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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퀘어 [씨네21] 20주년 기념 '늑대의 유혹' 이청아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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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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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라는 직업의 피할 수 없는 숙명 중에는 필모그래피가 쌓이는 만큼 바이오그래피의 궤적도 노출된다는 고충이 있다. 그마저도 감사하다고 표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혹자는 감수해야 할 대가라고도 말한다. 미디어 환경이 다변화되면서 대중은 해가 갈수록 작품 바깥에서 드러나는 배우의 사적 매력을 접하는 데 익숙하고 나아가 요구한다. 여기엔 스타의 진짜 삶을 궁금해하는 팬심만큼, 배우의 역능과 인간으로서의 깊이가 무관하지 않으리란 무의식적 바람도 깃들어 있다. 얼마큼 사실이거나 환상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배우 이청아의 사례로 말하자면, 제법 설득력 있는 이야기라고 잠정적으로 적어두고 싶어진다.


2002년 명동 한복판에서 길거리 캐스팅 당해 부지영 감독의 단편영화 <눈물>(2002)로 데뷔한 이청아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을 거쳐 <늑대의 유혹>(2004)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뉴 밀레니엄과 함께 선풍적 인기를 끈 인터넷소설을 영화화한 <늑대의 유혹> 이후 20년. 청춘 대 청춘으로 만난 관객과 함께 세월을 차분히 아로새긴 이 배우는 한층 낮고 부드러워진 목소리, 소녀다울 필요 없는 우아한 패션, 노련미가 돋보이는 전문직 캐릭터로 시청자들을 TV 앞에 유인한다. 곧잘 캔디형 여주인공이곤 했던 이청아의 과거를 기억하는 관객은 지금의 그를 보며 깊어졌다고 말하고 이청아의 현재가 가장 자연스러운 1020 시청자들은 그를 ‘멋있는 언니’로 따른다. 어느 쪽이든, 그를 향한 세간의 호감은 자기 앞의 여정을 거듭할수록 조금씩 선명하고 단단해져온 어느 배우의 다음 행로를 기대하게 만든다. 17년 만에 <씨네21> 스튜디오를 찾은 이청아는 변함없는 공간을 침착하게 둘러보며 말했다. 배우는 참 좋은 직업이라고. “내게 주어진 인물들이 아니었다면 살면서 영영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사람들이 훨씬 많았을지도 모른다. 배우 수업은 타인의 존재는 물론 삶에서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해주었다.” <천원짜리 변호사>(2022), <셀러브리티>(2023), <연인>(2023), <하이드>(2024)로 분주히 활동했고, 유튜브 채널로 인간적 매력도 다분히 내뿜고 있는 최신의 이청아를 만났다. 앞으로 우리에게 더 새로운 인식과 놀라움, 그리고 존중을 자아낼 배우 이청아, 인간 이청아의 페르소나를 모두 엿보길 희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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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드라마 <하이드>가 종영했다. 당분간 계획은 어떤가.

= 한동안 바쁘게 일했으니 조금 쉬어가는 일정을 잡았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촬영 이후 15년 만에 중국에 가는 건데 베이징은 처음이다. 얼마 전 넷플릭스 <삼체>를 봐서 그런지 중국행이 더 기대된다. 요즘 하고 싶은 건 하루에 딱 한번만, 꼭 필요한 연락을 위해 저녁에 몰아서 핸드폰을 확인하고 나머지 시간은 충분히 책 읽고 콘텐츠 보는 데 쓰는 것이다.



- 문영(이보영)의 이웃집 빌런인 <하이드>의 하연주 캐릭터는 이청아 커리어에서 드문 악역이었다.
= 나는 나로만 사니까 역할의 의미를 분류해서 느끼진 못하는 편이다. 드라마 <뱀파이어 탐정>에서도 비릿한 느낌의 캐릭터였고 실질적인 첫 악역은 <연인>이 아닐까 싶은데 막상 주변 반응을 보면 다르게 보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 <연인>의 각화는 악역이 아닌데!
= 맞다. (웃음) 그렇게 봐주시면 더 좋고. 안 그래도 얼마 전 친한 감독님이 <하이드> 방영 중에 연락 와서 “나 청아씨 이런 얼굴, 이렇게 소리 지르는 모습 처음 봐”라고 하더라. 로코물의 이청아로 기억하는 분들에겐 확실히 <하이드>의 모습이 낯설었을 테다. 하지만 내 기준에 지금껏 연기한 인물 중 가장 상대하기 힘든 캐릭터는 웹드라마 <회사를 관두는 최고의 순간>의 직장 상사였다. 사회 초년생들이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그런 상사였거든. 그러고 보니 확실히 최근 몇 년 들어 빌런 캐릭터에도 나를 떠올려주는 작가, 연출자들이 늘긴 한 것 같다.



- 상무(<하이드>), 대위(<연평해전>), 변호사(<천원짜리 변호사>), 백화점 VIP 전담팀 과장(<VIP>) 등 전문직 커리어 우먼에 특화돼 있기도 하다.
= 전문직 캐릭터가 확실히 많이 들어오긴 한다. 일단 대체로 직위가 높아서 재미있다. 최근에 느낀 게 기본적으로 이사급 이상이더라고, CEO도 있고! 직업적인 면이 부각되거나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늘어난 것은 무척 반갑다.



- 우정출연한 <이번 생은 처음이라>, 특별출연한 <천원짜리 변호사>의 사례도 유독 흥미로웠다. 적은 분량임에도 반응이 좋았는데, 시청자들이 캐릭터 너머로 배우 본연의 매력을 읽는 듯했다.
= <천원짜리 변호사>의 이주영 변호사는 내가 품은 나의 이상형과 닮은 여자라 그랬을 것이다. 내가 가진 제일 좋은 모습만을 넣어둔 인물이랄까? 그리고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극본을 쓴 윤난중 작가를 드라마 <꽃미남 라면가게>(2011)로 처음 만났고 이후 사적으로도 친해졌다. 어느날 “네가 잘할 수 있는 역할이야”라고 부탁하길래 대본을 읽지도 않고 하겠다고 했는데, 막상 받아보니 너무 멋있는 사람인 거다. 고민이 많았다. 마침 그 무렵이 데뷔하고 처음으로 작품을 길게 쉴 때였다. 염색을 안 해서 뿌리가 훌쩍 자란 머리, 다듬지 않아서 숱 많고 까만 눈썹 그대로 자연인 이청아의 모습으로 나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트렌드와는 거리가 먼 스타일 이니 주변에서 말린 것도 사실이지만, 단단한 내면을 가진 인물의 고집스러움을 내 모습 그대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가장 자유롭고 편안하게 나를 드러낸 작품은 처음이었다.



- 배우 이청아의 분위기가 깊어진 것을 대중도 알아차리기 시작한 시점과 맞물린다.
= 20대의 나는 자주 88만원 세대의 전형을 연기했다. 늘 직업이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켜야 하는 소녀가장형 캐릭터의 입장이었다. 극 중에서 부모님이 다 계시는 경우가 없었다. 32살쯤인가 처음으로 직업이 있는 역할을 연기했으니. 한번은 엄마와 투닥거리며 싸우고 난 직후에 반농담으로 이런 말도 들었다. “사람들이 이청아를 정말 모른다. 넌 언제 진짜 너처럼 잘난 척하고 재수 없는 역할을 해볼래?” 엄마는 항상 내가 좀더 나다운 역할을 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 했는데, 결국 못 보고 돌아가셨다. 요새 가끔씩 하늘 보고 찡긋 말을 건다. “엄마 잘 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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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출신이지만 데뷔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했다. 

= 데뷔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2002년 명동에서 부지영 감독님 단편영화 <눈물>에 길거리 캐스팅된 거니까. 그렇지만 아버지(연극배우 이승철) 덕분에 배우라는 직업 자체엔 무척 익숙했다. 내게는 대학로 분장실이 친숙한 공간이었고 연극도 일찍부터 많이 봤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헤롤드 핀터의 <배신>을 본 기억이 난다. 한양대 연영과에 들어갈 때 연극이 아니라 영화 연출을 전공한 것도 내딴에는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서였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보고 싸이더스에서 소속사에 들어오라는 제의를 했을 때 아빠는 반대했고 엄마는 해보라고 했다. 적은 돈이지만 계약금의 효과였던 것 같다. 배우 일을 하면서 아버지가 남매를 건사하는 일이 녹록치 않으셨으리란 걸 지금은 안다. 어쨌든 처음 오디션을 보러 다닐 때 덜컥덜컥 붙으면서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행운이 주어진 셈이다.



- 일찍 데뷔해 또래보다 먼저 사회생활의 고충이나 직업적 고민을 겪는 과정은 어땠나.
= 마음의 준비가 조금은 덜 된 상태로 현장에서 모든 걸 처음 겪었기 때문에 확 움츠러든 시기가 있었다. 대학 다닐 땐 그냥 없는 사람이고 싶은 날들이 많았다. 데뷔 후 학교에도 늘 마스크를 쓰고 다녔는데 유명하지도 않은 배우가 생색을 낸다고 욕먹기도 하고… 보여지는 자리에선 언제나 프로페셔널하게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게 맞지만 배우도 누구나 그렇듯 그저 숨고 싶은 날들이 있다.



- 2000년대 초 선풍적인 인기를 끈 귀여니 소설 원작 영화의 여자주인공으로 데뷔한 이후 유난히 발랄한 이미지로 풀이됐다.
= 최형인 교수님께 연기 수업을 받을 때면 나는 항상 비극 위주로 독백을 준비해가는 학생이었다. <늑대의 유혹> 전이었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비극 연기는 이만하면 충분하니 넌 앞으로 희극만 해라.” 내게 없는 무언가를 그때 정확히 보신 것 같았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 대사를 외우면서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웃음) 그러다 데뷔를 하고 교수님을 오랜만에 다시 만났을 때 “너답지 않게 밖에선 어쩜 그리 까부는 역할만 하냐”고 신기해하실 정도였다. 그때만 해도 트렌드가 로맨틱코미디, 그리고 캔디형 여자주인공이었기 때문에 <늑대의 유혹> 정한경 이후 6~7년간 줄곧 밝은 역할만 맡았다.



- 특유의 낮고 그윽한 목소리의 진가를 30대 이후부터 제대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 타고나길 음색이 낮고 안으로 들어가는 목소리다. 그런데 20대 때 현장에 나가면 언제나 ‘너무 진지하다, 우울해 보인다’는 피드백을 곧잘 들었다.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들은 디렉션이 ‘톤 좀 높여줘’인 경우도 허다했다. 기자회견할 때 좀더 밝고 귀엽게 톤을 높여서 말해 달라는 요청도 있었고. 그러니 나로서는 '잘'하기 위해 하이톤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열심히 고음 내는 법을 연습했고 현장에선 있는 힘을 다해 까불고 놀면서 발랄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방전돼서 쓰러져 자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 외부의 요구와 내부의 자질이 어긋났던 그 시기를 지금 돌아볼 때, 이청아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 연기력에 대한 평가도 좋지 않았기에 복합적인 이유로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고 23살 때 건강이 한번 훅 무너졌었다. 25살 때 소속사 계약 갱신을 할 시점이 왔는데 배우 일을 계속하는 게 맞는지 근본적인 고민부터 찾아왔다. 내가 보는 나와 소비되는 나의 차이가 너무 커서 학교로 더 숨어들었다. 데뷔 이전의 나를 알던 사람들은 스크린 속 이청아에 어색함을 느끼고, 배우 이청아를 먼저 접하고 입학한 후배들은 실제 나를 보고 의외라고 했다. 연기 전공이 아니라 연출 전공인 내게 왜 배우가 연출을 공부하냐고 보는 시선도 있었고 누구는 내게 배우보다는 액팅 코치가 더 맞겠다고 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가장 잘하고 못하는 게 뭔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종잡기 힘든 게 괴로울 때도 있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에 오히려 단련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때는 ‘여기까지만 하고 관둔 배우로 기억될 수는 없겠다, 어떻게든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을 만한 대중의 평가를 받아보고 그때 미련 없이 관두자’는 생각으로 버텼다. 사람이 신기한 게, 한번 마음먹고 나면 한결 수월하게 여러 시도들을 하게 된다.



- ‘한번 잘해내면 다음엔 더 잘해낼 거야’가 아니라 ‘어떻게든 한번 잘해낼 때까지만 해보고 관두겠다’라!
= 패배자의 마음이지. 기준치가 높은 사람인데 정작 나 자신이 거기에 못 미친다는 걸 아니까. 외로웠던 고군분투의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배우의 일을 특별하게 말하고 싶진 않다. 학생, 직장인, 주부 할 것 없이 다 비슷한 과정을 겪지 않을까? 누구나 자기 삶에서 각자의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다정해야 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자기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은 모두가 동일한데 그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나의 이런저런 부족함에 대해 동생에게 토로하다가 한마디 조언을 듣고는 머리가 띵해졌다. “누나가 남들한테 힘 주는 만큼 자신에게도 딱 한번만 힘 줄 생각을 해봤음 좋겠어.” 그러니까 셀프 페널티를 주란 말이었다. 그때부터는 가끔 나를 남처럼 지켜보곤 한다. 그제야 <위플래쉬> 교수님이 되어 스스로를 다그치는 내가 보이더라. 내가 플레처(J.K. 시몬스)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웃음)



- 대화할수록 자기 자신을 대하는 엄격함, 혹은 절제력 같은 것을 느낀다.
= 배우 일을 하면서 내가 가장 감사하게 느끼는 건 이 일이 내 안의 냉소를 어떻게든 깎아내 다정하게 만들어준다는 거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에게 관대하지가 못했다. 동물들과는 친밀한데 사람은 어렵기도 했다. 그래서 배역을 만날 때도 타인과 약간의 거리감을 두는 인물을 연기할 때 굉장히 편안함을 느낀다. 쉽게 말해 내가 아는 이야기인거지. 배우는 정말 좋은 직업이다. 내 역할로서 그 인물들이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사람을 이만큼 이해하고 공부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을 것 같다. 나는 그저 깊이 파고들고 조용한 걸 좋아했으니까. 그래서 지금도 내가 20대 때 연기한 발랄한 역할들을 관객으로선 즐기며 보질 못하는 편이다. 내게 주어진 역할로서 성실히 임했을지는 몰라도 스스로 그렇게 친근함을 느끼거나 이입하는 캐릭터는 아니었던 거다.



- 삶을 통찰하는 연극이나 소설을 일찍부터 접해서 오히려 더 그랬던 건 아닐까?
= 전부 글로만 배우고 글 속에서만 해본 것 같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유치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골목대장이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성격이 확 바뀌어 말이 없어지고 때때로 가라앉아서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셨다. 지금도 단체 생활에 되게 취약한 편이다. 그래서 학교 연극 워크샵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영화를 연출할래도 단체생활이 필수이지만 적어도 내가 원하는 사람들과 소규모로 꾸릴 수는 구조니까.



- 듣다 보니 다행스럽고 아름다운 건, 배우라는 직업이 나다움과 불화하는 아픔도 줬지만 동시에 나를 더 넓은 인간으로 깨부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는 점이다.
= 드라마 <그저 바라보다가>(2009) 때 중요한 경험을 했다. 황정민 선배님 연기를 옆에서 보고 배우고 싶어서 무조건 하겠다고 한 드라마이고 반응도 좋아서 행복했던 작품이다. 그것과 별개로 내 캐릭터인 구민지에 적응하는 과정은 꽤 힘들었다. 한시도 입을 쉬지 않는 애였다. 처음엔 어떻게 이렇게 사는지, 너무 피곤하게 사는 건 아닌지 힘들어하다가 어느 순간 이 아이의 마음이 내게 자연스럽게 스미더라. 대화의 공백이 생기거나 상대가 어색해하는 것 같으면 그 불편함을 자기가 풀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이런 저런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민지는 그저 자기 주변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늘 행복했으면 좋겠고, 남의 웃음이 좋은 애였던 거다. 그걸 이해할 무렵 실제 내 삶에서도 새롭게 받아들이게 된 인간관계가 있다. 배우 일은 부족한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인간의 면면들을 하나씩 이해하고 수집하게 해 준다.



- 인간 이청아는 언제 소박한 행복이나 자유를 느끼나.
=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 들어가기 전 휴식기를 가지면서 잠시 여행을 다녔는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요리하다가 생크림이 부족해서 그냥 씻지도 않은 채로 잠옷 입고 낯선 도시의 슈퍼로 뛰쳐나갔다. 불만 꺼놓고 우다다다 뛰어갔다 오는 순간에 ‘왜 내가 그동안 이런 순간을 더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칠 정도로 행복했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아직 식지 않은 따끈따끈한 요리를 완성했지. 그런 시간들이 나를 키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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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다움을 고민하고 지켜온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이청아를 만든 것 같다. 유튜브 채널 <MOCA 이청아>를 보면서 배우 이청아 뿐 아니라 생활인 이청아를 향한 호감과 동경을 표현하는 구독자가 많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 정말 그런가! 감사한 한편 왜 좋아해주시는지 나도 궁금하다. (웃음) 유튜브나 SNS 속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일까 생각해보면 결코 아니다. 작품 속 캐릭터가 아닐 때에도 언제나 일종의 공인으로서 소화해야 할 역할이 있다. 물론 팬들에 대한 고마움이나 사적인 이야기를 편안하게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행복하다. 특히 책 읽어드리는 코너는 꼭 하고 싶었다. 즐겁지만 유익함도 있는, 에듀테인먼트적인 채널을 바랐거든. 어떤 식으로든 나를 지켜보고 소비하는 분들에게 유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 일상 브이로그나 데일리 루틴을 담은 콘텐츠에 ‘갓생’, ‘워너비’ 같은 수식도 주어진다.
= 한동안은 유튜브 속 나와 실제 나 사이의 괴리를 관찰하면서 살짝 자책한 적도 있다. 나도 하루를 완전히 망쳐버릴 때가 있고 자기 관리에 신경 쓰지 않는 시간도 있는데, 나의 1부터 10까지를 모두 이야기해도 가장 잘 소비되는 것만 쇼츠로 뽑혀서 나가니까. 고등학생 이후로는 몸무게가 40kg대였던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이청아가 48kg을 유지하는 법’ 같은 것만 전면에 드러날 때는 근심과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지금은 그 파도가 한차례 지나갔다. 아무리 좋은 수식도 의식하기 시작하면 그 안에 갇히기 마련이다. 아, 체중 이야기를 좀더 보태자면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체중보다는 눈보디에, 근육랑에 신경 쓰게 된다. 그 편이 건강하고 보기도 좋다.



- 사실 가장 돋보이는 건 내향형의 인간, 예민한 취향의 소유자로서 이청아의 면모가 잘 담긴 순간들이다.
= 학교 다닐 때 시나리오를 써가면 교수님이 “청아야, 왜 네 시나리오엔 사람이 4명 이상 나오지 않는 거냐”라고 했다. 너무 놀랐다. 왜냐하면 실제로 4명 이상이 모인 자리를 잘 안 가기 때문에. (웃음) 4명이 넘어가면 그때부터 집에 가고 싶다. ‘이쯤이면 내가 없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나는 극도로 내향적인 성격이었다가 배우 일을 하면서 비로소 사회화가 된 경우다. <늑대의 유혹> 이후 배우 일에 한동안 부담을 크게 느끼던 시절을 지금 돌이켜보면 약간의 대인기피증 증상도 있었던 것 같다. 10대와 20대까지, 나를 상상하게 하고 버티게 만든 많은 힘의 출처는 대부분 책으로부터 나왔다.



- 지금은 자신다움이 타인의 기대와 맞아떨어지는 나이대와 자연스럽게 만난 것 같기도 하다.
= 정말 그렇다. 그리고 30대를 지나면서 배우라는 직업 세계에서 내가 쓰이는 방식을 이해하면서 좀더 큰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됐다. 20대엔 연기에 대한 열의만으로 불태웠다면 지금은 이런 생각도 해본다. ‘내가 계속 열심히 하더라도 어쩌면 죽기 전까지 스스로 원하는 배우의 모습에 가닿지 못할 수도 있겠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거지?’ 비관적인 예측이 아니라 그런 삶에 갈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찬찬히 검토해보게 된다. 많은 배우들이 가진 걱정이 내게도 물론 있다. ‘어느 순간 선택받지 못하는 순간이 됐을 때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같은. 삶에 발붙이고 싶은 것, 연기만큼 일상에도 충실하고 싶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아무래도 인간 이청아를 보여드릴 수 있는 창구가 늘어난 영향도 크다. 얼마 전에 예능에 출연했는데, 과거의 이청아는 본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으려던 느낌이란 얘기를 해주셨다. 내가 안 보여주려고 했다기보단 그저 그런 상황이었을 뿐이다. 작품과 캐릭터로만 대중과 만난 시기가 있고, 지금은 소셜미디어가 발달한만큼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모습을 더 많이 보여드릴 수 있게 됐다.



- 얼마 전 유튜브 채널에서 베스트셀러인 <나는 메트로폴리탄의 경비원입니다>를 소개했다. 두 가지에 놀랐다. 북튜버에 최적화된 발성과 목소리,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어머니의 투병 생활을 상세히 회고한 점이다.
= 꼭 진행하고 싶었던 책이다. 출판사에 먼저 허가를 구하기도 했다. 책 이야기를 하면서 나의 사적인 경험도 함께 더하고 싶은데 괜찮겠냐고. 코로나19 팬데믹이 지나갔고 봄이 왔다. 상실을 겪은 분들에게 회복의 시간이 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 소개는 꼭 4월에 올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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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찍 데뷔해 가족과 보낼 시간이 많지 않았을 텐데, 이른 이별이 더 아팠을 듯싶다.

=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인 부분도 있다. 엄마의 병은 플랜이 있는 병이었다. 1년 뒤, 5년 뒤의 단계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그래서 대비책을 세웠고 어떤 때는 일부러 더 많이 일했다. 1년에 세 작품씩 쉬지 않고 일했던 건 그래서였다. 커리어적인 전략을 짜는 게 필요한 시기였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일일드라마를 연달아 두번씩 하고… 트레이닝한다는 생각으로 임했고 쉬는 날에는 가족과 보내는 한순간 한순간을 절박하게 만끽했다. 엄마가 떠나기 전까진 극 중에서 잃어버린 엄마를 만나는 순간에 놓여도 사실 그 감정을 잘 몰랐던 것 같다. 엄마라는 단어가 내 안에서 갖는 의미가 달라진 나중에서야 어떤 아픔을 깊이 깨닫게 됐다. <나는 메트로폴리탄의 경비원입니다>를 소개할 때도 한 얘기지만, 나는 슬픔이란 아주 맑은 것이라고 믿는다. 어릴 땐 슬픔이 무서워서 일부러 열어보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제대로 직면하고 난 이후 스스로가 정화되는 것을 느꼈다.



- 그 자각이 연기에도 반영되었을까.
= 연기를 하면서 더더욱 세밀하게 느낀다. 물론 세상에는 분노로 휘감겨 뼈가 저리는 슬픔도 있다. 하지만 그건 화에 가깝다. 그런데 맑은 슬픔은 오히려 회복을 돕는 감정이다. 슬픔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나면 졸음이 온다. 몸이 회복하려고 움직이기 시작하니까. 영화 <다시, 봄>(2018)에서 사고로 딸을 잃은 인물을 연기할 때 온몸으로 느꼈다. 캐릭터가 아이를 잃은 상황에 처해 있는 동안엔 몇달간 위장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내내 신경성 위경련을 달고 살았다. 내 몸이 배우 이청아가 느끼는 감정을 진짜라고 착각한 거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시간이 거꾸로 흐르면서 아이와의 시간을 다시 살게 된 이후에 깊은 슬픔의 눈물을 흘릴 때는 오히려 기운이 좋아졌다. 배우로서 쓰는 감정들을 일종의 카테고리화해두기도 하는데, 그 경험 이후로 슬픔이란 단어를 위로 올렸다. 슬픔은 나를 좀먹는 게 아니라 재생시키는 거라고.



- 드라마 커리어를 바쁘게 쌓아왔는데, 관객 입장에선 이청아의 영화도 더 많이 보고 싶다. 스크린에서 더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는지.
= 내 바람도 같다. 아직 제대로 만나지 못했지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장르는 멜로라고 생각하는데 나를 그렇게 써주시질 않는 것 같다! 좋아하는 영화들도 다 멜로드라마가 기반인 작품들이다. <결혼 이야기> <레볼루셔너리 로드> <언페이스풀> <클로저>, 드라마는 <밀회> <인간실격>…



- 모두 감정의 파고와 농도가 짙은 사랑 이야기들이다. (웃음)
= 그리고 <캐롤>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도! 로맨틱코미디의 엔딩은 언제나 첫 키스여서 과거의 나는 늘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에 퇴장해야 했다. 이제는 사랑의 중간 과정에 놓여 있는 얼굴을 보여드리고 싶다.



- 이청아의 행보는, 한 사람의 개인적 궤적과 직업적 행보가 상호 영향을 끼치며 양쪽 모두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앞으로는 어떻게 나이 들어가고 싶나.
= 음, 그 기대를 배반하면서? (웃음) 배우라는 직업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살아 있는 한 다 함께 나이 들테니 지켜봐주는 분들에게는 그저 언제나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 중의 인간으로 비치길 바란다. 혹여나 중간에 갑자기 삐끗할 수도 있고 부족한 모습을 보여드릴 수도 있지만 계속 진행형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을 것 같다. 좋은 사람, 좋은 배우가 되려는 강박 없이 스스로를 너무 대단한 역할에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걸어가고 싶다.



- 잠시 숨고르기를 할 이청아의 요즘 일상은 어떤 모습이 될까.

= 스스로 채찍을 몇번 때리고 당근을 몇번 줘야 정신을 차리는 사람인지, 이를테면 자기를 다루는 방법 같은 것을 나이 먹으며 조금씩 터득하게 된다. 사소하게는, 어떻게든 집 밖으로 나 자신을 끌고 나가려 한다. 카페에 머무는 것에 한계를 느껴서 최근 들어 공유 오피스에 나가기 시작했다. 열중해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있으면 자극을 받는다. 중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정기권을 한번 끊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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