었다.
담장 하나 사이에 둔 것만으로 이렇게 세상이 다른 것인지 어린 나이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어서 내가 일본인이란 걸 의식하고, 미국이라는 것을 강렬하게 동경했다.
초등학교 시절이 되어서 부대 안에 사는 친구가 생겨, 그의 집에 며칠 묵기도 했다.
기분은 미국 여행.
요코타 기지 안이 아니더라도, 하무라 옆 훗사라는 거리에는 미국을 느끼게 하는 양복점, 가구 가게, 음식점이 많았다.
특히 밀집해 있던 곳은, 요코타 기지의 맞은편, 즉 국도 16호선을 사이에 둔 영역으로, 나는 그 근처에 중학생 때부터 계속 다니고 있었다.
처음의 목표는 구제 옷 가게.
멋에 대한 의식이 싹트면서, 잡지를 읽게 되고, 미국 스타일의 캐주얼 웨어(アメカジ)에 빠졌다.
용돈을 모아서, 자전거를 30분 정도 타고 16호선 도로변까지 와서는, 리바이스의 청바지를 사기도 했다.
차차 꾸미는 것 외에 미국 문화에 매료되어 갔다.
구제 옷 가게와 음식점에는 힙합이나 R&B가 흘렀다.
텔레비전에서 들려오는 일본의 팝밖에 몰랐던 나에게는, 그것이 굉장히 멋진 것으로 울려 퍼졌다.
주말이면 술집 거리에는 미군들로 북적였다.
자주 싸움도 목격했지만, 그들의 패션이나 가지고 있는 분위기를 부러워했다.
아직 9/11 테러 전의 일.
안에 아는 사람만 있으면, 요코타 기지로 들어가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부대 안에 있는 클럽에서 놀게 된다.
클럽이라면 담장 이쪽 편에도 있어서, 이미 단골이라고 불리는 곳도 있었지만, 본고장 미국의 클럽이라면 최신 히트 차트가 빵빵하게 흐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르는 음악이 거기 있다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가보고 싶어졌다.
볼링을 치기 위해서만 기지에 들어가기도 했다.
클럽과 똑같이 16호선 도로변에도 볼링장이 있었는데 일부러 친구에게 연락하고 부대 안에서 했다는 것.
그 정도로 미국에 닿고 싶었고, 미국을 느끼고 싶었다.
훗사에는 나처럼 미국을 동경하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댄서가 되고 싶은, DJ를 하고 싶은, 그리고 가수가 되고 싶다는.
그런 꿈을 가진 녀석들이, 거리에서 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나의 꿈을 깨달을 때까지 상당히 멀리 돌아가게 되었지만, 그때, 훗사와 기지 속에서 뒤집어쓰듯이 귀 기울여 들었던 음악과, 거리에서 만난 녀석들과 보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04 그 집에 태어나서
고2 때, 어머니를 위해서 까까머리를 했다.
"엄마, 사실은 유방암이야"
항상 밝고 긍정적인 어머니가, 처음으로 아주 약간 심각한 모습을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어떤 리액션을 취해야 좋을지 몰랐던 나는, "아, 그렇구나"라는 얼빠진 말로 대답했다.
그때, 학교에서는, 그보다 내 친구들 사이에서는, 돌연 까까머리를 한다는 불가사의한 놀이가 유행이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까까머리를 하고 모두가 함께 웃는다.
누군가의 이발기를 사용하여 교실에서 행해지는 그 놀이는, 분명히 재밌었다.
하지만 미용사를 목표로, 헤어 스타일에도 애착이 있던 나는, "그런 촌스러운 건 됐거든"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어머니가 암 적출 수술을 했던 날.
학교에서 반삭을 했다.
수술이 무사히 성공하도록, 어머니의 살아나기를.
일종의 발원(願掛け)이었고,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몹시 서투른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그것밖에 생각 못 했다.
하굣길에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몸 상태는 꽤 괴로웠음에도, 빠르게도 본래의 밝음을 보였던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쩐 일이야! 꽤 귀여운 머리네"
까까머리를 몇 번이고 어루만져서, 뭔가 쑥스러운 기분이었다.
나의 긍정적이고, 끙끙 고민하지 않는단 성격은 틀림없이 어머니에게 물려받았을 거다.
유방암이라고 알고서도, 어머니는 가능하면 가족에게 걱정을 주지 않도록 행동하고 있었다.
대단한 거 아니니까 괜찮아요, 라고.
어머니가 그런 이상, 이쪽이 심각한 척할 수도 없어서, 그렇죠, 괜찮네요, 라는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반삭 따위를 했으니까, 고2의 나는 충분히 서툴고 순수한 소년이었던 거다.
참고로 어머니는 지금 아직도 왜 그때 반삭을 했는지는 모를 것이다.
물론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가족의 영향을 전면적으로 받고 자라 왔다.
성격으로 말하자면 역시 어머니가 제일이지만, 두 살 위인 누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크다.
누나는 중학교 시절, 테니스 선수로서 전국적인 수준으로 활약했다.
2살 차이라는 것은, 중학교에서 1년간 배가 아프다는 게 된다.
매주 학교 전체 조회에서 표창되는 누나는, 엄청난 유명 인사로, 나는 그 동생이라고 보이는 쪽을 하고 있었다.
나도 축구를 열심히 하고는 있었지만, 전국 대회에서 우승하는 누나와는 비할 바 아니었다.
부모님도 열심히 누나의 테니스 응원에 나섰다.
지방에서 열리는 대회에도 따라갔으니까, 집을 비우는 일도 많았다.
한편, 나의 축구 경기에는 "참, 오미의 경기도 있었지"라는 텐션으로, 가끔 보러 오는 정도였다.
부모님은 결코 남매를 비교하며 말하는 분은 아니었지만, 어린 나로서는 그 차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공부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해도 혼나지 않았다.
기대되지 않으니까, 멋대로 자유롭게 해도 괜찮은 건지.
외로움을 숨기고서 즐겁게 지내는 걸 생각하려 했다.
그런데 누나는 누나대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부모와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짊어지고서, 테니스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테니스는 중학교에서 이미 충분히 해냈다고 생각해 왔지만, 부모님이 "제발 고등학교까지 힘내주길 바란다"라고 해서, 스포츠 추천으로 강호 학교에 입학.
그렇지만 사춘기를 맞은 누나의 반발은 대단했다.
사납고 거친, 전형적인 반항기였다.
부모님은 그런 누나에 대해서, 종잡을 수 없는 뜻밖이라, 망연자실했다.
나는 그런 위태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가족을 관찰하고서, 가능한 한 경박하고 무사태평한 동생이라는 포지션을 선택했다.
그때 남매 사이는 최악이래도 좋을 정도로, 다만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 싸움했다.
싸움 외에는 대화도 좀처럼 없는 관계.
나는 누나의 재능이나 모두로부터 기대되는 모습이 부러웠고, 누나는 자유분방하게 지내고 있는 동생을 질투하고 있었다.
서로 생떼.
그런 얘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둘 다 사회로 나간 뒤의 일로, 지금은 보통의 남매보다 아마 사이가 좋다고 생각한다.
밤 중에 느닷없이 누나에게 전화 올 때가 있다.
"취했으니까, 너희 집 신세 좀 질게"
나도 다음 날 아침이 어지간히 바쁘지 않은 한 승낙한다.
그런 밤은 둘이서 부모님의 노후에 모시는 것을 어떻게 보는 지란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뭐 누나는 술 취해 있는 것이지만.
둘 다 어른이 됐다고 생각한다.
전에 어떤 프로그램 기획에서, 어머니가 서프라이즈로 나에게 편지를 적어 줬었다.
그 편지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오미가 매일 자유롭게, 깔깔하고 웃으며 즐기고 있는 것이 가족의 빛이었다"
제멋대로 좋을 대로 하는 모습이, 가족의 균형을 유지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둔 것이 아니구나.
어른이 되고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많아졌다.
05 LA에 대하여
이 책을 위해서 로스앤젤레스(LA)에 촬영하러 갔다.
해외에서 촬영이란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스태프에게 부담을 준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떻게든 신신당부하여 실현하였다.
첫 책이라면, 절대로 LA가 좋다.
그것은 직감이라기보다 훨씬 더 확실한 생각으로 있었다.
나도 스태프도 스케줄 시간의 틈을 탄 상당한 강행군이었지만, 가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국내나 다른 장소에 있는 것보다 편안하고 개방적인 기분으로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었고, 본래의 나를 보여줄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LA에는 특별한 애정이 있다.
지금까지 방문했던 어떤 거리보다 나에게 딱 오는 듯한 감각이 있다.
막 데뷔한 시절, LA에 살던 사회 선배에게, 일찌감치 해외의 자극을 받는 것이 좋다고 초대받은 것이 처음이었다.
그때는 이마이치와 함께.
선배가 데리고 다니며 다양한 라이브와 쇼를 보여줬는데, 그 모든 것이 자극적인 체험이었다.
이렇게 대단한 엔터테인먼트가 존재한다면, 나는 더욱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초조해했다.
거리의 공기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깨닫는 듯이 편안했다.
그 후, 산다이메에게 있어서 큰 비약의 계기가 됐던 「R. Y. U. S. E. l. 」의 PV를 찍은 곳도 LA였다.
거기에도 운명적임을 느끼고 있다.
어릴 때부터 계속 지나다니던 훗사와 거리가 비슷하다는 것도 친근감을 느낀 하나의 원인일지도 모른다.
아니, 훗사 쪽이 LA에 닮은 건가?
어린 시절부터 닿아 온 음악과 패션의 대부분이 그 뿌리를 LA에 갖고 있는 것도 의식하고 있다.
사실 이번 촬영도 포함하여, 이번 1년간만 벌써 4번이나 LA를 다녀갔다.
친구와 함께, 강짱과 둘이서, 그리고 나 혼자만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가면 갈수록 LA가 좋아지게 되는 내가 있다.
나는 장래에, LA에 살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서해안의 느긋한 분위기에 기분 좋고, 근처에 바다가 있는 것도 좋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도 포인트이고, 아트의 거리로도 매력적이다.
하지만 왜 살고 싶다고까지 생각하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다.
몇 개라도 좋아하는 점을, 나에게 착 붙는 부분을 들 수 있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이유일까 생각해보면, 그렇다고도 할 수 없다.
주변은 두둥실 하지만, 중심은 확실히 무겁다.
내 LA에 대한 생각은 그런 느낌이다.
그것은 즉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06 언제나 연애하고 싶다
포지티브한 성격인 나는, 연애에 대해서도 늘 긍정적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가능하면 항상 연애하고 싶다.
아티스트로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으로서, 연애는 절대로 필요한 것.
간단하게 말하자면, 연애한 적이 없는 사람이 사랑 노래를 불렀다고 해서, 그게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노래가 될 리 없지 않나.
나는 항상 내 경험과 거기서 생겨난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
만약 실연했다면, 실연의 노래를 써서 "이런 젠장!"이란 마음을 드러낸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다.
아티스트를 떠나서, 연애는 살아가는 데 큰 활력을 준다.
연애하고 있다,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자신을 갈고닦고 싶다는 욕구도 끓어 오른다.
멋진 헤어 스타일이 하고 싶다거나, 새로운 옷을 사고 싶다거나, 상냥한 사람이라고 생각되고 싶다거나, 타인으로부터의 시선이나 인상을 조금이라도 잘 보이기 위해서, 이것저것 노력하게 된다.
아니, 노력이라 할 정도로 의식하고 힘쓰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다면, 샤워는 귀찮으니까 그냥 내일 해도 괜찮다는 느낌으로, 무슨 일에도 느슨하게 되어 버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연애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듯이 상당히 어려운 것이니까, 하고 싶다고 생각할 수 없다.
게다가 지금은 일 모드에 들어가서, 일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는 건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어, 일대일의 제대로 된 연애 관계에서는 꽤 멀어지고 있다.
덧붙여서 자주 "소개팅 같은 거 많이 하고 있죠?"라고 질문을 받는데,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하지 않는다.
귀찮다.
그런 시간이 있으면, 마음이 맞는 남자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며 왁자지껄하고 싶다.
그래도 운명적 만남이라는 걸 머지않아 당연히 할 거라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확신하고 있다.
내일이라도 모르고, 몇 년 후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타이밍이 오면 제대로 연애를 하고, 깔끔한 단계를 밟고서, 장기적으로는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내가 자란 것과 같은 가정을 갖는다면 좋겠다.
그런 날은 먼 이미지라, 상당히 막연하게 있지만, 그 집과 같은 공기가 흐르고 있는 가정으로 하자는 생각은 꽤 전부터 있다.
하지만, 우선은 연애다.
연애는 하고 싶다.
팬 중에는, 그런 이야기는 듣기 싫다는 분도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지 연애하고 싶다.
그런 사람이다.
그럼, 분명 더 좋은 노래를 부르게 된다고 생각한다.
07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중학교, 고등학교, 전문 대학으로 아직 노래의 일을 만나기 전의 내가 일관되게 계속 들어온 말이 있다.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남녀 관계없이, 처음 만난 사람은 대체로 그렇게 말했다.
만나는 여자 친구에 이르러서는 100%의 확률로 말했다.
꼭, 한다.
아직 친구든 뭐든 아닌 사람의 말은 신경 안 써도 괜찮아도, 내가 엄청나게 좋아하고 있는 여자의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에는 당황했다.
내 생각이 전달되지 않은 것에 깜짝 놀랐다.
나는 여자 친구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하고 싶은 타입.
그녀가 아침에 일어나서 이런 걸 하고 있다면 기쁘겠다고 생각하면, 부탁받지 않아도 해주고 싶다.
기념일 선물 등도 기쁘게 찾아보는 편이다.
다시 말하면 일상의 행동으로 내 마음이나 생각은 충분히 나타내고 있는 셈인데도, 그것이 전해지지 않은 거다.
그녀 입장에선 말해 주지 않으니까 알 수 없다고 되는 것이다.
엄청 계속 들어 왔으니까, 나는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른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업무상으로는 나름대로 주의하고 있었지만, 어느 날, 이런 일이 있었다.
멤버 다 함께 밥을 먹고 있었다.
처음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그룹의 미래에 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렇게 되어 가면 굉장하지 않아?"
"그거 대박이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어째야 하나"
대화는 점점 열기를 띠어 갔다.
그때, 이마이치가 나를 향해, "그렇다면 너, 더 열심히 하자" 같은 말을 한 것이다.
산다이메를 잘 하고 싶다면, 토사카가 더 노력해야 하지 않냐는 것이다.
물론 술자리의 이야기이긴 하다.
그래도 나로서는 나만의 방식으로 힘껏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뭐야? 나도 하고 있잖아"라고 반응했다고 생각한다.
정말 뜻밖이란 느낌이었고, 이마이치가 그런 식으로 생각했단 것에 놀라기도 했다.
이미이치와 나는 노래와 활동에 대한 스탠스가 다른 것은 분명하다.
그는 보이스 트레이닝을 비롯한, 최대한 준비를 하는 타입.
그런 그가 보면, 나의 그 자리에서의 감정에 충실하여 노래하고 싶다는 스타일은, 때론 나태하게도 보이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런 보컬리스트인 것은, 이마이치에게도 충분히 전달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항상 옆에서 노래하고 있는 이마이치라면 이해해 줄 거라고.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그 뒤, 이마이치는 나에게 있어서 귀에 익숙한 그 말을 한 것이다.
"너는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좀 더 생각하고 있는 걸 말해"
또 시작이다 생각하면서도, 무책임하게 놀고 있을 때와는 완전 다른 마음으로 일에 임하고 있다는 자부는 있었으므로, 나는 반박했다.
"아니, 나는 말한 거나 다름없는데"
그리고 이마이치와 나는 처음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말한 셈 같은 건, 알 수 없거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걸"
"그런 건 모르지"
평소라면 멤버 중 누군가가 중재해주지만, 모두 들어올 수 없을 정도의 긴박한 공기가 되어 있었다.
나 vs 이마이치라는 게 굉장히 드물어서, 깜짝 놀라기도 한 것이다.
모두 말 없이 술을 홀짝홀짝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이마이치와 나는 성격도 정반대.
그는 어쨌든 말로 해서 솔직히 전달하려는 타입.
나는 행동으로 보이고서 이해받고 싶은 편이다.
각각 다른 사람이니까 그래서 좋지 않나 생각한 건 있지만, 이 싸움을 지나치면 그룹으로서는, 더군다나 나와 이마이치의 사이에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진심으로 이해했다.
내가 뭔가를 주장해서 다른 사람들과 충돌하는 것은 귀찮다.
일일이 그런 일은 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다.
그것이 내 생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상대와 일을 소중히 생각한다면, 내 성격을 바꿔서라도, 말로 해야 하는 것이 있다.
만약 이 싸움이 없었다면, 나와 이마이치의 관계는 지금보다 더욱더 얕은, 표면적으로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깊은 유대로 맺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HIRO 씨로부터 "토사카는 착각하기 쉬운 타입이야"라고 들은 것도 크다.
"사실은 제대로 의지를 갖추고 노력하고 있는데도, 그게 주변 사람들에게 전달이 어려운 거지"라고.
나를 잡아 준 HIRO 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큰 문제다.
어쩌면 팬분들에게도 그런 인상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 성격의 근본을 바꿀 수는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의한 대로, 느낀 것, 생각한 것을 말로 상대에게 전할 수는 있다.
간단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직업인 이상, 그것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다.
이마이치와 HIRO 씨에게 소중한 것을 가르침 받았다.
08 항상 곁에 노래가 있었다
데뷔 계기가 되었던 "EXILE Presents VOCAL BATTLE AUDITION 2"
그때까지 음악에 관련된 일을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던 나는, 프로그램 안에서 "경험치 제로의 신데렐라 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확실히 그랬다.
애초에 가수가 되겠다고 생각이 든 것도, 오디션 직전이었다.
그래도 음악은, 노래는, 어릴 때부터 항상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노래를 정말 좋아하는 아이였다.
아버지는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엔카를 들으며 함께 노래하는 분이었다.
어머니는 카세트로 유행하는 노래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데, 어머니의 나이에서는 꽤 젊은 세대의 팝도 듣고 있었다.
하마사키 아유미 씨가 흘러나올 때는, 과연 이 사람 어디까지 뒤쫓아가는 걸까" 라고 생각했다.
누나의 방에서도 항상 음악이 새어 나와서, 뭘 듣고 있는지 귀를 쫑긋 세웠던 기억이 있다.
가족 모두가 가라오케에 간 적도 자주 있고, 아버지와 둘이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고 있는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 환경에 자랐으니까 노래는 좋아했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부르는 것도 저항은 없었다.
눈에 띄고 싶고 장난을 좋아하는 성격도 있어서, 동네 축제의 스테이지에 멋대로 올라서서, "춤추는 폼포코링(おどるポンポコリン- B.B.クィーンズ[ちびまる子ちゃんOP])을 부른 적도 있다.
조금 부끄러운 추억.
용돈을 모아서 스스로 CD를 사게 됐다.
처음 산 것은 "코메코메 클럽"의 "낭만 비행"(米米CLUB「浪漫飛行」)
카세트에 재녹음해서, 집에 있던 구식의 거대한 카세트를 들고 다니며, 놀러 가는 곳마다 들었다.
유행하는 노래는 구별 없이 들었고, 펑크와 록도 보통 통과했다.
중학교쯤에 훗사라는 동네의 영향으로 힙합에 푹 빠지기 시작하고, 고등학생이 되고서 R&B의 세계에 끌려갔다.
하지만 힙합이 좋으니까, 일본 노래는 듣지 않을 거란 고집 같은 건 전혀 없었던 것이, 지금 와서 보니 다행이었지 않나 생각한다.
어떤 장르라도 괜히 멀리하지 않고, 순수하게 좋다고 생각하는 걸 듣고, 또 들었다.
이 잡식 같은 소리 체험은, 보컬리스트로서의 나에게 틀림없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 시절, 들었던 어떤 노래도, 지금 흐른다면 그때의 상황이나 마음이 순식간에 떠오를 정도로 내 안에 강하게 새겨져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깊은 추억의 노래가 있다.
내가 중학생 때에 발매된 EXILE의 데뷔 곡"Your eyes only~뚜렷지 못한 나의 모습~(Your eyes only~曖昧なぼくの輪郭~)"가 그중 하나다.
클래스의 유행하는 걸 잘 아는 친구가 CD를 학교에 가져와서, "그거 알아?"라는 느낌으로 들려줬다.
엄청나게 좋았다.
처음엔, 당연히 서양 음악이라고 생각해서, "뭐야 이거! 굉장하네. 누구야?"라고 친구에게 물었다.
"EXILE 이라고 해, 일본인이야"
그 말에 더욱 충격을 받았다.
이런 멋진 곡을 일본에서 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 후에 곧바로 일본어 버전도 듣고서, EXILE은 내 안에서 일본 아티스트로는 단연 톱의 자리에 올라섰다.
몇 번이나 계속 반복해서 듣고, 가라오케에서도 부를 수 있도록 연습했다.
여자도 함께 가라오케에 갔을 때, 아직 EXILE을 모르는 애들 앞에서, "몰라? 내가 불러 줄게"라는 느낌으로 선보이는 것이 쾌감이었다.
EXILE의 노래를 부르면 인기가 많아질 거라고 믿고 있었다.
또 하나의 인상적인 곡은, 데뷔 전에 훗사의 바에서 일하던 시절에 처음 알게 된 "Joe"라는 아티스트의 "I Wanna Know"라는 발라드이다.
PV도 멋있고, 무엇보다 어른스러운 정서적인 분위기에 빠졌다.
그래서 얼마간은 여자와 단둘이서 좋은 느낌이 되게 되었을 때, "아, 잠깐만 기다려"라며, 일부러 "I Wanna Know"를 흥얼거렸다...
훗사의 바에서는 매일 최신 히트곡을 접했다.
DJ를 하던 친구가, 클럽에서 잘 나가는 음악을 15곡 정도 모아서 한 장의 CD로 준 것이다.
매주 보낸 그 CD를 밤새 틀어놓은 채로 일했다.
부르면 좋겠다고 계속 생각했다.
그렇게 항상 음악이 곁에 있고, 노래를 좋아했다면, 어째서 진작 내가 노래하는 쪽이 되지 않았는가.
부르는 것뿐만 아니라, DJ를 한다든가, 밴드를 결성한다든가, 음악을 발신하는 쪽이 되는 방법은 있었을 것이다.
DJ 친구가 있었고, 학교 축제에서 라이브를 하고 있는 동급생도 봤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한다.
억지로, 사춘기의 나로 되돌아가서 생각해보면, "나는 이게 좋아" "이걸 하고 싶다고" 라고 말하는 것이 꼴사납고, 부끄럽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마 가수가 되고 싶다, 음악으로 살아가고 싶다라는 마음은 당시부터 마음 어딘가에는 있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단 것도 알고 있었다.
가수로 성공하는 건 정말 극소수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럴 것이 애초에 어떻게 해야 가수가 될 수 있는지 조차 몰랐던 것이다.
하라주쿠를 걸으면 스카우트 되는 건가? 라든가, 역시 데모 테이프 같은 걸 만드는 건가? 따위의 수준의 발상 밖에 없었던 셈이니까.
"나는 가수가 될 거야" 따위의 말은 하지 못했다.
그런 현실성이 없는 말을 할 용기는 없었다.
그러면 가수보다는 길이 분명히 보이는 미용사 쪽이 괜찮다고 생각해서, "미용사가 되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으로 자신을 납득시키려 했다.
노래에 관해서는 가라오케에서 즐겁고 기분 좋게 부르며, 친구들에게서 "잘하네"라고 듣고, 그걸로 만족하려고 했다.
만약 고등학교 때 한걸음 내디뎌서, 음악의 길에 전속력으로 돌진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건 정말 알 수 없다.
지금과 똑같이 큰 무대에서 많은 팬분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었을까.
어디까지나 가정하는 이야기라 뭐라 할 수 없지만, 그건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머니로부터 "너는 인간관계를 끌어당기는 힘이 강해"라고 들은 적 있다.
축구에 전념하던 중학교 시절에도, 장난만 치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리고 사회에 나가서 일하던 때에도,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이 이끌어 주고 있다, 라고.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는 분도 몇 명 있고, 그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절대로 없었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다양한 분들이 이끌어 주셔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지금의 내가 있다.
돌고 돌아서 겨우 다다른 노래의 세계.
물론 여기에서도 이끌어 주시는 분과 감사한 만남이 숱하게 있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세계를 볼 수 있도록 했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단순히 음정대로 정확하게 부르면 된다는 것이 아닌 이상, 지금의 나라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어떤 형태가 되든, 나는 앞으로 계속 노래를 불러 나간다.
평생을 걸쳐서 노래라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09 콤플렉스의 행방
뭐야, 이 "히로오미"라는 이상한 이름은.
어렸을 때부터 계속 그렇게 생각했다.
왜 "유키"나 "유스케" 같은 일반적인 느낌의 이름이 아닌지.
이름을 지어준 할머니 왈,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의 덕을 본 거라고 한다.
"히로오미" 안에는 확실히 "로미오"의 3글자가 포함되어 있다.
로미오의 그 비극적인 인생을 생각하면, 과연 닮을 만한 인물인지는 미묘하고, 지금에 이르러서도 로미오만큼 멋진 남자에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놔둔다 치고, 우선 "臣(오미, 신)"이 이름에 들어 있는 사람은 내 세대에서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물며 "토사카 히로오미"라는 동성 동명의 사람은 아직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토사카"라는 이름부터, 닭[鶏 , ニワトリ]의 토사카[鶏冠 , トサカ , 닭 볏] 같다 따위의 놀림 받는 쪽을 하는 싫은 생각을 했다.
여러 가지 생각난다.
학년이 올라가고 담임 선생님이 바뀔 때, 한 번에 올바른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았다.
"타(タ)"행의 사람 이름을 부를 무렵부터, 이미 싫은 기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노보리자카 군?" [*ノボリザカ , 上り坂 - 오르막]
역시 이건가.
매년하듯이 낙심했다.
중학교 정도까지는 "토사카 입니다" [*トサカ , 登坂 - 오르다] 라고 정정했지만, 점점 귀찮아져서, 잘못 불러도, "네"라고만 대답하게 되었다.
어쨌든 "토사카 히로오미"라는 내 이름을 오랫동안 좋아하지 않았다.
좀 더 보통의, 흔한 이름이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름과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콤플렉스라고 생각한 것이 있다.
눈물점이다.
오른쪽 눈 아래의 눈꺼풀 쪽에 톡 있는 점.
매일 거기에 머무르고 있는 점.
이게 싫어서 견딜 수 없었다.
주위 친구의 얼굴을 둘러봐도, 이런 눈물점을 가지고 있는 녀석은 없다.
거울 앞에 서서는, 없어지지 않으려나,라고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충분히 어른이 된 내가, 내 이름과 눈물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면, 다른 사람과 좀 다르다는 건 괜찮을지도 몰라, 인 것이다.
다른 사람과 달라서 싫어, 에서 180도 전환.
이건 생각해보면 굉장한 일이다.
이 두 가지는 고민해도 별 방법 없어, 그러니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타이르며 와서 이렇게까지 바뀐 것은 아니다.
의식의 힘으로 콤플렉스를 극복한 것은 아니다.
더욱더 단순한 이야기.
나이가 들수록, "토사카 히로오미"라는 이름을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져 갔다.
오히려, "이름, 멋지네" "독특해서 부러워" 라는 말을 해주게 된 것이다.
아, 그래? 이 이름 충분히 좋은 느낌인 거야?
나는 조금씩 내 이름이 싫지 않게 되어 갔다.
점점 나만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눈물점은, 10대 후반부터 4년간, 진지하게 만난 여자친구로부터 "눈물점 귀여워" "그 눈물점, 나도 갖고 싶어" 라고 들은 것이 크다.
네 여기요, 하고 줄 수는 물론 없지만, 여자 친구 입장에서는, 나의 이 어떻게든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검은 점도, 부러움 받는 것이었다.
화장으로 일부러 그리는 사람도 있는 정도인 것도 알았다.
나도 이 눈물점이 마음에 들어.
어느덧 그런 마음으로 변해 갔다.
게다가 지금, 팬분들이, 이름과 눈물점을 좋아한다고 말해줄 때가 많고, 그런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콤플렉스라고 믿어 온 그것들이, 매력 포인트로서의 입지가 하루하루 강해지고 있다.
역시 단순한 이야기다.
칭찬 덕분에, 좋아하게 되었다.
가능하면 나의 모든 것은 통째로 당연하게 좋아하고 싶다.
하지만 싫은 부분을 굳게 좋아하게 되는 것은 어렵고, 그건 꽤 힘들다.
그러니까 칭찬해 주는 사람을 찾는 거야! 라는 건 너무 무책임한 제안이라고 해도, 곧 그런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거라고, 경험자의 한 사람으로서 말하겠습니다.
나도 과거의 나에게 알려주고 싶다.
20대 후반의 나는, 이제 그걸 콤플렉스라고 생각하지 않겠다.
신경 쓰는 건 그만두고, 더욱더 매일 즐겁게 놀자, 라고.
10 데뷔와 혈뇨
데뷔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어떤 술집에서 옆에 있던, 어떤 밴드맨과 말다툼을 하게 됐다.
기본적으로 선배(그분은 경력으로는 대선배였다)에게 반항하지 않고, 술 마시고 성급하게 화를 내는 건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그때만은 툭 하고 끊어져 버렸다.
"좋겠네, 무명 생활 없이 바로 데뷔할 수 있고. 갑자기 아레나에서 노래 부른다니 부럽고만"
아무리 취했다고는 하지만, 이쪽의 고생도 모른 채, 그런 빈정거림을 내던진다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로서는, 당신이 질투하고 있는 아레나가 무명 생활이야!"
나는 상당한 기세로 반론을 거듭했다.
"그럼, 나 대신 아레나에서 노래해. 라이브 하우스에서 기분 좋게 노래 부르는 당신이랑 다르게, 음정 하나 놓치지 않고, 가사도 틀릴 수가 없어! 그 압박감에서 당신은 할 수 있겠어?!"
지금 생각해보면 말이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데뷔 직후인 격동의 나날이라, 어떻게든 내 역할을 다하는 것이 벅찼다.
어쩌면 무리일지도 모른다고 비명을 토해내는 나 자신과 싸우면서, 실력과는 어울리지 않는 큰일로 향하고 있었다.
오디션에 합격하고, 1주일 후에는 녹음이 진행됐다.
그 몇주 후에는 메이저 데뷔.
시부야 거리에 거대한 간판이 내걸리는 등, 상당히 화려한 데뷔였다.
게다가 처음으로 준비된 스테이지가 갑작스러운 요코하마 아레나.
엄청난 속도감이었다.
뮤지션에 일반적인 이치란 없다고 해도, 우선 길거리에서 노래하고, 다음엔 라이브 하우스, 점점 회장이 커지게 되고, 무도관, 그리고 아레나라고, 잘 알려진 단계라고 할까 계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비하면 요코하마 아레나부터 시작되는 건 이례 중의 이례.
전대미문인지도 모른다.
요코하마 아레나에서의 실수는 평생 잊지 못할 결정적인 것이었다.
처음으로 한 최대의 좌절이라고 할 수 있는 경험이다.
시작하기 전은 "아자! 해보겠어"라고 힘을 냈지만, 그곳에는 패기만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첫 번째 곡을 부를 때부터 위험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노랫소리가 누구의 마음에도 스치지 않고,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짝인 이마이치도 마찬가지로 심했다.
서로가 서로를 보조하고, 다시 고치고, 바로 잡으려고 할 때마다,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바닥까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음정을 놓쳤다든가, 가사를 틀리지 않았다든가, 그런 레벨을 넘어서, 노래로 전혀 성립되지 않았다.
이변을 눈치챈 퍼포머들은 어떻게든 댄스로 커버하려 해줬지만, 노래의 영역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노래는 나하고 이마이치 둘이서 부를 수밖에 없다.
분명하게 회장에 있던 사람 모두가 알아차린 실수였다.
사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태였다.
영원할 것 같았던 길고 긴 스테이지를 끝내고, 무대 뒤로 돌아온 순간, 나와 이마이치는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 자신이 바보였다.
이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리고 이 무대를 준비해 준 HIRO 씨와 EXILE 분들, 스태프분들의 얼굴에 먹칠을 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HIRO 씨가 신경을 써주셔서, 다 함께 중화요리를 먹기로 했다.
나는 너무 염치가 없어서 HIRO 씨의 얼굴도 못 보겠다는 마음이었지만, 불참할 수도 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 가게에 들어갔다.
HIRO 씨는 그런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처음은 다 그런 법이야"라며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셨다.
그 말도 너무 고통스러워서, "정말 죄송합니다(申し訳ありませんでした)"라고 울면서 사죄했다.
집에 돌아가서도 쇼크가 풀리지 않아서, 화장실에 틀어박혀서 오랫동안 오열하고는 계속해서 토해냈다.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게 되고, 시큼한 위액밖에 나오지 않았다.
새벽이 되어 역시 울다 지쳤다 싶었을 때, 소변을 누려고 하니, 피의 색이 섞인 액체가 나왔다.
혹시 이것이 혈뇨인가.
과연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즉시 병원에 갔더니, 진단은 "극심한 스트레스네요"
그대로 말하자면 그런데, 스트레스로 혈뇨가 정말 나온다니 놀랐다.
"이제 그만두고 싶습니다"
다음날, 나오키 씨에게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언제까지고 그런 라이브가 계속이라니 생각할 수 없습니다. 부담감에 견딜 수 없으니까 그만두고 싶어요"
나오키 씨의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뭐, 어때"
생각 외로 담백한 말에 맥이 빠졌다.
"정말 무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만둬도 괜찮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인생이 끝난 건 아니잖아"
이 한마디에서 좀 후련함을 느꼈다.
그만두려고 하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
그렇다면 우선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는 것도 좋을지도 모른다.
TAKAHIRO 씨에게도 격려받았다.
TAKAHIRO 씨는 EXILE의 도중부터 가입했다.
"나도 처음 엠스테 생방송 앞이나, 직전까지 토했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실망한 팬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앞으로의 노력으로 바로 잡아 고치면 좋겠어"
더 이상 없을 정도로 고마운 말이었다.
보컬리스트로서 굉장히 존경하는 ATSUSHI 씨를 만났을 때도, "실수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는데, ATSUSHI 씨도 역시 웃으며 부드럽게 말해주셨다.
"갑자기는 무리인 거야. 그런 거라구"
ATSUSHI 씨는 내가 혈뇨로 병원에 간 것도 알고 있었다.
"위험하네. 혈뇨는 LDH 최초인 거 같은데"
LDH 최초....참으로 씁쓸한 훈장이다.
그것을 정말 훈장으로 바꾸기 위해서, 그리고 격려해준 모두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서, 난 지금, 어떻게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11 심술꾸러기
초조했다.
진심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팬인 남자아이로부터, "동경하고 있습니다" "노래를 정말 엄청 좋아합니다" 라고 들었을 때.
데뷔 당시보다는 훨씬 자신감을 느끼고 있지만, 앞으로 더 위를 목표로 해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도 그런 풍으로 듣게 되어서, 기쁘다고 생각하기 전에, 굉장히 초조했다.
그 아이의 마음속에서 지금, 나는 최고로 좋은 느낌의 상태인 것이다.
최고라는 것은, 그 후는 떨어져 가는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
기껏 하여, 급강하하지 않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가능하면 평생 MAX로 계속 있고 싶다.
동경의 존재로 계속 있어야 하는 직업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래서, 팬들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우쭐하는 경우는 없다.
상이라는 걸 받는 것도 초조하다.
처음으로 출연 시켜주신 영화 "핫로드"에서, 여러 신인상을 받았는데, 물론 그건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아니며, 고맙기 짝이 없는 것이지만, 엄청 면목 없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그만한 실력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나, 첫 영화에서 4개나 상 받았어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무리.
굉장히는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솔직히, 숨고 싶어 버릴 정도.
일본 레코드 대상을 받을 때도, 역시 초조했다.
기쁘다는 마음은 물론 있었다.
인생에서 그런 순간을 맛본다는 건 그렇게 잘 없다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톱인 음악상을 받고 나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곤란하지 않나 생각했다.
현상 유지로는 불충분.
아티스트로서 더 커지지 않으면, 저 녀석들은 우연이었다고 생각될 수 있다.
굉장히 초조했다.
심술꾸러기인 성격인 건가.
칭찬을 받거나, 인정받더라도, 좀처럼 솔직히는 기뻐할 수 없다.
정말로? 과장이 아니라? 나로 괜찮아?
그런 생각이 바로 떠오른다.
부정적이란 것은 절대 아니다.
또 말하게 되는데,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긍정적인 사람이다.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자신을 드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원래 노력을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편하게 가자는 분위기로 살아왔다.
그런 인간이 이 격렬한 세계에서 살아나가려면, 모든 것을 계기로 자신을 몰아붙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굉장하네요" 라고 듣고서 "당연하죠" 따위를 말하면, 성장은 즉시 멈춰버린다.
이런 나에게도, 언젠가, 솔직해지는 때가 올까.
그런 날을 바라고 있는 듯, 아닌 듯, 그건 좀 미묘한 부분이기도 하다.
12 아이돌이란
나는 나 자신이 아이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돌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이건 오해가 없도록 강하게 말해두고 싶은 점이다.
그런 건 아니다.
다만, 나는 결코 아이돌은 할 생각이 없고, 앞으로 그런 존재를 목표로 할 생각도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생 속에서 아이돌적인 것에 동경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곡을 듣고 자랐지만, 누군가의 포스터를 방에 장식한 적이 없고, 좋아하는 사람을 한번 보고싶단 마음으로 콘서트에 간 경험도 없다.
친한 친구 중에도 그런 타입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힙합이나 R&B를 중심으로 하는 여러 노래를 들어온 나는, 나에게 영향을 준 노래와 같거나, 그거 이상의 근사한 것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을 동기로 하여, 지금, 발신하는 쪽에 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여성 팬분들로부터 "꺄~!"라는 성원을 받는 경우도 많다.
물론 그건 고마운 일이고, 그 "꺄~!"는 내 안에 아이돌적인 요소가 적잖이 있으니까 들려오는 거라고 생각한다.
프로패셔널로서, 지금은 힘껏, 그 "꺄~!"에 응답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있다.
그렇지만 나는 벌써 28세.
젋지 않단 것은 자각하고 있다.
앞으로, 언제까지나 뜨거운 성원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그렇게 되기 전에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나 자신의 아티스트로서의, 가수로서의 순도(純度)를 높여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기심에 치우친다든가, 갑자기 캐릭터를 바꾸려고는 하지 말고, 산다이메나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주시는 분들과 함께,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금 거들먹거리는 말이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나의 방식으로, 나의 노래로, 모두를 에스코트하는 임무를 맡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이돌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간단하다.
중요한 건, 그럼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
그것은, 앞으로의 활동으로 입증해나갈 수밖에 없다.
13 유일한 취미
우리 멤버들은 각각 취미를 가지고 있다.
제일 '취미인'은 켄지로 군.
낚시, 프라 모델, 오토바이...이제 본격적으로 그 길을 추구하는 레벨에 이르고 있다.
그 외에도 NAOTO 씨는 골프를 한다거나, ELLY는 엄청나게 대담한 쇼핑을 한다거나, 모두 각자 휴일을 뜻깊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에 비해 나는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잘 생각해보니 있었다.
여행을 가는 것이다.
국내, 국외 불문하고, 2일 이상의 휴일이 있으면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정한 건 아니고, 휴일이다 하고 정신 차려 보면 벌써 몸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다.
2일이라면 해외는 어렵다.
그럴 때는 오이타(大分)의 단골 온천 여관에.
넓은 욕조에 느긋하게 잠겨서, 현지의 맛있는 밥과 술을 먹는다.
기분 전환이라는 말이 찰떡인, 몸과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 시간이다.
3일 이상 휴식이란 건 감사하게도 지금은 거의 없지만, 그런 타이밍이 보이면, 망설이지 않고 해외.
가까운 곳으로 말하자면 괌이다.
어랏? 내일부터 휴식이네, 알아차린 순간에 친구에게 전화해서, "갑작스럽지만, 내일 괌 가지 않을래"라고 권유.
그래서 OK가 된 녀석과 함께, 다음 날 아침에는 비행기에 타고 있다.
괌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가 질 때까지 계속 수영장과 해변에서 음악을 들으며 빈둥빈둥하고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클럽에 놀러 간다.
그런 건 일본에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좀처럼 용납되지 않는다.
저녁까지 자는 날은 거의 없고, 클럽도 전보다는 꽤 가기 어려운 장소가 되어 버렸다.
괌에는 예전부터 당연하게 해온 것을 되찾으러 가는 느낌인지도 모른다.
좀 더 긴 시간이 될 때는, 지금 빠져 있는 LA에.
이 책을 위해서도 방문한 LA다.
거리의 분위기를 느끼거나, 쇼나 라이브를 보는 건 큰 자극이 된다.
일본에서 다른 아티스트의 라이브에 간 적도 있지만, 아무래도 리얼하게 동업자라는 의식이 있어서 순수하게 즐기는 것은 어렵다.
세트 리스트부터 무대 미술, 조명 등등 모든 것이 신경 쓰인다.
그런 점에서, 해외 아티스트는 좀 더 관객의 시선으로 볼 수 있다.
셀린 디온의 노래를 들으면, 이미 단순하게 굉장해~로 되어 버린다.
그래도 이 예술가들을 우리의 공연에 부를 수 없을까 생각해버리는 나이기도 하기에, 100% 관객이라 할 수 없지만.
LA 외에라면 파리가 마음에 든다.
루브르 박물관이 좋다.
일본에서는 여유롭게 미술관 순례를 할 시간은 좀처럼 없지만, 예술에 닿는 건 나의 무언가를 열어 가는 느낌이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파리는 패션에 대해서도 자극을 주는 곳.
파리 컬렉션에도 가고 싶다.
그리고 나는 여행용 짐이 이상하게 적다고 듣는다.
꼭 챙기는 것은, 여권과 지갑, 그리고 휴대 전화.
이상.
바지조차 챙기지 않는다.
현지에서 사서, 쓰고 버리는 스타일이다.
옷도 필요하면 사면 된다.
일하는 거 외에 슈트케이스를 데굴데굴하는 것도 싫어서, 쇼핑으로 짐이 늘어났다면, 그쪽에서 슈트케이스를 사면 되잖아 라고 생각한다.
여행에 관해서는 되는대로 막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평소의 일에는 그렇지 않다.
시뮬레이션이나 준비가 필요하고, 나도 모든 것을 되도록 요령 있게 하고 싶다는 타입이다.
그래서인지, 거꾸로인 건지, 여행은 일단 부랴부랴 빈손에 가까운 모습으로 가서, 가능한 한 텅 빈 모습에 가까운 상태로, 보고 느끼고 싶다.
스케줄도 세우지 않는다.
가 버린 후에, "이 라이브에 가볼까"라든가 "유니버설 스튜디오 좋겠네"라고 생각하는 게 즐겁다.
왜 이렇게 여행을 좋아하는 걸까.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르지만, 일본이라면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여 편안하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아마 아웃풋과 인풋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일을 계속하고 있으면, 아무래도 내보내는 쪽이 많아진다.
그런 날이 지나치게 계속되면, 마음도 몸도 바짝 말라버린다.
그런 나에게 물을 주는 작업으로써, 여행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일본에서 좋다고 알려진 것과, 세계의 다른 곳에서 좋다고 알려진 것은 반드시 같은 건 아니다.
그 차이를 느끼는 것으로,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일을 다시 한번 살피는 것도 가능하다.
혼자 여행에는 혼자 여행의 장점이 있고, 친구와 함께라면 일어나는 즐거움이 증폭되는 것도 알고 있다.
목적지도 제법, 다양한 셈이 되었지만, 지도를 보면 방문한 적이 없는 장소투성이 이다.
아직 본 적 없는 것, 모르는 것이 있다는 건,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그걸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나라는 사람의 가능성과 함께인지도 모른다.
14 허세의 본심
예를 들어 빌딩 옥상에 있고, 그 빌딩이 몇 초 뒤에 무너져버린다고 하자.
옥상에는 나 외에 다른 사람들도 몇 명 있고, 그중에는 당황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살아나는 방법을 찾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건 확실하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하면, 일찌감치 단념하고, 최대한 시치미를 뗀 채로 죽어가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발버둥치지 않고 미련 없이 깨끗하게.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건 아니다.
나에게는 무리해서라도 폼을 잡으려는 버릇이 있다.
나 자신도 주체 못 해버릴 정도로, 철저하게 그런 성격이다.
누구에게도 멋있는, 이상적인 나로 있고 싶다고 생각한다.
가족 정도에게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냐는 건 머리로는 알고 있다.
약점이나 형편없는 나를 보여줘 버려도 상관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친한 친구나 연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표면적인, 얕은 만남은 원하지 않으니까, 그들에게는 가끔은 싫은 부분을 보여도 상관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나 불가능하다.
그래서 항상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들어버린다.
앓는 소리도 내지 않고, 항상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했으니까, 그런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는지도 모른다.
여자나 후배와 함께 있을 때는 절대로 돈을 내지 못하게 하고, 고민을 털어놓는 일도 없다.
솔직히, 그런 나에게 나도 지치는 건 있지만, 불가능한 건 불가능한 거니까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고도 있다.
그래도 이 성격이 아티스트에게는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CD나 라이브,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도 그렇지만, 내가 활동하고 있는 곳의 대부분은, 누구나가 노력한 결과를 선보이는 곳.
거기에서 필요한 건 어디까지나 결과이며, 거기까지에 어떤 고생이 있었는지, 얼마나 대단한 생각을 했는지는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보여도 상관없다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내 성격으로는, 그건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
완성된 걸 접한 사람이, "이 사람, 엄청 노력했구나"라고 생각해주는 쪽에는 별로 상관없지만, 그걸 내 입으로 하는 건, 멋있지 않고, 작품이나 팬들에게 실례라고 생각한다.
왠지 여기에서도 무리하게 멋진 걸 말하려고 하는데, 요점은 극도의 허세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깨달은 것인데, 나는 왜 여기 내 책에서, 폼 잡고 있는 허세따위를 고백하고 있는 건지.
이런 저 입니다 라고 알리고 싶은 건가.
사실은 나도 걱정입니다 라고 털어놓고 싶은 건지.
그렇다면 그거 굉장히 꼴 사납단 생각이 드는데...
계속 허세 떠는 것도, 꽤 어렵다.
15 대 실연
항상 연애하고 싶다는 타입이지만, 지금까지 만난 여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한번 사귀면 적어도 2, 3년은 이어진다.
그리고 끝날 때는 대부분 내가 차인다.
여기에도 나의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어"란 성격이 관계있다고 생각한다.
상대를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생각해도, 그것이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가 불안해지고, 언젠가 내가 차이기 전에 이쪽에서 헤어지고 싶다, 같은 느낌이 되어 차버린다.
대부분 그렇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수많은 실연(이라 해도 그렇게 많지 않지만)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었던 대 실연에 대해서 여기에 적고 싶다.
나는 그 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사귀기 시작한 건 19살 때.
그때까지 사귀었던 여자는, 내가 어렸기 때문에, 솔직히, 외형을 본 부분이 컸다.
하지만 어른으로서의 의식도 생기기 시작한 19세, 그녀는 귀여울 뿐만 아니라, 성격도 이상적인 그 자체였다.
지금도 가끔 술자리에서, 이상형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럴 때 내가 말하는 건 정해져 있다.
밝고, 상냥하고, 여성스럽고 깔끔한 사람.
말투가 이쁘고, 일반 상식이나 매너를 제대로 아는 사람.
그리고 목표를 높게 가지고 있는 사람.
*明るくて、優しくて、女性らしい清潔感がある人。
言葉遣いがきれいで、一般常識やマナーをきちんと知っている人。
そして目標を高く持っている人。
마지막의 "목표를~"이란 무엇이든 일에서 이렇게 되고 싶다는 것만이 아니라,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강한 마음이 있는 거라도 좋다.
무언가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향하고 있는 사람으로 있으면 좋겠다는 의미다.
그녀는 이것들 전부를 충족했다.
뭐랄까 이상형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때는, 그때의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하는 듯한 기분이 있다.
그만큼 그녀가 좋았다.
결혼한다면 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로서 평생 지켜주고 싶고, 돕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리는 헤어지게 됐다.
서로 싫어진 건 아니다.
가정의 사정 등도 있어, 그녀는 다른 사람을 택해야만 했다.
내 마음 안에서, 그녀는 나와 결혼하는 것이 제일 행복할 거란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이기심을 떠나서 정말 그녀를 위해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이 좋은 걸지도 모른다.
그 두 가지의 사이에서 세찬 갈등이 있었다.
내가 둘로 찢겨버린다고 느낄 정도로 고민했다.
복잡하게 고민하지 않고, "결혼하자" "평생 지켜줄 테니까"라고 했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훗사의 바에서 일하던 나에게는, 그런 돈도 자신도 없었다.
그녀에 대한 마음이 굉장히 진심이었으니까, 그런 소중한 것을 간단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도 생각했다.
기세만으로 말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자신이 제대로 생활할 수 있게 되어, 남자로서의 자신감이 싹틀 때 처음으로 "결혼"이란 단어를 꺼내야 하는 것이다.
내 안에 제멋대로인 이상도 있었다.
그녀는 그런 건 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의 각오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엇갈린 채로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연애를 꽤 오랫동안 질질 끌었다.
만약 그때, 이렇게 했다면, 이렇게 말했더라면.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굉장히 생활도 거칠어지고, 계속 술도 마셔 댄 기억이 있다.
그 뒤, 나는 오디션에 합격해서, 아티스트로서 분주하게 활동하는 나날이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렀지만, 그녀와의 날들은, 아직 추억이라 딱 잘라 말하기엔 너무 생생한 감촉을 가진 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녀에게서 배운 것이 많다.
일과 인간관계에는 결정해야 할 타이밍이 있다는 것.
필요한 타이밍에서 필요한 결심을 하지 않으면,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도 잃고 만다.
뒤늦게 아무리 원해도, 다시 찾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그 후 찾게 된 오디션이란 찬스에, 배에 힘 꽉 주고 임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것은, 사람과 사람이 진심으로 마주 보고, 그 사람을 자신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웠다는 것.
그녀가 없었다면, 인생에서 소중한 그것을, 아직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와의 연애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가수로서, 사랑 노래를 부르고 있다.
실연의 노래라도 제대로 내 것으로 부를 자신이 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는 잘됐네, 라고는 간단하게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쓰린 실연이었다.
그런 마음은 이제 두 번 다시 할까 보냐 라고 생각한다.
16 추구해야 하는 것
올해의 칠월칠석, 오랜만에 단자쿠(短冊)에 꿈을 쓸 기회가 있었다.
"더욱더 굉장한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완전 진부하다고 쑥스러우면서도, 꿈이 된다면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솔직하게 그렇게 썼다.
단자쿠 가득히 큰 글씨로.
감사하게도 지금, 산다이메는 많은 분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나도 멤버도 결코 현실에 만족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만족 따위는 있을 수 없다고 초조하게 있다.
돔 투어를 하게 되는 곳까지 왔지만, 이대로의 기세로, 스타디움 투어와 해외 투어 등, 점점 규모를 크게 하고 싶다.
회장이나 관객 수가 커지게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렇게 확대해 가는 시기.
인지도를 높이고, 좋아해 주는 사람을 늘리고, 우리 자신들도 거기에 맞춰 점점 커지는 듯한 이미지다.
갈 데까지 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
단자쿠에 쓴 "더욱더 굉장한 아티스트"란, 그 앞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밖에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가진, 완전 오리지널, 유일무이한 아티스트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이클 잭슨.
그는 그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부르고, 그만이 만들 수 있는 세계를 확립한 위대한 엔터테인먼트의 신이다.
일본에도 오리지널로 유일무이한 아티스트는 있다.
거리에서 새로운 노래를 듣는 순간에, CM에서 한 소절이 흐르는 것만으로도 바로, 이건 누구누구의 노래라고 아는 사람.
그리고 한 곡을 듣고 났을 때, 이런 기분으로 만들어 주는 건 역시 누구누구 씨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아티스트가 되고 싶고,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사람은 적다.
극소수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만,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사람 고유의 세계를 만들 수 있지 않은 한, 아티스트는 단지 소비되면서, 시대에 휩쓸리며 사라질 뿐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 이기심을 빡빡하게 굳히며, 나는 이런 것밖에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 직업은 상대로부터 요청을 받아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노래를 즐겨주는 사람, 마음의 지주로 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계속하는 것도 하는 의미도 없게 되어 버린다.
계속 원하고,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계속 얻기 위해 노력을 아껴서는 안 된다.
데뷔 당시는 이런 식은 생각하지 못했다.
기술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부족한 것투성이였으니까, 주어진 장소에서 어떻게든 완전히 노래하는 것만이 최대한 이었다.
그 과정에서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보컬리스트로의 선배, ATSUSHI 씨나 TAKAHIRO 씨에게 많은 것을 가르침 받았다.
어깨너머인 부분도 있었다.
그 밖에, 공연한 분이나 텔레비전에서 본 아티스트들에게서도 뭔가 훔칠 거 없나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그 단계는 마치고, 다음 단계에 서 있다.
변함없이 ATSUSHI 씨나 TAKAHIRO 씨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 두 분처럼 될 수는 없다.
그들은 그들로 오리지널인 존재다.
나는 나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다.
나밖에 못하는 방법으로, 나밖에 내지 못하는 목소리로, 나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보이스 트레이닝이란 것이 별로 자신은 없다.
컨디션을 조정하기 위해 트레이닝은 받고 있지만, 어떤 식으로 노래할까에 대해서는, 누군가에게 배우거나, 트레이닝을 거듭해서 본을 정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경우에는, 그걸 해버리면, 그것 이상의 노래는 부르지 못할 듯한 기분이다.
나는 누군가의 라이브에 갔을 때, 그 사람이 CD 개돌 부르는 걸 들어도 전혀 확 오지 않는다.
그날 그 자리가 아니면 듣지 못하는 노래가 듣고 싶고, "이 사람, 왠지 오늘은 굉장하네"라고 생각되는 라이브가 보고 싶다.
비록 음정이 빗나가더라도, 엄청난 에너지를 보내는 가수를 보면, 이거야, 이거이거! 라며 흥분된다.
나는 매일 다른 노래를 부르는 보컬리스트로 있고 싶다.
아티스트로서의 내가, 유일무이한 오리지널한 존재로 된다는 건, 나라는 사람 자체가 그렇게 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의 성장 없이, 내 노래만 엄청 커진다니 있을 수 없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까?
나도 아직 모르는 부분이 있다.
사람의 성장 방법에 이론 따위 없을 거니까, 원래 정해진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모든 방향에 안테나를 세우고, 내가 성장하는 근원을 찾으면 뭐든지 탐욕스럽게 흡수해야 한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을 노래의 힘으로 바꿔 가야 한다.
노래를 위해서인 듯한 인생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
한가롭게 있을 틈이 없다.
나는 지금, 굉장히 초조하다.
17 두 사람의 리더 ~멤버에 대하여 그 첫번째
오디션에 합격하여 산다이메의 일원이 되었을 때, NAOTO 씨, 나오키 씨 두 사람과는 엄청나게 거리를 느꼈다.
이쪽은 얼마 전까지 미용실과 바에서 일하던 아마추어, 두 사람은 이미 EXILE의 멤버인 연예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자 함께 힘내봅시다 하고 결정되어도, 당황하지 않는 쪽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당황한 것은 이쪽뿐이 아니라, 두 사람도 이 녀석을 어떻게든 프로의 레벨로 끌어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은 결코 나를 아마추어 취급하지 않고, 자신들부터 거리를 좁혀와 줬고, 굉장히 자연스럽게 이끌어주려 했다.
NAOTO 씨는 산다이메 안에서 아버지스러운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자동차라면 핸들 쪽.
리더로서 그룹의 분위기를 만들어, 모두에게 안심을 주면서, 적절한 쪽으로 향하게 해준다.
NAOTO 씨의 밸런스 감각은 놀랄 만하다.
자신의 캐릭터를 꿰뚫은 후에, 리더니까 해야 할 일은 물론이고, 보통 리더는 그런 거 안 해요, 그런 우스꽝스러운 것도 해준다.
놀림 받는 쪽을 맡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때는 철저히 놀림 받는 사람이 된다.
그래도 리더로서의 태도가 요구될 때는 바로 그런 모습으로 변한다.
회전력이라고 할까 몸의 대처법이 어중간하지 않고 굉장하다.
NAOTO 씨와 함께 있어서 싫은 기분이 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NAOTO 씨가 약한 부분을 보였던 적도 본 적이 없다.
그것도 존경하는 부분이지만, 그래서 약간은 걱정이기도 하다.
보통 집도 그렇겠지만, 아버지, 사실은 무리하고 있지 않나, 하고.
조금은 본연의 부분을 해방해버려도, 지금의 산다이메라면 모두가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NAOTO 씨가 아버지면, 또 한 사람의 리더 나오키 씨는 틀림없이 어머니다.
그런 강한 듯한 모습이지만, 아주 섬세한 것을 말하는 어머니 같다.
나오키 씨의 성실함에는 정말 고개가 숙여진다.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부분까지 봐주고 있고, 누구나가 거기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잖아? 라고 생각할 만한 부분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계속 신경 쓴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쪽이 좋지 않으려나"
모두의 안에서는 이미 결정한 것에 대해서 나오키 씨만 납득이 안 된다는 경우가 있다.
거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건 이미 괜찮잖아" "귀찮아요"라는 분위기를 내도, 나오키 씨는 물러서지 않는다.
산다이메를 더욱더 잘 하기 위해서는, 이상의 형태에 접근하기 위해선, 자신이 귀찮다고 생각되어도 상관없다.
미움받는 쪽이 되어도 좋다고 각오하고 있다.
산다이메가 지금, 이 정도로 많은 분의 지지를 받는 것은 나오키 씨의 섬세한 부분까지의 배려와 자기희생의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성실함, 근면을 그림으로 그린 듯한 성격의 나오키 씨지만, 그의 본래의 기질은 댄스에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열정적이고, 감정이 전면에 나오는 파워풀한 댄스.
내면에 엄청나게 격렬한 부분을 갖고 있지 않다면 저런 댄스가 나올 리가 없다.
사실은 좀 더 자유로워지고 싶고, 푼수 짓을 하거나, 장난치고 싶지도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갑자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행기를 타고서, 오전 중으로 오키나와에 다녀 왔어(!)라는 놀랄 만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아주 죽여준다.
갑자기 오키나와에 가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누군가를 부르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기행으로 치닫기 전에 정신적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기억해달라고 말하고 싶다.
참고로 리더 두 사람의 관계는, 잘도 그리 사이가 좋은지 기가 막힐 정도로 밀월이 계속되고 있다.
서로서로 리더를 짊어지고 있다면,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굳이 거리를 두거나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만은 다르다.
천천히 다가가며, 기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자주 둘이서만 식사하러 가기도 하는 것 같고.
지금은 멤버 개개인의 경험치가 올라가고 있으니까, 각자 독자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상황도 많아지고는 있다.
그래도 투어를 하고, 신곡을 만드는 등, 큰 작업을 움직일 때는, 역시 리더의 존재감이 중요하다.
두 사람이 미팅이나 회의에서 솔선해서 발언하며, 산다이메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준다.
더 고마운 것은, 두 사람이 지나치게 완벽하지 않다는 것.
우리에게도 제대로 파고드는 부분이 남아 있는 것도, 팀 전체의 단결력을 높이는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당연하지만, 그 두 사람이 없었으면, 산다이메는 애초에 성립조차 하지 않았다.
두 사람에게는 "여기까지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감사와,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가끔은 리더란 역할을 벗고,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고 싶다.
하지만, 아이들이 독립하지 않은 마음속은, 아무리 말로 "무리하지 말고"라고 말해도, 전혀 설득력이 없겠지.
용돈을 받아 놓고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편안히 지냈으면 좋겠다"라는 어린애의 헛소리 같다.
역시 노력해서 성장하여, 하루라도 빨리 안심시켜 줄 수밖에 없다.
18 산다이메의 아이들 ~ 멤버에 대하여 그 두 번째
NAOTO 씨, 나오키 씨가 부모님이라면, 나도 포함한 나머지 다섯 명은 그들의 아이들.
이상하게도 나이순과 마찬가지로, 위에서부터 차례로 빠진다.
장남은 켄지로 군이다.
제일 첫째인 만큼 부모들과 가까운 입장에서, 전체 균형을 맞추는 역할.
대단한 개성파가 모인 멤버의 균형을 한가운데에서 잡고 있는 건 사실 켄지로 군이 아닐까.
켄지로 군이 있는 덕분에, 나는 NAOTO 씨, 나오키 씨가 목표로 하는 걸 원 쿠션을 두고서 이해된 적이 많다.
캐릭터로서도 사랑스러운 놀림 받는 캐릭터.
정말 형이라는 느낌으로, 나는 멤버 누구에게보다도 켄지로 군에게 어리광부리는 것 같다.
켄지로 군은 놀라울 정도의 많은 취미로 알려진 대로, 자신의 서랍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중에서 그가 빛나는 것을 발견하여,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바꾸는 순간, 우리 산다이메는 단숨에 진화한다고 모두 생각한다.
"켄쨩에게 기대하고 있어요"
스태프나 일을 함께한 다른 사람들도 입을 모을 정도로, 켄지로 군에 대한 주목은 높아지고 있다.
켄지로 군의 아래에 나와 이마이치가 있지만, 막내인 강짱 먼저.
여기 1, 2년의 강짱의 노력으로 인해, 산다이메는 몇 계단 위로 갈 수 있었다.
그가 꽃미남, 왕자님 캐릭터를 받아들여 준 덕분에, 그룹의 폭이 한층 넓어졌다.
강짱의 안에서는 참아야 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도 스트리트 출신.
흑인 문화를 존경하고 있으니까, 데뷔 당시는 몸을 불끈불끈하게 단련하고, 새까맣게 태우고, 머리 모양은 드레드나 콘 로우로 했었다.
하지만 주위의 추천도 있고, 자신의 가능성이 다른 곳에도 있다고 생각이 들어, 어느 순간부터 단단히 각오했다.
그때부터 강짱은 굉장히 높이 뛰어올랐다.
살인 미소를 무기로, 달콤한 역할을 도맡으며, 활동의 장을 확대했다.
강짱에게는 갈 수 있는 곳까지 가길 바란다.
강짱은 그냥 잘생긴 게 아니다.
한다고 하면 하는, 남자다운 결단력을 가진 엄청난 막내이다.
강짱의 위에 있는 건 가장 자유로운 ELLY.
ELLY는 나의 최애다. *大好物
나에게 없는 걸 전부 가지고 있는 남자.
힙합과 R&B를 동경해 온 나는 ELLY에게 흐르고 있는 피가 부럽다.
그리고 특별한 퍼포먼스력.
모두가 똑같은 움직임을 하고 있어도, 꼭 ELLY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다.
성격도 태양처럼 슈퍼 포지티브.
나 따위는 발끝에도 못 미치는 수준의 포지티브.
부정적이나 소극적이란 말 자체를 모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분위기 메이커로 있는 건 틀림 없지만, ELLY의 프로듀서다운 크리에이티브 센스에도 놀란다.
예를 들어 일찍이 산다이메의 투어 타이틀 "BLUE IMPACT"란 단어를 처음 꺼낸 것도 ELLY다.
"푸른 충격(青い衝撃)"이라니 바로 딱!
HIRO 씨를 포함하여 모두가 대박이라며 눈을 크게 떴다.
앞으로도 더욱더 그 센스를 발휘할 것이다.
나는 ELLY는 뜻밖의 존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LLY의 쇼핑 이야기는 정말 화끈해서 재밌다.
단숨에 손목시계를 3개나 사버린다.
게다가 현금 일시불!
여러 의미로 위험할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런 것을 해도 불쾌하게 되지 않는 것이 ELLY의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리고, 짝인 이마이치.
보컬리스트로서의 그의 재능, 향상심을 리스펙트하고 있고, 항상 자극받고 있다.
이마이치가 꼼꼼하고 섬세하게 노래를 만들어 나가기 때문에, 나는 대범하고 감정적인 보컬리스트로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다.
둘이서 협의를 하고, 나는 이런 감정으로 부르니까, 너는 이렇게 해줘 라는 확인은 우선 없다.
말 따위 없어도 우리는 서로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이마이치는 나에게 있어서 운명의 사람.
그 한마디로 충분하다.
같은 시대의 같은 학년으로 살면서, 똑같은 오디션을 받고, 같은 그룹에서 함께 보컬을 맡고 있다.
이 만남이 운명이 아니면 뭐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격은 정반대.
신중한 이마이치와 무모한 나.
두 사람이 같은 타입의 성격이고, 같은 창법을 했다면, 트윈 보컬로서 작동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나 같은 사람 둘이서 노래하고 있었다면, 산다이메의 노래는 덤덤하게 되어버려서, 노래의 뉘앙스를 잃은 듯한 보컬이 되었을 거다.
그가 있기에 내가 살아 있다.
반대도 그럴지도 모른다.
이마이치와는 쌍둥이 같은 것.
이마이치가 조금 형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새삼 생각해보면, 정말 누구 하나 빠졌어도 지금의 산다이메는 성립하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모두 각자 자신의 성격과 적성에 맞는 역을 짊어지고 있다.
서로 겹친 적도 없다.
그럼, 나는 그룹에게 어떤 존재인가.
긍정적이고 대범하다.
쿨한데 의외로 정열적인 느낌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건 틀림 없는데, 5 형제의 딱 중앙에 있는 사람으로서, 전체를 내려다보는 것이(俯瞰) 요구되고 있는 듯하다.
그 위에서 그룹 활동에 색을 부여해가는 역할.
사물을 내려다보는 건 어릴 때부터 잘 한다고 할까, 버릇으로도 있으니까, 그걸 더욱 크리에이티브한 쪽으로 향하게 하고 싶다.
산다이메는 이렇게 보여야 한다, 이런 이미지를 세상에 보여주자 등 이런 걸 냉정하게 판단하고, 그걸 주저 없이 말하고 싶다.
그리고 좋은 의미로 주위의 기대를 배반하는 듯한 활동을 전개할 수 있길 바란다.
나는 4명의 형제와 NAOTO 씨, 나오키 씨를 진짜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룹에 따라 쉬는 날에는 멤버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도 하지만, 나는 전혀 상관없다.
오히려 만나고 싶을 정도.
함께 놀고, 그대로 어딘가에서 묵고, 다음날은 다 같이 함께 일하러 가고.
그런 건 좋기만 하다.
19 머나먼 기억 ! ?
이 세상에서 술이 없어져도 별로 괴롭지 않다.
매일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술은 좋아한다.
스스럼없는 친구와 술을 마시고 헛소리하는 시간이, 최상의 릴랙스 타임.
부모님은 거의 마시지 못하는데, 무슨 돌연변이인지 나는 엄청 술이 세다.
기본적으로 뭐든지 마신다.
맥주에 와인에 소주.
데킬라도 문제없다.
다만 일본 전통 술은 요주의.
굉장히 좋아하지만, 일본 전통 술을 마시면 멈출 수 없게 되어버린다.
완전히 술꾼 스위치가 들어가 버린다.
오늘은 가벼운 반주 정도로 끝내려고 해도, 생선 등을 먹으면서 일본 술을 마시다 보면, 또, 또, 라며 눈 깜빡할 사이에 진행되어, 정신 차려보면 한됫병(1,800ml)이 텅텅 비우고, 그렇게 된다.
술이 강해도 물론 술주정은 한다.
하지만 거칠어지거나, 화내거나, 울지는 않는다.
텐션이 올라가고, 마냥 즐겁게 유쾌해지는, 좋은 느낌의 술고래라고 스스로는 생각한다.
모두 술고래니까, 술자리에서의 실수는 그렇게 잦지 않지만, 훗사 시절까지 거꾸로 올라간다면, 나름대로 웃긴 이야기도 있다.
바에서 일할 때, 손님과 함께 곤드레만드레 될 때까지 마신 적이 있었다.
그날은 아침이 되고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겨우 귀가했다.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 타기까지는 괜찮았는데, 문이 열릴 때 진이 빠져,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쾅, 쾅.
문이 닫힐 때마다 몸이 끼었지만, 의식이 저 어딘가의 세계로 가고 있어서, 나로서는 뭐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머지않아 언제까지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다른 층의 주민이,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
"괜찮으세요? 일어나세요"
어떻게든 눈을 뜨고 그대로 방 쪽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철컥철컥하며 돌렸다.
친가니까 문을 열어두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날은 문이 닫혀 있는 게 아닌가.
짜증 나서 큰 소리로 "돌아왔어!"라고 외치며, 인터폰을 울려댔다.
좀처럼 반응이 없어서, 더욱더 짜증이 커져 갔다.
인터폰을 연타하고, 손잡이를 계속 철컥철컥 돌렸다.
그러자......
드디어 문이 열리고, 안에서 나온 건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 착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층의 같은 위치에 있는 집을 우리 집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때 나온 사람의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표정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쁜 일을 해버린 것이다.
지금은 역시 거기까지 취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하지만, 조심하는 부분에서 취해버리는 것이 술꾼이기도 하다.
지금,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20 언젠가 해보고 싶은 것
요리는 능숙하다.
제일 좋아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만든다고 한다면 뭐든지 가능하다.
바에서 일했을 때 대충 배웠기 때문이다.
가장 잘하는 건 카레.
이건 우리 어머니에게 직접 전수 받았달까, 그렇게 하던 걸 보고 배운 것으로, 전날 만든 요리에서 남은 육수를 재활용한다.
오뎅 육수를 베이스로 한 카레는 엄청나게 맛있다.
나베를 한 후의 국물로도 깊은 맛의 카레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요리를 자랑하는 ELLY와, 어느 쪽의 카레가 맛있는지 경쟁한 적이 있다.
서로 내 것이 맛있다고 주장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어느 쪽의 카레도 먹은 적이 없어서 승패는 물론 결정 나지 못했다.
그럼 이번에 만들어서 가져오자, 그걸로 확실히 하자, 라고 말하고 끝났지만, 그때부터 도대체 얼마나 지났을까.
여차하다 귀찮아져서 그대로 끝나버렸다.
스스로 만드는 것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지만, 나에게는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강력"이 붙을 정도의 맛이 둔한 것이다. *味音痴
요리는 간장 종류의 소스 맛이 나면 대부분 맛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뭐든지 맛있게 받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 맛없지 않으면, 맛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참고로 지금까지 먹었던 것 중에서 궁극적으로 맛없다고 생각한 건, 단 하나밖에 없다.
중학교 때의 여자 친구가 발렌타인 데이에 만들어 준 케이크.
그날, 밤늦게까지 여자 친구에게 아무런 연락도 없었기 때문에, 발렌타인인데도 설마 아무것도 없는 거냐? 라며 낙담해 있었다.
그런 중에 그녀가 집까지 와서, "이거 만들었으니까"라며 건네 준 케이크.
엄청난 기쁨 속에서 먹기 시작했지만, 그 케이크는 케이크 맛이 나지 않았다.
꼭 찰흙 같았다.
맛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혼자서 싹 비웠다.
미각이 둔한 내가 아니었다면 다 먹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맛의 둔함은 산다이메의 멤버로부터 놀림 받은 적도 있다.
가끔 다 함께 라멘을 먹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땐 각자가 라멘에 대한 애착이나 마음에 드는 가게에 대해 열정적으로 얘기한다.
지금 먹고 있는 건 어떻다든가 저쪽이 맛있다든가, 꽤 진지하게 얘기를 나눈다.
그럴 때, 굳이 멤버가 묻는다.
"전에 간 가게랑 어느 쪽의 라멘이 맛있다고 생각해?"
나로서는 솔직한 대답밖에 없다.
"어느 쪽도 맛있어. 둘 다 똑같은 돈코츠 라멘이잖아"
그 대답에 모두 폭소한다.
그리고, 이건 맛이 둔한 것과 관계없는지도 모르지만, 새로운 가게를 개척하는 것에 전혀 관심 없다.
오히려 "같은 가게만 가기" 파다.
자 오늘은 기합을 넣고 싶으니까 고기라도 먹을까로 된다면, 언제나 가던 고깃집으로.
따뜻한 나베가 좋겠다고 생각하면, 항상 그 가게.
대인원으로 와글와글하고 싶으면, 저쪽의 다이닝 바이려나, 이런 느낌으로, 몇 곳을 로테이션처럼 돌고 있다.
혼자서 조용히 밥을 먹고 싶을 때의 가게는, 옛날부터 가족으로 통하고 있는 초밥 가게에 갈 때가 많다.
가기 전에 전화를 한 통 넣어서, "생선구이 정식이 먹고 싶어요"라고.
그렇게, 초밥은 주문하지 않고, 메뉴에 없는 정식만을 먹고 돌아온다.
친구와 함께 밥일 때도, 멤버는 몇 명인가에게 정해져 있다.
일의 회식을 제외하면, 식사 때 "처음 뵙겠습니다"라는 사람과 동석하는 건 거의 없다.
속속들이 아는 평소의 동료로, 평소의 가게에 가는 걸 좋아한다.
벌써 10대도 아니고, 겉으로 드러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뭐든지 무제한으로 먹어도 괜찮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멤버에 비하면 아직 신경 쓰지 않는 쪽이라고는 생각한다.
최소한 채소는 매일 먹는다든가, 며칠 후의 촬영을 향해 조금 참는다든가 그 정도다.
그래도 역시 라멘은 가능하면 피하는 게 좋지 않은가는 생각하는데,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좋아하는 걸 먹어도 좋은 일주일이란 것이 있다면, 모두가 추천하고 있는 라멘 가게를 1채씩 순회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과연 나는 정말로 맛의 차이를 알 수 없는가.
"맛있다"의 속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는 걸 느끼고 이해하는 게 가능한지 시험해보고 싶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맛이 둔한 건 나쁜 것만은 아닐 거다.
간장과 소스의 맛이 나면 맛있다로 되니까, 미래의 부인은 편하다고 생각합니다만.
21 "EXILE TRIBE"로서
EXILE TRIBE란 말을 처음 들은 건 5년 전의 투어 때이다.
니다이메와 산다이메의 합동 투어에서, 그 투어 타이틀 중에 "EXILE TRIBE"란 글자가 있었다.
"TRIBE가 뭐였지?"
"일족이란 거잖아"
멤버의 누군가와 이렇게 주고받은 듯한 기억이 있다.
EXILE 분들은 아득히 먼 곳을 달리고 있는 선배이기에, 내가 그 일족이란 의식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 투어를 돌아 나갈 때마다, 내 안에서 점점 같은 일족, 같은 가족이란 특별한 연대감이 싹텄다.
EXILE TRIBE란 중심 속에 들어간 듯한 감각이었다.
일족이 더욱더 번영하기 위해서 산다이메가 열심히 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EXILE 분들 중에서 가장 영향받은 건 TAKAHIRO 씨이다.
인생에서 가장, 이라고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TAKAHIRO 씨가 "EXILE VOCAL BATTLE AUDITION 2006"에 합격하여 EXILE에 가입하게 된 건, 내가 미용사 전문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 EXILE에 들어간 사람, 미용사였던 것 같아"
클래스의 친구가 그렇게 알려줬다.
무려 TAKAHIRO 씨도 전 미용사.
게다가 업계에서는 완전 유명한 가게, 거기에서 일하려면 굉장히 높은 배율을 클리어해야 한다고 소문나 있는 살롱에서 일했다는 것이다.
세간에는 "미용사에서 EXILE로"란 성공 스토리로 인식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 안에서는 달랐다.
"그 살롱에도 들어간 뒤에, EXILE에도 들어가고, 얼마나 인생의 성공자야. 그런 꿈의 이야기가 있어?"
당시의 나는 마음 어딘가에서 가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되는 건 극소수의 사람이라고 믿으며, 꿈을 억지로 짓누르고 있었다.
이제 곧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나도 살롱에서 일한다.
그걸로 됐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하지만 TAKAHIRO 씨가 손에 넣은 "꿈" 같은 현실을 알게 되어, 결의는 살랑살랑 흔들렸다.
혹시, 어쩌면, 가수가 될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마음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TAKAHIRO 씨가 받은 오디션의 "2"를 받고 합격.
미용사에서 보컬리스트로,라는 스토리를 그대로 따르게 됐다.
경력만이 아니다.
내 목소리도 TAKAHIRO 씨에 충분히 비슷하다.
음역이나, 소리의 질이라든가, 노래에 실릴 때 울리는 방법이 정말 비슷해서, TAKAHIRO 씨에게도 그렇게 들은 적이 있다.
"언젠가 함께 노래하고 싶네. 하모니를 만든다면 깨끗하게 되겠어"
그런 식으로도 말을 해주셨다.
데뷔 직후의 나는 TAKAHIRO 씨의 노래에서, 여러 가지를 흡수 받았다.
목소리가 비슷하니까, TAKAHIRO 씨의 노래를 내가 부른다면 어떻게 될까 라는 이미지가 되기 쉬운 것이다.
흉내 내기 쉬운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영향을 받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내가 독창적인 가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고부터는, 플러스 요소를 받아들이는 건 있어도, 영향은 받지 않고 스스로 하자고 정했다.
2014년 EXILE TRIBE의 돔 투어에는 ATSUSHI 씨가 참가하지 않았다.
ATSUSHI 씨가 있으면 맡겨버리는 부분이 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ATSUSHI 씨가 존재하지 않는 스테이지에 서는 것으로, 나 또는 이마이치가 TRIBE의 프런트에 서야 한다고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우리가 더욱더 커지지 않으면, TRIBE 전체가 강해지지 않는단 것도 실감했다.
가까운 미래에, 나 또는 이마이치가 TRIBE의 메인을 받게 되겠지.
그때가 오기까지의 준비를, 마음의 준비도 포함하여 쌓아 올리고 있다.
산다이메는 오랫동안 후배 캐릭터였는데, 정신 차려보니 우리에게도 후배가 생기고 있다.
GENERATIONS나 E-girls 등의 활약을 보고 있으면 자극이 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활동의 장을 넓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좀 더 위로 가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과거 EXILE 분들이 산다이메에게 큰 무대를 준비해준 것처럼, 산다이메도 후배를 위해서 마켓을 개척해야 한다.
아직 데뷔하지 않았지만 트레이닝을 거듭하고 있는 청년들도 생각한다.
그들을 위해서라고 하면 마치 좋은 사람처럼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새로 나오는 사람들이 최대한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TRIBE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건 날 위해서이기도 한다.
여러 방향에서 생각해도, 이제 몇 년 동안 산다이메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 것인지가, TRIBE의 앞날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보컬인 나는 프런트 맨이다.
이건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이 첫 책 안에서 몇 번, "열심히 하자"라는 말을 쓰고 있다.
독자 입장에서, "이제 알았어!"라는 느낌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게 본심이지만, 그러나, 나 자신도 왜 이렇게 열심히 하자, 노력 하자라고 생각하는지 다시 생각해봤다.
어릴 때는 특별히 열심히 한다고 칭찬받은 기억도 없는데.
나의 꿈을 위해서다.
하지만, 나는 자신만을 위한 사람은 이렇게나 열심히 하자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도와주는 분들이나 선배들에게 보답하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그중에서도 데뷔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장 돌봐주신 HIRO 씨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점이 크다.
그저 아마추어에 불과한 나를 발탁하여, 데려와 준 HIRO 씨.
처음 뵈었을 때, 경어로 말 걸어준 것에는 놀랐었다.
그런 분이다.
HIRO 씨는 아티스트로서 어째야 하는 지 전에 사람으로서 어째야 하는지를 처음부터 가르쳐 주셨다.
항상 겸허하고 정중하게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반복하여 설명해 주셨다.
입으로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실천하는 모습을 항상 보여 주셨다.
그 위에서 산다이메를, 나를, 지금 서 있는 곳까지 이끌어 주셨다.
HIRO 씨를 존경하고 있다.
HIRO 씨는 정말 굉장한 사람이다.
그건 세상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전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좀 더 전하고 싶고, 알아주길 바란다.
HIRO 씨가 발굴한 내가 활약한다면, "토사카를 찾아낸 HIRO 란 사람 대단하네"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걸 위해서 열심히 하고 있기도 하다.
산다이메의 다른 멤버도 아마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산다이메만이 아닌 후배 아티스트들도 모두, 자기가 활약함으로써, HIRO 씨의 대단함을 알리고 싶다는 동기 부여가 있을 것이다.
TRIBE의 모두가 그런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 없다.
물론 그렇게 하길 바란다고 HIRO 씨에게 들은 적은 한 번도 없고, 이건 꽤 일방적인 오지랖 같은 감정이다.
어떤 의미로 짝사랑에 비슷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짝사랑이 EXILE TRIBE를 유지하고 있다면, 이런 순수하고 무적인 일족은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22 HISTORY
01 : 태어날 때부터 커다란 아기였다. 그리고 건강히 잘 먹는 아이였다.
02 : 기어 다닐 수 있게 되고 나서는 계속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되어서,
부모님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03 : 울트라맨이라든가, 인형 놀이도 굉장히 좋아했던 모양이지만, 지금, 내 방에 피규어 등은 하나도 없다. 조금 불가사의.
04 : 유치원 입학식에서 대성통곡을 했지만, 그때, 돌봐주었던 젊은 미인의 선생님이 좋아서, 유치원 자체도 금방 좋아하게 됐다.
05 : 여름 축제로 들떠서. 유카타가 싫어서, 이후엔 팬티 한 장이 되어 뛰어다녔다.
06 :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선다는 큰 장점. 부끄럽다는 감각을 모르는 아이.
07 : 노는 것밖에 머리에 없었던 무렵의 미소.
08 : 축구를 시작한 것은 유치원 때.
아버지에게 배웠고, 휴일에는 온종일, 공원에서 볼을 찼다.
09 : 축구에 빠졌는데도,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클럽에 들어가지 않은.
친구의 클럽 연습에 섞였던 적도.
10, 11 : 방학 최대의 즐거움은 외조부모님의 집에 자러 가는 것.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2장은 이 시기에 조부모님이 여러 곳에 데려가 줬던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뭐든 사주셨다.
12 : 아타미, 오키나와...가족 여행은 틀림없이 평생의 추억. 신나서 가면라이더의 변신 포즈를 하고 있다.
이 시기에, 사진을 찍을 땐, 이 포즈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13 : 스포츠를 좋아하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겨울은 스키 여행에.
14 : 군마의 아버지 친정에서.
오른손에 축구공, 왼손엔 게임 소프트.
이거 하나로 놀고 있으면 하루 따위는 순간 삭제.
15 : 중학교 때, 프로 레슬링 놀이가 대유행.
강해지기 위해 윗몸 일으키기를 해서 복근이 생겼다.
지금 나의 복근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16 : 머릿속은 축구와 사랑으로 가득.
첫사랑 그녀가, 축구부 선배가 멋있다고 해서, 질투라는 감정을 알게 되었다.
17 : 고등학교 학생증 사진.
까까머리이니까 어머니의 암 수술 후에 찍었던 듯.
18 : 마찬가지로 까까머리로 거실에서 뒹굴뒹굴.
입원 중인 어머니 대신 아버지와 누나가 밥을 만들어 줬었는데, 맛이 없었다.
19 : 친구들과 가라오케.
EXILE 의 노래라 신경이 쓰였다.
20 : 학원제에서 교복을 입지 않고, 친구들과 맞춘 점퍼를 입고 있다가 선생님에게 혼났다.
21 : 미용 전문학교 입구에서 이사장의 차와.
이 차에도 약간의 장난을 했다.
22 : 연수 여행으로 유럽에.
첫 해외에서 들뜬.
파리에서는 저녁 식사 중에 살짝 빠져나가서 번화가를 어슬렁어슬렁.
밤 중에 호텔에 가니, 기다리고 있던 선생님이 손바닥으로 때렸다.
23 : 클럽에서 아침까지 놀고, 숙취인 채로 학교에.
저녁때에는 다시 클럽에. 가장 튀었던 시기.
24 : *훗사에서 바텐더를 하던 시기.
친구와 함께 일하고 있었으므로, 매일 밤, 정말로 즐거웠다.
*일본 간토, 도쿄 도(都) 니시타마 지구 남동부에 있는 신흥도시.
25 : 어패럴 점원 시절.
양복이 좋았고, 나를 만나러 와주시는 손님도 있고, 충실한 직장이었다.
26 : 쭉 가라오케를 완전 좋아했다.
잘한다고 칭찬을 받는 것이 기뻤는데, 가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억눌러지지 않았다.
27 : 오디션에 집중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니트 상태에.
어패럴 점원 시절 선배가 돈 없는 나에게 밥을 사주셨다.
28 : 똑같은 선배가 권해서 이토의 온천에.
도중에 우연히 발견한 큰 신사에서 에마(絵馬, えま)를 쓰라고 했다.
인생 최초의 에마에 쑥스러웠다.
29 : 오디션에 합격이라는 소원이 이루어졌다.
선배와 신에게 감사하고 있다.
"일본 제일의 보컬리스트"라는 건 이제부터지만.
읽어줘서 고마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