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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퀘어 [이영미 人터뷰] ‘풍운아’ 김무영 “최초의 NPB 지도자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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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3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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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aver.me/xZ2USQFZ

<지난 시즌 라쿠텐에서 은퇴 수순을 밟은 김무영. 최근 일본 독립리그 신생팀 투수코치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김무영으로선 처음 경험하는 지도자 생활. 일본에서의 다양한 야구 경험이 그의 지도자 인생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본다.(사진=이영미)>

지난 1월 14일, 일본 후쿠오카 하카타역 인근의 한 호텔 로비. 여러 사람들이 교차하는 공간에서 그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건장한 체격에서 그가 운동선수라는 걸 쉽게 눈치 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사로만 접했던 터라 그가 풀어낼 이야기에 한껏 기대를 부풀리며 악수를 나눴다.

김무영(32). 부산 대신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시모노세키에 있는 하야토모 고교로 야구 유학을 떠난 후 그가 보인 야구인생은 험난했고, 고단했고,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후쿠오카경제대를 졸업하고 일본 독립리그에서 야구를 이어가다가 2008년 신인드래프트 6순위로 소프트뱅크에 입단하게 된다. 소프트뱅크에 있는 동안 이범호도 만났고, 이대호와 인연을 맺기도 했다. 7년의 시간을 그곳에서 희로애락을 반복하다 팔꿈치 통증이 재발되면서 2015년 10월, 팀을 나오게 된다(전력 외 선수로 분류). 이후 라쿠텐 이글스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려 했지만 팔꿈치와 어깨 부상이 잦아들지 않아 그는 결국 지난 시즌 은퇴 수순을 밟았다. 이후 김무영은 트레이너 공부를 시작했지만 최근 일본 독립리그 신생팀으로부터 투수코치 제의를 받고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는 소식을 전했다.

트레이너 공부를 시작했다는 소식까지 들었는데 독립리그 투수코치로 가게 됐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다.

“일본 독립리그에는 3대 리그가 존재한다. 시코쿠, BC, 간사이리그이다. 내가 가는 팀은 BC리그에 속했고, 팀명은 토치기 현에 존재하는 토치기 팀이다. 한 달 전쯤에 소프트뱅크에서 타격코치를 맡았던 미야지 가쓰히코라와 쓰지 타케시라고 소프트뱅크에서 외야수를 맡았던 분이 내게 연락을 해오셨다. 독립리그에 신생팀을 창단하는데 투수코치를 맡아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트레이너로 입문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던 터라 잠시 고민은 했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쓰지 타케시가 감독이고, 미야지 가쓰히코가 수석코치 등 코칭스태프가 모두 소프트뱅크 출신들이다.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실감을 못하고 있는데 며칠 전 메일로 받은 스프링캠프 일정표를 보면서 비로소 실감했다.”

독립리그도 프로처럼 스프링캠프와 시즌 개막 일정이 비슷한가.

“2월 15일부터 팀에 모여서 훈련을 하다가 3월에 스프링캠프가 시작되고 시즌은 4월 초부터 시작된다.”

지난 시즌을 마치고 라쿠텐에서 은퇴를 결심했다. 어떤 상황이었나.

“시즌 도중에 부상 부위가 회복되지 않는 바람에 결심을 굳힌 것이다. 이번에 은퇴하는 과정은 크게 아쉽지 않았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구를 하면서 항상 은퇴를 예상했을 것이다. 은퇴 후의 일상이 어떠했나.

“허탈함이 제일 크더라. 은퇴하고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니 오전 10시였다. ‘아이쿠, 늦었다’하면서 급히 나갈 준비를 하는데 아내가 ‘당신, 이제 야구장 안 나가도 되잖아’라고 하는 소리에 은퇴를 실감했다. 이제 난 야구선수가 아니구나 하는.”

기록을 살펴보면 선수 생활 내내 풀타임으로 뛴 적이 없었다.

“그렇다. 단 한 시즌도 풀타임으로 뛰지 못했다. 항상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부상으로 (2군)내려가고, 회복해서 다시 올라가고를 반복했다.”

소프트뱅크에서 나오기 전인 2015 시즌은 아예 공을 던지지 못한 것 같다.

“부상 때문이었다. 너무 통증이 심하니까 그 좋아하던 야구가 하기 싫어지기도 했다. 진통제 맞아가면서 야구하는 현실에 짜증이 났던 것이다. 새로운 팀에 입단하자마자 부상자 명단에 올라 재활만 반복했다.”

왜 수술을 하지 않았나.

“어깨와 팔꿈치 수술을 다 해야하는데 그렇게 수술하고 나면 재활만 2년이 넘게 걸린다고 하더라. 2년 후 복귀해도 이전의 몸 상태로 돌아오리란 자신이 없었다. 언젠가 야구를 그만둘 텐데 이참에 은퇴하고 하루 빨리 새로운 인생을 찾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솔직히 통증 없는, 진통제 맞지 않고 사는 삶을 원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일본에는 언제 처음 왔나.

“2000년 중학교 졸업하고 나서다.”

같이 야구했던 친구들과 다른 길을 택했다.

“초등학교 1년 선배였던 김만윤 형이 자신이 다니고 있는 하야토모 고등학교를 추천해줬다. 만윤이 형이 다니고 있던 학교라 거부감이나 두려움 없이 그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한국 학생이 진학을 원하면 다 들어갈 수 있었나.

“그 학교 야구부에선 매년 한 명씩 한국 선수들을 받아들였다. 내 밑으로 3명의 후배들이 더 들어왔다. 내가 일본 고등학교를 선택하고 실행에 옮긴 데에는 만윤이 형의 존재가 컸다. 일부 기사에서 내가 한국에서의 구타를 못 이겨 일본으로 갔다는 내용이 소개됐는데 그건 사실과 다르다. 구타 때문에 일본으로 간 게 아니었다.”

구타 때문이 아니라면?

“고시엔구장에서 열리는 일본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하야모토 고등학교가 고시엔에 올라간 건 40년 전으로 그 후엔 단 한 번도 그 무대에 서보지 못했다고 하더라.”

그 꿈은 이뤄진 건가.

“일본에는 약 4000여 개의 고등학교 야구부가 매년 이 대회에 나가기 위해 치열한 예선전을 펼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단 49개의 학교만 고시엔 무대에 올라간다. 우리 학교는 지역별 예선전에서 패하는 바람에 꿈을 이룰 수 없었다. 고시엔에 가려고 선수단 버스까지 새로 장만하는 등 학교에서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나섰지만 1학년 때 지역별 예선전에서 패하며 좌절감을 곱씹었다. 사실 야구 명문고가 아닌 이상 고시엔에 올라가긴 정말 어렵다. 나중에 소프트뱅크 2군 소속일 때 고시엔 구장에서 공을 던진 적 있었다. 그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후 고시엔 구장의 모래를 담아 온 기억이 난다.”

그렇게 후배를 일본 고등학교로 이끈 김만윤은 한국의 서울고로 전학을 갔고 이후 두산 베어스에 입단하게 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만윤이 형은 서울로 돌아가고, 난 그곳에 남아 대학에 진학했으니(김만윤은 롯데 자이언츠에서 은퇴 후 현재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스카우트로 활동).”

<소프트뱅크 소속일 때 김무영의 모습.(사진=연합뉴스)>

곧장 프로에 진출하지 못하고 대학에 입학했는데.

“대학 1학년 때는 야구의 정체기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4년을 보내고 난 후 프로에 갈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안 섰다. 당시 몸이 왜소했다. 180cm에 63kg이었으니 많이 마른 편이었다. 육상부처럼 매일 20km를 뛰었다. 워낙 강도 높은 훈련을 하는 바람에 살 찔 틈이 없었다. 2학년 올라가서 운동 방법에 변화를 줬다. 가급적 런닝을 줄이고 웨이트트레이닝에 치중한 덕분에 몸에 살이 붙기 시작했고 공의 움직임이 달라지는 걸 느꼈다. 그 전에 137,8km 정도의 스피드였다면 웨이트트레이닝을 시작한 이후엔 143km까지 구속이 오르더라. 이후 체중을 12kg까지 늘렸고, 150km의 스피드를 확인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곧장 프로에 입단하지 못했다. 대학 졸업 후 독립리그인 후쿠오카 레드워블러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 두각을 나타내면서 2008년 소트뱅크가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한 덕분에 프로 무대에 서지 않았나.

“대학 4학년 때 어깨 통증으로 공을 던지지 못했다. 하루하루가 초조한 시간들이었다. 내 꿈은 프로팀 유니폼을 입는 것인데 좌절을 맛보게 될 것 같았다. 결국 프로가 아닌 독립리그에서 새로운 야구를 시작했다. 그렇다고 포기하진 않았다. 잠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마인드 컨트롤했다. 어차피 어려운 길을 택해 온 것이고, 프로에 입단할 때까지 버티겠다는 각오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래도 독립리그 2년차 때는 2승17세이브, 평균자책점 0.41의 성적을 올리며 프로팀의 관심을 한몸에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경기를 앞두고 불펜에서 몸을 만들고 있는데 어느 아저씨가 다가와선 내게 포크볼을 던져보라고 하더라. 당시 내 주무기는 컷패스트볼이었다.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곳에 들어와서 선수에게 이런저런 공을 던져보라고 주문한 걸 보면 분명 프로팀 스카우트가 틀림없었다. 그 분 앞에서 열심히 공을 던졌고, 경기 때도 마무리로 나가 좋은 공을 던지면서 세이브를 챙길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이 소프트뱅크 스카우트 총책임자였다. 소프트뱅크 입단식 때 야후돔에서 그 분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분 말로는 그 날 내가 공 던지는 걸 보고 스카우트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더라.”

소프트뱅크 유니폼을 입을 때 감개무량했겠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웃음). 계약금으로 3000만 엔을 받았는데 야구하면서 처음으로 벌어본 큰돈이었다.”

1군 데뷔전을 예상보다 빨리 치렀더라.

“2009년 7월 17일 지바 롯데 마린스를 상대로 1군 데뷔전을 치렀고 이후 어깨 통증으로 1,2군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프로 데뷔 첫 승이 언제였는지 기억하나.

“당연하다. 2012년 야후돔에서 니혼햄 파이터스를 상대로 행운의 승리투수가 됐을 때이다. 그날 우리 팀이 3-6으로 끌려가다 8회초 팀의 네 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세 타자 연속 삼진으로 이닝을 마무리했는데 8회말 공격에서 우리가 4점을 추가하며 경기를 뒤집었다. 행운의 첫 승이었다.”

소프트뱅크에서 한국의 두 선배를 만났다. 이범호와 이대호였다. 2009년 이범호가 소프트뱅크와 계약 맺은 사실이 알려진 후 통역을 자처하기도 했는데.

“그 형님들을 만날 수 있어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범호 형이랑은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범호 형을 만난 게 2년차 때였다. 둘 다 2군에서 고생하다보니 급격히 친해졌다. 정도 많이 들었고. 범호 형이 기회를 많이 얻지 못했다. 1군에서 뛰고 싶었지만 자리가 주어지지 않아 마음 고생이 심했다. 고민 끝에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당시 범호 형의 선택에 대해 비난도 있었지만 같이 생활해본 나로선 범호 형의 선택을 120% 이해했다.”

이대호와의 만남은 어떠했나.

“떨렸다(웃음). 범호 형도 그렇고 대표팀에서 활약했던 모습을 일본 TV로 지켜봤던 선배들이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특히 대호 형은 오릭스에 계실 때 투타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런 분과 한 팀에서 뛰게 됐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웠겠나. 2014년에는 나도 1군에 오래 머물렀다. 대호 형과 밥 먹으러 다녔던 기억이 많다. 거의 매일 붙어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5년 시즌을 마치고 형님은 더 좋은데(시애틀 매리너스)로, 난 라쿠텐 이글스로 옮겨가며 헤어졌다. 야구하면서 부상으로 고통스런 시간들이 많았지만 범호 형, 대호 형 같은 좋은 형님을 만난 데 대해 감사하다.”

선수시절 줄곧 등번호 61번을 선호했다. 혹시 박찬호 때문인가.

“그렇다. 소프트뱅크, 라쿠텐 등 프로 생활 8년 내내 61번을 달고 뛰었다. 소프트뱅크 입단할 당시 스카우트가 그 번호를 내게 ‘선물’했다. 그도 박찬호 선배의 등번호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 들어가는 독립리그 코치 유니폼도 61번이다. 박찬호 선배랑은 이전부터 인연이 있었다. 미야자키에서 처음 만났고, 오릭스에 계실 때 또 만났다. 이승엽 선배하고도 한 타석 상대해봤다. 2아웃 만루 상황에서 승엽 선배가 타석에 들어섰다. 너무 긴장돼서 포수 미트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가운데로 공을 던지지 못하고 쓰리 볼까지 갔다. 그런데 승엽 선배가 땅볼을 치면서 아웃되더라. 승엽 선배는 그렇지 않았을지 몰라도 나로선 선배님이 날 봐줬구나 싶었다. 내 인생에서 존경하는 선배가 네 분 있는데 박찬호, 이승엽, 이대호, 이범호 선배이다. 나한테는 ‘재산’과 같은 분들이다.”

라쿠텐과 계약하면서도 소프트뱅크를 떠난 부분이 아쉬움으로 크게 남았을 것 같다. 일본에서 줄곧 후쿠오카에만 머물다 지역을 옮겨야 했으니 말이다.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야구를 하기 위해선 적응해야 했지만 시즌 접어들고 6월 정도 지나니까 젊은 선수들 위주로 선수단을 개편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만두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아 이렇게 야구를 그만두게 되는 구나’ 싶었다.”

2000년 처음 일본에 왔으니 어느새 17년의 시간이 흘렀다. 귀화를 하지 않은 이유가 국가대표팀에 대한 꿈 때문이란 게 사실인가.

“야구하는 동안에는 절대 국적을 바꾸지 않으려고 결심했다. 태극마크를 달고 싶어서. 그게 또 다른 꿈이기도 했다. 내가 존경하는 선배들 모두 대표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나도 그 대열에 동참하고 싶었다. 태극마크의 떨림을, 설렘을, 느껴보고 싶었다. 물론 이제 은퇴했기 때문에 그 꿈은 이루지 못한 부분으로 남았다. 아내가 일본인 여성이라 귀화에 대한 유혹은 계속됐었지만, 그리고 일본에서 살려면 귀화하는 게 훨씬 더 편하지만, 난 여전히 한국인으로 남고 싶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한국의 야구선수가 일본 고등학교 대학교 독립리그 프로팀을 거쳐 독립리그 지도자가 된 사례는 없었다. 선수 때처럼 독립리그에서 선수들을 가르치다가 프로로 진출하는 게 새로운 목표인지 궁금하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못했지만 독립리그 코치 자리를 수락하면서 저절로 그런 그림이 그려졌다. 선수로선 ‘일류’가 되지 못했지만 지도자로 ‘일류’가 되고 싶다. 최고의 지도자가.”

김무영의 NPB 통산 성적을 살펴보면 89경기 등판 112.1이닝 2승 2패 6홀드 평균자책점 2.88이다. 통산 2승 상대가 공교롭게 니혼햄 파이터스였다. 김무영이 최고로 꼽는 경기는 2승 중 2승을 거뒀던 2014년 8월 10일 경기였다. 팀의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해 1.1이닝을 1피안타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승리투수가 된 것은 물론 경기 히어로로 선정되기도 했다. 프로 데뷔 후 줄곧 패전조, 추격조에서 뛴 터라 선발승이 없다는 아쉬움이 컸다. 김무영은.

<김무영에게 일본 프로야구팀의 지도자를 염두에 두고 있느냐고 물었다. 김무영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자신이 걸어온 과정을 곱씹어본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쉽지 않은 길,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걸으며 그가 얻었거나 앞으로 얻는 건 무엇일까. 다음에 NPB에서 코치 또는 감독이 돼 인터뷰하자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남겨두기로 했다.(사진=이영미)>

<일본 후쿠오카=이영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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